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전성시대’가 시작됐다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22.10.08 13:05
  • 호수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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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원 차트 점령한 걸그룹들…K팝 산업의 ‘대세’로 올라선 이유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음원 차트를 걸그룹이 점령했고, 팬덤의 지표로 여겨지던 음반 판매량에서도 걸그룹이 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밀리언셀러’가 보이그룹만이 가질 수 있는 타이틀이라는 공식은 예전에 깨졌다. 블랙핑크는 2020년 정규 1집 ‘디 앨범’으로 밀리언셀러 반열에 오른 지 2년 만에 정규 2집 ‘본 핑크’로 214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더블 밀리언셀러’에 등극했다. 빌보드를 비롯한 글로벌 음원 차트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보여주는 블랙핑크의 모습은 K팝 걸그룹의 부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걸그룹의 어마어마한 계보는 국내에서 이어진다. 에스파, 아이브, 있지가 밀리언셀러 대열에 합류했고, 르세라핌과 뉴진스 같은 4세대 걸그룹이 음원 차트 최상위권을 점령하며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지금 시점의 걸그룹 열풍은 ‘걸그룹의 부흥기가 다시 돌아왔다’는 해석 정도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지금은 ‘걸그룹 전성시대’다. 왜 걸그룹이 대세가 된 걸까. 걸그룹이 K팝 산업 지형도까지 바꾸면서 열풍을 일으키는 배경은 뭘까.

르세라핌ⓒ쏘스뮤직 제공
뉴진스ⓒ뉴스1 제공
아이브ⓒ스타쉽 엔터테인먼트 제공

여성 팬덤 확장되면서 시작된 걸그룹 부흥기

블랙핑크, 아이브, 뉴진스, 트와이스, 소녀시대, 엔믹스, 르세라핌. 써클차트(구 가온차트)의 9월 4주 차(9월18~24일) 글로벌 K팝 차트 상위권을 점령하고 있는 그룹들이다. 지코의 《새삥》(10위)과 방탄소년단의 《Dynamite》(16위)를 제외하고 1위부터 20위에 포진한 음원은 모두 걸그룹의 것이다. 블랙핑크의 《Shut down》 《Pink Venom》, 아이브의 《After LIKE》, 뉴진스의 《Hype boy》 《Attention》, 트와이스의 《Talk that Talk》이 상위권을 지키며 인지도를 입증했다. 대중성을 지향하는 걸그룹 노래는 항상 음원시장에서 보이그룹보다 우위에 있어 왔지만, 지금은 OST, 힙합 등 다른 장르의 곡들을 모두 밀어내고 강세를 보이고 있다. 상반기 음원 판매량 중 걸그룹 점유율이 78%에 달할 정도다. 소녀시대부터 트와이스, 뉴진스에 이르는 2·3·4세대 걸그룹이 모두 한 시대에 등장해 차트 순위권을 점령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음반시장에서 걸그룹의 영향력도 확대되고 있다. 과거에는 보이그룹은 여성이, 걸그룹은 남성이 좋아한다는 공식이 있었다, 충성도 높은 여성 팬덤이 음반시장을 움직였기에 그 시장을 이끄는 것은 보이그룹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메가히트곡을 보유했던 음원 강자들도 올리기 힘들었던 음반 판매량을 지금의 걸그룹들이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보이그룹 못지않은 화력을 보이며 걸그룹 음반 밀리언셀러 시대가 열렸고, 흥행지표로 여겨지는 앨범 발매 첫 주 판매량인 ‘초동 판매량’ 기록도 경신되고 있다. 지난 7월 뉴진스는 31만 장의 초동 판매량을 기록했다.

