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얼음판 걷는 한국 경제, 삐긋했다간 나락으로
  • 박창민 기자 (pcm@sisajournal.com)
  • 승인 2022.11.07 11:05
  • 호수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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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스타트업은 물론 대기업도 허리띠 졸라매
전문가들 “한국 경제 상황, 이태원 참사와 비슷”

레고랜드 채무불이행(디폴트) 사태로 촉발된 금융권의 유동성 위기가 재계를 강타하고 있다. 전 세계적인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급격한 기준금리 인상과 고환율로 가뜩이나 경색된 자금시장에 찬물을 끼얹었기 때문이다. 일부 기업은 부도설까지 거론되고 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정부는 연말까지 시장 안정을 위해 유동성 공급 대책을 발표했으나, 국가 부도 위험률은 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위태로운 경제 상황을 ‘이태원 압사 참사’에 빗대어 표현했다. 김동원 전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는 “156명이 사망한 이태원 압사 참사는 길이 45m, 폭 3.5m에서 터진 일이다. 레고랜드 사태도 마찬가지다. 레고랜드의 지급보증을 섰던 강원도가 채무불이행 한 2050억원은 채권시장(월평균 거래액 400조원)에서 티끌도 안 되지만, 국내 경제를 흔들어놨다”고 진단했다.

우리나라 무역수지가 9월에도 37억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무역 적자가 6개월 연속 이어진 것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무려 25년 만이다. 사진은 10월3일 부산항 신선대부두와 감만부두ⓒ연합뉴스

고환율·고물가·고금리에 자금 경색까지

실제로 레고랜드 사태 후폭풍은 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하는 채권시장에서 ‘거래 절벽’을 초래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10월 장내외 채권 거래액은 335조원을 기록했다. 전달 기록한 431조원보다 100조원 가까이 줄어든 것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 455조원과 비교하면 채권 거래액은 더 떨어진다. 채권 거래 규모가 350조원 아래로 떨어진 것은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에 따른 글로벌 금융위기가 덮친 2009년 1월 이후 처음이다.

9월28일 김진태 강원지사가 레고랜드 사업의 자산유동화어음(ABCP) 지급보증을 철회한 것이 표면적인 이유로 꼽힌다. 국고채 수준의 대우를 받는 지자체의 지급보증 사업이 사실상 부도 위기에 처한 만큼 시장에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국고채는 수많은 채권(지방채, 금융채, 회사채 등) 중에서도 최고등급을 자랑하며,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상 떼일 위험이 없이 가장 안전한 채권이다. 그런 국고채가 레고랜드 사태로 휴지 조각이 된 거나 마찬가지다.

물론 김진태 지사는 레고랜드 사태가 일파만파 퍼지자 연말까지 지급보증을 이행하겠다고 밝혔지만, 그 후폭풍은 막지 못했다. 우선 공기업과 지자체의 ‘돈줄’이 말랐다. ‘이제 지자체도 못 믿는다’는 불신이 시장에 급속히 퍼지면서 가뜩이나 경기 침체로 압박받는 지방 공기업의 경영에 비상등이 켜졌다. 벌써 우량 공기업이 발행한 채권의 유찰 사례가 나오고 금리가 급등하는 등 돈맥경화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인천도시공사는 최근 500억원 규모로 3년물 공사채를 발행하려 했으나, 투자자를 찾지 못해 계획을 접었다. 인천도시공사 채권 신용등급은 ‘AAA’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AA+’로 우량 공사채에 속하지만, 목표액의 불과 20%인 100억여원의 자금만 들어왔다. 경기도 과천도시공사 또한 3기 신도시 사업 중 하나인 과천공공주택지구 조성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려고 최근 6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했으나, 이 중 400억원은 유찰됐다. 과천도시공사에서 발행한 회사채가 유찰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광역자치단체도 지급을 보증하지 못하겠다고 손을 터는데, 공기업의 채권에 선뜻 손을 내미는 투자자가 있겠냐는 분석이 나온다.

대기업도 회사채 미매각 사례 속출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기업들의 대표적인 자금 조달 창구인 회사채 시장까지 얼어붙으면서, 미매각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실제로 올해 들어 발행된 회사채 264건 중 40건은 모집 금액이 미달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초부터 10월27일까지 발행된 회사채 264건 가운데 15.15%인 40건은 경쟁률이 1대1에 못 미쳤다. 미달된 40건 가운데 14건은 10월에 발행된 회사채였다.

올해 회사채 중 신용등급이 가장 높은 JB금융지주(AA+)와 메리츠금융지주(AA)는 모집 금액이 미달됐다. 한화솔루션(AA-)은 10월21일 총 1500억원어치 회사채를 발행하기 위해 수요예측을 실시했으나, 연 6% 초반대 금리를 제시한 2년물에만 130억원의 매수 주문이 들어오고 500억원어치 3년물에는 단 한 건의 주문도 들어오지 않았다. 우량 채권으로 꼽히는 LG유플러스도 10월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처음으로 미매각됐다. 회사채 미매각으로 인한 평판 하락을 고려해 몇몇 대기업은 회사채 발행 계획을 철회했다.

한 달 사이 5대 시중은행에서 기업대출이 9조원가량 늘어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은행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에서 기업대출 잔액이 전월 대비 6조6803억원 증가한 640조2852억원을 기록했다. 한 달 만에 1.1% 늘어난 규모로, 지난해 말보다는 9.1%(53조1465억원) 증가했다. 증가 폭은 8월 5조4603억원, 9월 6조366억원 등으로 확대됐다.

