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된 고증 논란에 갈림길 선 K사극
  • 정덕현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0.29 11:05
  • 호수 172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분히 고증하거나 가상으로 가거나…상상력과 고증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사극에서 상상력과 사실 사이의 긴장감은 오래된 논쟁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최근 펼쳐지는 사극의 논점은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왜곡보다는 특정 역사적 시공간 고증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런 일은 왜 생기는 걸까.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며 창작에 의한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 tvN 토일드라마 《슈룹》은 이런 자막을 통해 이 작품이 허구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시작한다. 하지만 포스터를 보면 굳이 이런 고지가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이 작품의 색깔이 분명히 담겨 있다. ‘조선에서 가장 걸음이 빠른! 중전마마 납시오.’ 《슈룹》의 포스터에는 이런 파격적인 문구와 함께 상단에는 궁궐을 배경으로 엄격, 근엄, 진지한 김혜수의 얼굴이, 찢긴 듯한 하단에는 빠르게 움직이는 발이 담겼다. 사극 배경이고 주인공은 중전인데, 이 인물은 흔히 보던 사극 속 중전들과는 달리 궁궐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보여줄 거라는 얘기다. 허구다. 저렇게 빨리 걷는 중전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tvN 드라마 《슈룹》 포스터ⓒtvN 제공

허구 내세웠음에도 고증 논란 휩싸인 《슈룹》

그런데 이 독특한 중전 캐릭터에는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와 이 드라마의 장르적 색깔이 녹아있다. 일단 한껏 급하게 어딘가로 씩씩대며 걷는 중전의 모습은 웃기다. 그간 체통으로만 그려졌던 사극 속 중전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비교점을 줘서다. 따라서 이 작품에는 코미디가, 그것도 풍자적 코미디가 담겨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드라마 첫 회를 보면 곧바로 이해되는 것이, 왜 중전이 이렇게 궁궐을 뛰어다닐 수밖에 없는가 하는 공감이다. 그건 자식들 때문이다. 중전의 첫째 아들이 세자로 굳건히 서있고, 그 뒤로 네 명의 왕자가 줄줄이 있다. 이런 중전이 누릴 것 같은 안정감(?)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슈룹》은 먼저 전제한다. 세자가 혈허궐(피가 부족하거나 허해 갑자기 쓰러지는 병)로 쓰러지자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리는 후궁들이 자신의 자식들을 내세우는 치열한 대결이 펼쳐진다. 

궁중 암투에 일종의 고부갈등처럼 전개되는 중전과 대비(김해숙)의 대결 또한 빠지지 않는다. 대비는 오로지 자신의 아들인 왕을 위해 안정된 정국을 유지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현 세자가 강건하지 못하다 여겨지자, 언제든 다른 왕자들을 국본으로 세울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대비 또한 과거 후궁이었지만 국본이 죽은 후 자신의 아들을 지금의 왕으로 세웠던 인물이라는 점은 중전을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게다가 중전은 폐비가 된 윤황후(서이숙)로부터 세자가 사망한 후 사가에서 조용히 지내려 했지만 남은 자식들마저 하나하나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만일 세자가 잘못되고, 동생들이 그 뒤를 잇지 못하면 자신과 자식들 또한 윤황후의 처지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러니 궁에서 중전은 쉴 틈이 없다. 세자는 자꾸 쓰러지고, 공부에는 뜻도 없고 또 야망도 드러내지 않는 나머지 자식들은 세상물정 모르고 사고를 치니 말이다. ‘조선에서 가장 걸음이 빠른 중전마마’라는 캐릭터는 이런 위기 상황이 만들어낸 것이다.  