이 놀라운 화력을 만들어내는 것은 여성 팬덤이다. 걸그룹을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K팝 여성팬이 늘어나면서 팬덤 규모가 달라졌다. 알라딘의 앨범 구매자 분포를 살펴보면 아이브의 싱글 3집 ‘After LIKE’ 앨범 구매자의 73.6%가 여성이다. 뉴진스의 ‘New Jeans’ 앨범 구매자 중 여성 비율은 82%가 넘는다. 20대 여성(29.3%)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10대 여성(27.5%)이 그 뒤를 잇는다. 과거에도 걸그룹의 팬덤 규모는 여성 팬덤에서 결정된다는 얘기가 있었다. 여성팬을 끌어들이는 일명 ‘여덕 멤버’가 그룹 내에 존재하면 걸그룹 전쟁의 승자가 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이제 걸그룹 자체에 대한 여성 팬덤이 넓어지면서, ‘유사연애’로 해석하던 K팝 팬덤에 대한 고정관념, 이성애적 관점에서 아이돌이 소비된다는 인식도 깨졌다. 이상형으로 보이그룹을 바라보던 10대 여성 팬덤은 걸그룹을 자신의 취향을 반영한 아이돌이자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2030 여성 팬덤은 ‘이모팬’ ‘언니팬’ ‘할미팬’이 돼 신인 걸그룹을 ‘갓기(GOD+아기)’라 부르며 응원한다. 앨범 구매력이 뛰어난 20대 이상 여성팬들이 걸그룹의 팬덤으로 포함되면서 보이그룹에 전념하던 기획사도 걸그룹 쪽으로 시선을 맞췄다. 다양한 매력의 콘셉트가 걸그룹에 녹아들면서 신규 팬층이 유입됐고, 음반시장의 파이 자체가 커졌다.

(여자)아이들 미니 5집 《I love》 화보ⓒ큐브엔터테인먼트 제공

다양한 콘셉트와 장르로 대중 공략

여성팬이 늘어난 배경에는 달라진 음악과 무대가 있다. 청순하거나, 귀엽거나, 섹시하던 과거의 걸그룹과는 다르다. 당당하고 주체적인 가사와 강렬한 퍼포먼스를 들고나오는 걸그룹이 많아졌다. 1세대 걸그룹은 “오직 너 하나를 위해 내가 살아가야 한다는 것 말고 내게 중요한 게 어딨겠어”(S.E.S 《I’m your Girl》), “내 모든 걸 원한다면 너에게 줄 거야, 난 니 꺼야”(핑클 《내남자친구에게》)라고 노래했지만, 지금의 걸그룹은 “사랑 그깟 거 따위 내 몸에 상처 하나도 어림없지”(여자아이들《TOMBOY》)라 말하고, “원하면 감히 뛰어들라(아이브 《LOVE DIVE》)”며 나르시시즘 가득한 가사를 노래한다. “욕심을 숨기라는 네 말들은 이상해, 겸손한 연기 같은 건 더 이상 안 해(르세라핌 《FEARLESS》)”라며 세상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김영대 음악평론가는 “‘과거 보이그룹은 여자가, 걸그룹은 남자가 좋아한다’는 공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룹을 만들 때도 이런 점을 의식했다. 이전에는 남성들이 좋아하는 취향으로 걸그룹을 만들었다면, 지금은 전반적으로 사회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걸그룹에 대해 재고하는 분위기가 되면서 적극적이고 자기 주체적인 여성상을 많이 다루는 분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대중적 호소력이 좋았던 걸그룹이 팬덤까지 확보하면서, 음반 판매량에서도 뒤지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K팝 산업의 저변이 넓어진 것도 걸그룹의 팬덤이 확장된 배경 중 하나로 거론된다. 아이돌 산업이 글로벌 산업으로 거듭나면서 글로벌 팬덤을 확보하기 위해 문화 주소비층인 여성과 Z세대를 겨냥한 주체적인 가사, 당당함의 정서를 걸그룹의 음악에 담게 됐다는 것이다. 김진우 써클차트 수석연구위원은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남성 팬덤을 의식한 ‘섹시’와 ‘청순’ 콘셉트의 내수 위주 걸그룹이 많았지만 블랙핑크의 성공 이후 국내외 여성팬들을 공략하는 걸크러시 콘셉트 중심으로 걸그룹 시장이 재편되면서 음반시장에서 걸그룹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블랙핑크 《핑크 베놈》 뮤직비디오 3억 뷰 돌파 기념 이미지ⓒ연합뉴스<br>
블랙핑크 《핑크 베놈》 뮤직비디오 3억 뷰 돌파 기념 이미지ⓒ연합뉴스

걸그룹들의 콘셉트도 다양하다. 블랙핑크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와 함께 걸크러시를 강조하고, 아이브는 ‘나르시시즘 3부작’을 통해 자기애를 노래한다. 에스파의 메타버스 세계관은 독보적이다. 하이브의 레이블 쏘스뮤직에서 데뷔한 르세라핌이 퍼포먼스를 강조했다면, 같은 하이브 산하 어도어의 뉴진스는 하이틴의 자연스러운 감성으로 콘셉트를 잡았다. 한때 걸그룹들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됐던 섹시 콘셉트가 사라지면서 선정성 논란도 사그라들었다. 음악에서도 다양성은 폭발한다. 아이들은 팝록·팝펑크 장르를 취하고 있고, 에스파는 비주류로 여겨지던 하이퍼팝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며 인기를 끌었다. 뉴진스는 1990년대풍 R&B 장르의 음악을 선보였다.