특히 대기업 대출이 5조8592억원(대출잔액 9월말 100조4823억원→106조3415억원) 늘어났다. 전체 증가액(8조8522억원)의 66%에 달했다. 대기업의 대출 증가 규모는 2020년 3월(8조949억원) 이후 2년7개월 만에 가장 많았다. 올해 들어 5대 기업에서 불어난 기업대출은 67조8633억원이다. 그만큼 기업들의 자금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증거다. 은행의 기업대출은 중소기업 부문이 이끌고 있지만, 회사채 시장의 악화로 인한 유동성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대기업들이 은행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증권사들은 자금 경색에 따른 직격탄을 맞고 있다. 최근 증권가에 따르면 부실이 누적된 중소형 증권사들은 기업어음(CP)을 연 8~9% 금리에 발행해도 팔리지 않는 등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 상장지수펀드(ETF) 등 보유 자산을 팔며 현금 확보에 매달리고 있다.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놓인 중소형 증권사들은 사실상 구조조정에 내몰린 상황이다. 회사 규모와 상관없이 대다수 증권사가 비상경영에 돌입해 마른 수건까지 짜면서 비용을 줄이는 등 본격적인 긴축에 들어갔다. 실제로 케이프투자증권은 전날 법인부(법인 상대 영업부)와 리서치사업부를 폐지하기로 공식 결정했다. 해당 부서에 소속된 임직원은 약 30명으로, 일부는 부서 폐지에 따라 재계약 대상에서 제외됐다.

 

스타트업·증권사, 부도설·매각설 흉흉

중소형 증권사 중에서는 내년 1분기 말 도산이나 회생절차를 밟는 곳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현재 증권사들은 건설 경기가 악화되면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지급보증을 자체 자금으로 떠안고 있는 상황이다. 증권사들은 만기 PF 채권을 담보로 자산유동화증권을 발행해 왔는데 최근 ‘차환’이 어려워지자 직접 떠안는 사례가 많아졌다. 업계가 추산한 증권업 부동산 PF 채무보증 위험 노출액(익스포저)은 40조원에 이른다.

증권사들의 부도설과 매각설이 나돈 것도 이 때문이다. 이례적으로 금융감독원과 한국거래소가 합동 루머 단속반을 가동해 시장 불안 진화에 나서고 있지만, 당분간 흉흉한 소식은 끊이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증권사 PF 채권의 마땅한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증권사를 시작으로 건설, 캐피털, 제2저축은행 등이 연쇄적으로 부실 위기에 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각에서는 1998년 IMF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처럼 대형 위기로 확산하는 것 아니냐는 공포감마저 터져 나온다.

대기업뿐만 아니라 스타트업들도 자금 경색이 심화되면서 폐업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올해 초만 해도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며 제2의 벤처붐에 대한 기대를 높였던 업체들이 자금난으로 서비스를 중단하거나 매각에 나섰다. 패션 플랫폼 ‘힙합퍼’는 11월1일부터 서비스를 종료했다. 힙합퍼는 국내 스트리트 패션을 선도한 1세대 쇼핑몰로 한때는 업계 1위인 무신사와 선두 경쟁을 벌일 만큼 2030대에게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투자유치 실패와 수익성 악화로 올해 8월 매각에 실패하면서 결국 서비스를 접게 됐다. 이 외에 라이픽(뷰티숍·피트니스센터 예약 결제 플랫폼)과 유저해빗(빅데이터 기반 모바일 사용자 행동분석 플랫폼) 등 유명한 플랫폼 스타트업도 자금난에 폐업을 결정했다.

국내 경제의 최후 버팀목인 수출마저 꺾이면서 경기 침체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수출 증가율은 지난 6월 5.4%로 16개월 만에 한 자릿수로 떨어진 뒤 9월(2.8%)까지 부진한 흐름이 이어져 왔다. 정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주요국 통화긴축 등 글로벌 경기 둔화 영향으로 각국의 수입 수요가 주춤한 상황이 주요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역대 최고 실적(24.2%)을 나타낸 지난해 10월 수출의 기저효과도 영향을 미쳤다.

정부가 급격한 금리 상승 등으로 인한 자금시장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50조원 이상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사진은 10월24일 서울 시내 한 은행에서 촬영한 지폐ⓒ연합뉴스

전문가들 “내년 상반기까지는 버텨야”

향후 수출 부진은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짚은 원인들은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달러화를 중심으로 한 국내 자금 경색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급격한 달러 인상에 따라 상대적으로 한국 통화가치가 하락한 상황이며, 수출로 인한 외환 확보도 어려워져 금융과 외환시장 불안으로 확대될 수 있다. 아울러 미국이 올 연말까지 금리를 인상할 것으로 관측되면서, 경기 침체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내년 상반기까지 기업들이 유동성 위기를 버틸 수 있게 채권시장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정부는 기업들의 유동성 위기를 고려해 ‘50조원+α’ 유동성 공급 대책을 내놨다. 레고랜드 사태로 얼어붙은 채권시장을 달래지 못하면 국가 경제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정부 당국의 우려가 작용한 것이다.

한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지금 한국 경제는 살얼음판이다. 자칫하면 IMF나 금융위기 때처럼 기업들의 연쇄부도가 재연될 수 있다”며 “미국이 기준금리 인상에 대해 속도조절을 할 것으로 관측되는 내년 상반기까지 정부가 잘 관리해야 한다. 모든 기업을 살릴 수는 없으며, 한계기업 또는 현 상황에서 지원이 필요 없는 곳까지 정책자금이 흘러가지 않도록 ‘옥석 가리기’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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