즉 주인공의 캐릭터만 봐도 《슈룹》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허구다. 《조선명탐정》이나 《음란서생》처럼 조선을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현재를 사극에 빗대 패러디하고 풍자하는 장르물에 가깝다. 이러한 풍자적 요소는 세자와 함께 수학할 배동을 선발하는 시험 준비 과정을 담은 에피소드만 봐도 알 수 있다. 후궁들은 현재의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는 거벽을 데려와 왕자들을 교육시키기도 하고, 예상 문제와 답안을 알려주는 ‘족집게 과외’를 시키기도 한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중전은 직접 왕자 교육에 나서는데 이를 드라마는 ‘가정교학(홈스쿨링)’이라고 부른다. 즉 왕실 교육의 치열한 경쟁을 패러디함으로써 현재의 교육열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슈룹》은 허구를 전면에 내세웠음에도 단 몇 회 만에 고증 논란이 벌어졌다. 2회에 자식을 세자로 만들려는 야망을 가진 황귀인(옥자연)이 등장하고, ‘물건이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간다’는 의미로 ‘물귀원주’라는 말을 할 때 그 한자 표기가 자막으로 소개됐는데 ‘物歸原主’ 대신 중국어 표기법인 ‘物归原主’로 적혀 있었던 것.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논란과 비판이 이어지자 제작진은 그 자막을 수정했다. 또 중전이 임금의 침전을 찾는 장면에서 ‘태화전(太和殿)’이라는 현판이 등장했는데 이것 역시 청나라 시절 자금성 정전의 이름으로 쓰인다며 또다시 중국풍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이와 관련해 CJ ENM 측은 “물귀원주 자막 실수는 시청자의 지적 덕분에 빠르게 바로잡을 수 있었다”면서도 “태화전의 ‘태화’는 신라시대 연호, 고려시대 학당 등 유교문화권에서 좋은 뜻으로 널리 사용되던 단어로, 중국식을 참고한 건 아니다”고 해명했다.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 한 장면ⓒSBS 제공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 한 장면ⓒSBS 제공
중국풍 논란으로 시청자들의 항의에 직면했던 《조선구마사》 한 장면ⓒSBS 제공

《조선구마사》 사태 후 불편해진 중국풍 

논란과 비판에 대해 수정하고 해명하긴 했지만, 이 고증 논란은 어딘가 찜찜함을 남긴다. 그건 여기 드리운 중국풍에 대한 예민한 반응들과 불편한 심경들이 도드라지게 느껴져서다. 그리고 이건 과거 《조선구마사》 사태를 불러일으켰던 ‘고증 논란’을 떠올리게 한다. 접경 지역의 어느 술집에 놓인 중국풍 소품들과 음식들에서 비롯돼 일파만파 커진 논란에 결국 2회 만에 폐지됐던 사태다. 김치도 한복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문화공정이 불러일으킨 대중적 분노는, 조선 개국의 이야기를 일종의 좀비물과 더해 풀어낸 이 판타지 사극을 발화점으로 해서 불이 붙었다. 결국 판타지이고 허구로서 ‘역사 왜곡’이라 부르긴 어렵지만, 그래도 ‘조선’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시공간을 빌려 쓰고 있으니 합당한 고증이 들어가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것은 분명 동북공정에 이은 문화공정으로 인해 생겨난 새로운 문제다. 과거 사극에서도 고증 문제가 자주 등장하곤 했다. 예를 들어 무려 5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거의 1년간 타 방송사의 드라마들을 모두 침몰시켰던 《주몽》에서도 병사들의 갑옷이 마치 ‘로마군단’ 같다는 지적과 함께 비판을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고증과 그에 따른 재현의 빈약함에 대해 그 이상으로 논란이 확산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시에는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에 대한 상상력을 더한 해석들과 관련해 ‘역사 왜곡’ 논란이 더 불거졌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역전됐다. 웬만한 사극이 역사와는 다르다는 인식이 이미 생겨난 터라 역사 왜곡 논란은 예전만큼 뜨겁지 않다. 아예 시작부터 역사를 제대로 다루겠다면 정통사극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제작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퓨전 사극, 판타지 사극이라는 걸 분명히 밝혀 놓는다. 그러니 남장여자인 왕의 사랑을 그리는 《연모》 같은 작품에 역사 왜곡이라는 말을 붙이는 건 어울리지 않는 일이 됐다. 대신 《조선구마사》 이후로는 고증 논란이 더 첨예해졌다. 비록 실제 역사와는 상관없는 허구라 할지라도 ‘조선’이라는 시공간을 그 사극이 쓰고 있다면 적어도 그 생활상이나 신분체계, 풍속, 문화 같은 건 조선의 그것으로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어설프게 상황을 재현하거나 어쩌다 중국풍 느낌이 들게 그려냈다가는 일파만파의 논란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tvN 드라마 《슈룹》 한 장면ⓒ tvN 제공