최광호 한국음악콘텐츠협회 사무총장은 “(여러 그룹이) 비슷한 콘셉트를 취한다면 메이저 그룹이 시장을 이끌어가는 구도가 된다. 예전에는 1~2개 메이저 걸그룹이 K팝 시장을 이끌었다면, 올해는 걸출한 신인 그룹과 복귀한 메이저 그룹이 함께 시너지를 내며 시장을 더 키우고 있는 양상”이라고 짚었다. 그는 “3·4세대로 넘어오면서 아이돌 시장이 포화됐다는 평가가 있었고,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 ‘다양성’을 택한 것”이라며 “각자의 개성을 살리고 기존의 형식을 파괴하는 모습으로 걸그룹들이 등장하고 있고, 대중들은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이미지와 다양한 콘셉트에 환호하게 됐다. 보이그룹 기획에서도 이런 식의 다양한 시도가 이뤄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소녀시대가 8월5일 서울 강남구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에서 데뷔 15주년 기념 컴백 기자회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뉴시스 제공

완성형 아이돌에 반응하는 팬덤

원더걸스, 소녀시대, 카라, 시스타, 브라운아이드걸스 등 일명 2세대 걸그룹이 등장했을 당시도 걸그룹의 호황기로 불렸다. 그러나 지금에 비해 K팝 산업이 전반적으로 영세했던 시기인 데다, 그룹 활동도 방송과 국내 행사 위주로 구성됐기 때문에 인지도에 비해 따라오는 산업적 수익이 약했다. 일부 그룹은 생명력도 길지 않았다. 지금은 해외 활동을 중심으로 걸그룹의 구성과 활동이 재편되고 있고, 메이저 그룹까지 컴백해 롱런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걸그룹 시장을 키우고 있다. 여성 팬덤이 확장된 데는 SNS의 역할도 컸다. 지난해 워싱턴포스트는 ‘K팝은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나‘라는 기획기사를 통해 K팝이 세계적 인기를 얻게 된 이유 중 하나로 트위터 등 SNS 플랫폼을 꼽았다. SNS 플랫폼이 새로운 팬덤을 키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특히 SNS를 통해 자신의 선호도와 취향을 공유하는 데 익숙한 여성들을 중심으로 K팝 팬덤은 확장됐다.

멤버의 역량은 팬을 이끄는 중요한 요소다. 단순히 예쁜 아이돌이 아닌 대중적 예술성을 갖춘 아티스트로서 걸그룹이 사랑받게 되면서, 한 명의 ‘센터’가 인기를 끌고 가거나 일부 올라운더가 그룹의 역량을 결정짓던 과거의 걸그룹과는 달라져야 했다. 모든 멤버의 능력이 중요해진 것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역량이 검증된 멤버들이 대중성을 확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미 팬덤을 확보하고 역량을 입증받은 멤버들로 기획된 4세대 걸그룹들은 ‘완성형’에 가깝다는 평을 받는다. 김영대 음악평론가는 “오디션 프로그램 등 경쟁 프로그램을 통해 발굴된 멤버들은 팬들과의 친숙함을 미리 확보한다는 데서 걸그룹의 팬덤을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며 “대중적인 호소력이 좋았던 걸그룹이 여성 팬덤까지 확보하게 됐고, 특히 세계시장 진출에 준비된 프로페셔널한 4세대 아이돌들이 등장하면서 걸그룹을 중심으로 산업이 확대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엠넷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48》로 탄생한 아이즈원의 활동이 끝난 이후 아이즈원의 일부 멤버가 재데뷔하며 만들어진 아이브와 르세라핌은 음원뿐 아니라 음반시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걸스플래닛999》를 통해 결성된 다국적 걸그룹 케플러는 초동 판매량 20만 장을 기록하고, 앨범 발매 직후 아이튠즈 차트 주요 11개국에서 전체 장르 차트 1위를 차지하는 등 저력을 보여줬다. K팝 산업의 주도권이 걸그룹으로 넘어온 지금, 마마무와 르세라핌, 아이들 등 또 한 번 팬덤을 거대하게 움직일 걸그룹들의 컴백도 예고됐다. 본격적인 걸그룹 전성시대는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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