이중고 시달리는 제지 업계, 시험대 오른 ‘3세들의 시대’
  • 박창민 기자 (pcm@sisajournal.com)
  • 승인 2022.06.23 07:30
  • 호수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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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계 속도 높이는 3세 경영인의 성적표 ‘극과 극’
제지 업계가 직면한 위기 어떻게 돌파할지 주목

제지 업계의 젊은 오너 경영인들이 시험대에 올랐다. 최근 몇 년 사이 주요 제지 기업들은 오너 3세 경영으로 재편되고 있는데, 원자재 가격 상승과 각종 비용 증가로 녹록지 않는 경영환경에 놓이게 됐다. 국내 제지 산업의 근간을 다진 창업주 할아버지와 산업 부흥을 이끈 아버지 세대, 그 뒤를 이어 가업을 이끌게 된 3세 경영인들에게 미래 성장동력 확보와 실적 개선이라는 중책이 맡겨졌다.

무림P&P 울산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모습ⓒ무림그룹 제공
무림P&P 울산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모습ⓒ무림그룹 제공

유학파·40대 초반, 오너 3세 경영인

펄프·제지 전문기업 무림그룹은 ‘3세 경영’ 3년 차를 맞이하고 있다. 이무일 창업주의 장손인 이도균 대표는 2020년부터 그룹을 이끌고 있다. 창업주의 장남이자 이 대표의 부친인 이동욱 회장은 사실상 경영 일선에서 한발 물러난 상태다. 무림그룹은 승계 작업도 거의 마무리해 이 대표가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다.

1978년생인 이 대표는 미국 뉴욕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으며, 2007년 무림페이퍼 영업본부로 입사했다. 그는 제지사업본부와 전략기획실 등을 거치며 14년간 경영 실무를 쌓았다. 2010년에는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울산의 무림P&P 일관화공장 건설현장에 직접 근무했다. 이곳에서 국내 최초의 펄프와 제지 일관화공장 준공을 성공리에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근에는 플라스틱을 대체할 펄프몰드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그룹의 미래 성장동력을 신소재 사업으로 낙점하고 연구·개발(R&D)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이 대표는 취임 3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경영 성적표는 다소 아쉽다. 지난해 무림페이퍼의 연결 기준 매출액은 1조553억원으로 2019년(1조1237억원)에 비해 6% 감소했다. 영업이익은 2019년엔 688억원에 달했지만, 2020년 272억원으로 줄어들었다. 지난해에는 298억원에 그쳤다. 또 무림페이퍼는 지난해 별도 기준으론 184억원의 영업손실을 내며 적자 전환하기도 했다.

무림P&P 경영 실적도 마찬가지다. 무림P&P의 연결 기준 영업이익은 2019년 494억원에서 2020년 63억원으로 급감했다. 지난해엔 293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며 전년보다는 증가했지만 2019년 수준의 실적은 회복하지 못했다. 그가 대표이사에 선임되기 전인 2019년과 비교하면 무림페이퍼와 무림P&P 등 주요 계열사의 매출과 영업이익이 크게 뒷걸음질한 실정이다.

종합제지 업체 깨끗한나라도 3세 경영에 가속도가 붙었다. 현재 최병민 깨끗한나라 회장의 장녀인 최현수 깨끗한나라 대표가 경영 전반을 총괄하고 있다. 1979년생인 최현수 대표는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심리학과 순수미술을 전공했으며, 2006년 깨끗한나라에 입사했다. 이후 최 대표는 마케팅팀, 제품개발팀장, 2013년 경영기획실장, 2014년 생활용품사업부장, 2015년 경영기획담당 상무를 거처 2019년 대표이사 부사장 자리에 올랐다.

최 대표는 성과를 통해 경영 능력을 인정받은 오너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2017년 깨끗한나라는 생리대 파동으로 매출에 큰 타격을 입어 실적 악화에 시달렸다. 당시 최 대표는 실적 개선이라는 중책을 맡고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는데, 사업구조 조정과 조직체계 개편 등으로 깨끗한나라는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아울러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에도 마스크, 손소독제, 손소독 티슈 등 위생 제품을 출시해 사업을 발 빠르게 전환하며 위기에 대응했다. 이러한 경영 실적을 바탕으로 최현수 대표는 지난해 3월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승진했다. 경영 능력만 보면 최 대표는 깨끗한나라 경영권을 이어받을 후계자라고 할 만하다.

오너 3세, 경영 능력 입증이 관건

그러나 회사 지분을 연결시키면 최 대표의 경영권이 안정됐다고 보기 어렵다. 현재 깨끗한나라의 최대주주는 최 대표의 남동생인 최정규 이사다. 그는 16.03%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반면 최 대표가 보유한 회사 지분은 7.7%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최정규 이사가 지난 3월 기타비상무이사에서 사내등기임원으로 취임해 경영 전면에 나섰다. 이 때문에 장남과 장녀의 경영 승계 경쟁이 시작됐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한국제지 역시 3세 경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단재완 한국제지(혜성그룹) 회장의 장남인 단우영 부회장이 현재 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는 1979년생으로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한국제지에는 2008년 입사했다. 그는 복사용지 브랜드 ‘밀크(miilk)’를 성공적으로 론칭해 입사 2년 만에 부사장으로 초고속 승진했으며, 한국제지뿐 아니라 해성그룹 내 주요 계열사를 두루 거치면서 10년 넘게 경영 수업을 받았다. 단 부회장은 한국제지 외에도 해성디에스, 계양전기 등 해성그룹의 주요 계열사 대표를 맡는 등 사실상 그룹을 총괄하고 있다.