고증 논란이 더 예민해진 이유 

그래서 최근 사극 중에는 아예 특정 역사적 시공간을 가상으로 세우는 경우도 생겨났다. 동짓날이 되면 몸속에 봉인됐던 마왕이 깨어나 괴물로 변신하는 하람(안효섭)과 그를 사랑하는 천재 화공 홍천기(김유정)의 이야기를 그린 《홍천기》는 그 판타지의 시공간을 가상의 왕국인 ‘단왕조’로 삼았다. 그만큼 역사왜곡이나 고증 논란을 비켜가겠다는 의도다. 최근 방영돼 좋은 반응을 얻었던 《환혼》 역시 영혼을 바꾸는 환혼술을 둘러싼 판타지 사극으로 아예 ‘역사에도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대호국’을 배경으로 삼았다. 앞으로 굳이 조선이나 고려 같은 특정 역사와 문화의 공간이 불필요한 사극이라면 아예 이러한 가상공간을 배경으로 삼는 일이 빈번해질 것으로 보인다. K콘텐츠가 OTT 등을 타고 글로벌 시장에 진입하면서 사극도 점점 글로벌 장르로서의 판타지와 결합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일 또한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룹》 같은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 특유의 신분 구조, 특히 궁궐에서 벌어지는 왕과 중전, 대비, 후궁 같은 저마다의 위치가 만들어내는 갈등 구조가 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허구라고 밝혔지만 ‘조선’이라는 시공간을 쓰는 것이 훨씬 유리한 작품이다. 특히 현재의 상황을 패러디하고 풍자하기 위해 조선시대에도 실제로 있었던 ‘왕실 교육’을 비교점으로 넣는 건 그 구체적인 시공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 더 설득력과 공감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즉 수명 연장을 위해 맹물을 100번 끓인 물을 마시고, 두뇌가 활성화되는 새벽에 소금물에 150초 이상 얼굴을 담그고 버티는 등의 ‘왕실 훈육 비책’은 실제로도 존재했던 것들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때나 지금이나 자식 교육을 위해 할 짓 못할 짓 다 하는 그 치맛바람은 다를 바가 없다는 풍자가 더 선명하게 그려질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고증의 관점에서 보면 《슈룹》의 상상에도 개연성이 다소 떨어지는 지점이 있는 게 사실이다. 즉 강건하지 못하다 해도 세자가 분명 존재하고, 그 밑으로 적자로서 네 명의 동생까지 있는데 서자들이 왕위를 노린다는 게 사실상 가능할까 싶은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는 갈등 구조를 만들기 위해 대비가 전면에 나서 이런 상황을 조장하지만, 그럴수록 의아한 건 왕은 도대체 뭘 하는가 하는 점이다. 즉 《슈룹》은 중전과 대비의 대결 구도를 첨예하게 하고 적자와 서자들이 경쟁하게 하기 위해, 작가가 ‘왕을 침묵시키는’ 자의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어쨌든 이제 사극은 양갈래의 선택 앞에 놓이게 됐다. 꼭 실제 역사의 시공간이 필요하다면 그만큼 문화사의 고증에 철저해야 하고, 역사 바깥으로 나가겠다면 아예 가상으로 가야 한다. 그것이 불필요한 논란을 사전에 차단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선택한 노선의 강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역사적 시공간을 선택하면 그 현실감이 부여하는 무게감과 깊이만큼 책임감도 커지는 것이고, 가상을 선택하면 가볍게 느껴지는 약점만큼 더 무한하게 확장할 수 있는 상상의 넓이를 갖는 것이니 말이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