단 부회장은 그룹을 총괄하면서 한국제지의 사업구조 재편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원창포장공업 인수를 시작으로 백판지 기업인 세하 등을 잇달아 사들였다. 세하는 국내 백판지 시장에서 15% 내외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빅3 기업이다. 과거 인쇄용지 등 제지 산업에 주력했던 해성그룹이 골판지와 판지 등 판지 산업으로 그 중심축을 옮긴 것은 산업 트렌드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며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조정한 결과다. 여기에는 단우영 부회장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솔제지의 3세 경영 승계 작업도 조용히 속도를 내고 있다.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의 장남인 조성민 상무가 2016년 한솔홀딩스 입사 후 지난해 상무로 승진했다. 1988년생인 조 상무는 젊은 만큼 아직 경영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다. 재계에서는 조 상무의 경영 승계에 큰 걸림돌은 없을 것으로 본다. 조동길 회장은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장녀 조나영씨는 미국 다트머스대학에서 예술을 전공한 뒤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는 등 한솔그룹 경영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렇듯 보수적인 조직으로 꼽혔던 제지 업계도 젊은 경영자들이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변화를 꾀하고 있는 모습이다. 공교롭게 이도균 무림 대표, 최현수 깨끗한나라 대표, 단우영 한국제지 부회장 등은 모두 40대 초반 동년배다.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회사에 입사해 실무를 거쳐 대표 자리에 올랐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제지 업계 ‘이중고’…어떻게 돌파할까

무엇보다 국가 기간산업이었던 제지 업계는 주요 기업들이 설립 50~60년을 맞으면서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특히 3세 후계 구도를 그리는 시점이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과 겹치면서 급변하는 시장 상황을 헤쳐갈 젊은 경영인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 오너 3세 경영인들은 이미 성숙기에 접어든 제지 업계의 기존 경영 방식에서 과감히 탈피해 산업 패러다임 변화에 따른 유망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며 미래 먹거리를 찾아나서고 있는 모습이다.

아울러 코로나19 팬데믹과 글로벌 공급망 차질 등으로 오너 3세 경영인들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종이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는 악재가 지속되고 있으며, 돌파구인 수출마저 줄어들어 제지 업계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가뜩이나 내수 물량 감소로 고전하고 있는 제지 업계는 생산량의 35% 이상을 해외에 내다 팔던 수출 물량이 20% 선을 가까스로 지키고 있다. 수출 효자업종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업계에 빨간불이 켜진 상황이다. 새로 경영권을 짊어진 이들 3세 경영인이 변화의 파도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재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판매가격 올려도 제지 업체들은 ‘울상’
지속적인 원자재값 상승으로 채산성 악화일로

국제 펄프 가격 인상과 각종 에너지 비용 증가로 제지 업계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올해 초 원·부자재 가격 상승으로 ‘반짝’ 실적이 개선됐지만, 상승세가 지속되면서 제지 판매가격을 인상하고도 수익성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공개한 원자재 가격 정보를 보면, 지난 5월 미국 남부산 혼합활엽수펄프(SBHK) 가격은 톤당 940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6월 톤당 925달러를 기록한 이후 650달러 선까지 내려갔으나, 12월 655달러로 다시 반등했다. 올 들어서는 1월 675달러, 2월 725달러, 3월 785달러, 4월 840달러로 상승세가 지속되고 있다.

올해 초 제지 업체들은 원자재값 상승에 따라 제지 가격을 인상하며, 쏠쏠한 재미를 봤다. 한솔제지의 1분기 연결기준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55% 늘어난 246억원, 무림페이퍼 영업이익은 67억원으로 전년 동기(-98억원)와 비교해 흑자 전환했다. 한솔제지는 펄프 가격의 영향을 받는 인쇄용지 부문은 적자였지만, 펄프 가격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산업용지 부문의 흑자와 달러 거래로 인한 일시적인 환율 효과의 덕을 봤다. 무림페이퍼는 제지 판매가격 인상분이 반영되면서 흑자를 기록했다.

문제는 제지 판매가격 인상을 통한 수익성 개선을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는 데 있다. 제지 업체들은 제지 판매가격을 올려 원재료 구입 시점과 투입 시점 간 시간차로 발생하는 수익을 노린다. 통상 제지 업체들은 생산에 필요한 펄프 등 원재료를 2~3개월간 비축해 제지 판매가격이 인상되기 전 에 싸게 구입한 원재료로 제지를 생산·판매해 높은 수익을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가격 인상을 통한 수익성 개선은 펄프 가격이 내려가야 가능한데, 펄프 가격이 6개월 이상 계속 오르면서 가격 인상 카드는 더 이상 먹히지 않고 있다. 게다가 해상운임과 유가·옥수수 가격 상승 등 외부 변수들도 비용 부담을 가중시키면서 가격 인상만으로 손실 비용을 줄여 나가기엔 역부족인 상황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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