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컬처 세계화? 200년 전 괴테의 삶에 해법 있다”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2.11.07 12:05
  • 호수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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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경기도 여주에 ‘괴테 마을’ 가꾸는 세계적 독문학자 전영애 교수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가 10월27일 경기도 여주 여백서원에서 시사저널과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저널 이종현

한국 문화예술계는 지금 황홀경에 빠져 있다. 최근 몇 년 새 영화와 드라마, 음악,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글로벌 스타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K컬처’와 같은 용어도 만들며 어깨를 으쓱거리는 모습이다. 더 나아가 정부는 부상하는 문화적 영향력과 관광을 연계해 국제무대에 대한민국을 꼭 가보고 싶은 나라로 각인시키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상위 0.001%’에만 머물렀던 시선을 조금만 아래로 내리면 여전히 너른 동토(凍土)가 보인다. 문화 저변이 취약한 가운데 쏟아붓는 정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일 뿐이다. 땅이 녹고 새싹이 돋는 봄, 진짜 문화 강국으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해답을 구하려 10월27일 경기도 여주의 여백(如白)서원을 방문했다. 화려한 촬영장이나 무대도, 대규모 예산을 들인 연구소도 아닌 이곳에 소망이 싹트고 있었다.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71)를 따라 서원과 이어진 소박한 숲길로 향했다. 세계적인 독문학자인 전 교수는 2005년부터 사비에 주변 도움을 보태 어렵사리 서원을 일궈왔다. 2016년 서울대에서 정년퇴임한 뒤론 ‘전업 서원지기’로 지내며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전집 번역, 후학(後學) 양성 등에 집중하고 있다. 작은 정자로 시작된 서원은 숱한 운영상의 어려움을 뚫고 건물과 대지를 합해 3200평에 달하는 꿈밭으로 성장했다.

❶ 여백서원 내 ‘라이너 쿤체 시인의 뜰’에서 바라본 본관 ‘여백재(如白齋)’ ❷ 여백서원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도서관 앞 ❸ ‘여백재’ 내부 모습 ❹ 여백서원을 찾은 외국 학자와 예술가들이 머물며 작업하는 게스트하우스 ‘우정(友亭)’ ❺ 20여 명의 관객을 위한 ‘파우스트 극장’ ❻ 1831년 《파우스트》 원고를 재현한 영인본 (전영애 교수 소장)ⓒ시사저널 이종현

홀로 괴테 마을 일구는 세계적 석학 

멀어진 서원 본관에서 맑은 풍경 소리가 들렸다. 낙엽이 날아와 앉은 곳은 시비(詩碑)였다. 한글과 독일어로 적힌 시는 독일을 대표하는 서정시인 라이너 쿤체(89)가 쓴 《옛 문체로 쓴 한국의 귀한 옛날 일》이다. 그가 고려 말기 이방원과 정몽주 사이에 오간 《하여가》와 《단심가》를 접하고 독일어로 쓴 시를 제자인 전 교수가 번역했다. 정몽주의 충절을 온전히 이해하고 시조 운율까지 완벽히 맞춰 지은 독일어 시에 입이 떡 벌어졌다. 

독일의 대시인이 어떻게 시조를 그대로 구현해낼 수 있었을까. 

“앞서 쿤체 시인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이이가 쓴 《고산구곡가》 첫 곡에 화답하는 《메아리 시조》를 내게 전하곤 ‘시조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시조 장르의 정착에 기여한 《하여가》와 《단심가》를 소개했더니 곧바로 《옛 문체로 쓴 한국의 귀한 옛날 일》을 지어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가 한국에 단 일주일간 머문 경험을 바탕으로 쓴 《서울의 거리 모습》 《뒤처진 새》 등에도 우리 사회에 대한 통찰이 짙게 배어 있다.” 

《옛 문체로 쓴 한국의 귀한 옛날 일》의 시비는 독일에도 놓인 것으로 안다. 

“2012년 4월 독일 파사우의 도나우 강가에 있는 쿤체 재단 부지에 ‘시정(詩亭)’이라는 작은 한옥 정자를 지어 선물했는데, 거기에도 이 시비를 세웠다. 두 시비에는 시와 함께 ‘육백년 전 정몽주의 꼿꼿한 바른 걸음을 기리며 나의 한국 친구들에게’라는 쿤체 시인의 헌사가 새겨져 있다. 몇 년 전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 부부가 쿤체 시인을 예방하며 한옥 정자와 시비를 구경하기도 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시인이 놓은 다리가 한국과 독일을 이어준 셈이다. 

“그렇다. 세계에 한국을 알리려 얼마나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들어가고 있나. 시인이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금세 해낸 일을 보면 격조 높은 문화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여백서원 인근에 괴테 마을이 조성되고 있다. 허가와 비용 문제 등으로 난관에 부딪히면서도 거북이처럼 조금씩 진척돼 왔다. 전영애 교수는 “당초 내년 5월 개관이 목표였는데, 이제는 첫 집인 ‘젊은 날의 괴테 하우스’라도 그때 선보일 수 있길 소망하고 있다”고 전했다.ⓒ시사저널 이종현
전영애 교수가 여백서원 전망대에서 괴테 마을 조성의 첫 프로젝트인 ‘젊은 날의 괴테 하우스’ 건물을 내려다보고 있다.ⓒ시사저널 오종탁
전영애 교수가 여백서원 전망대에서 괴테 마을 조성의 첫 프로젝트인 ‘젊은 날의 괴테 하우스’ 건물을 내려다보고 있다.ⓒ시사저널 오종탁

잠시 후 3층 건물 높이의 철골 구조물이 나타났다. 전망대였다. 전 교수는 꼭대기에 도착해 멀지 않은 거리에 세워진 한 2층 주택을 내려다봤다. 그는 “‘젊은 날의 괴테 하우스’(괴테가 생전에 기거한 독일 가옥을 본뜬 건물) 외형이 막 완성됐다”며 “1층은 도서실로, 2층은 전시실로 꾸밀 것”이라고 전했다. 이후 본관, 과학실, 책 오두막 등도 차례로 건축할 계획이다. 최종 목표는 괴테 마을을 조성하는 것이다. 여주를 괴테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독일 바이마르에 버금가는 명소로 만들겠다는 복안이다. 괴테 마을 조성과 서원 운영에 관(官)의 지원은 전무한 상황이다.  

전 교수는 1990년대 초 괴테 자서전 번역 업무를 맡은 뒤부터 괴테 연구에 큰 비중을 두고 빠져들었다. 지난 30여년은 괴테의 글과 가치관, 생애 전반을 이해하고 현시대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고자 분투해온 과정이었다. 전 교수는 2011년 괴테 연구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괴테 금메달을 수상해 세계적인 연구자 반열에 오르고도 부단한 ‘자기 형성’의 삶을 살고 있다. 

이번 괴테 하우스 고증과 구성에 있어서도 독일 현지 전문가들의 경탄을 자아낼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전 교수지만,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외형이 아니다. 그는 “‘사람이 뜻을 가지면 얼마나 클 수 있으며, 그 사람은 어떻게 자기를 키웠는지’가 괴테 하우스로 드러내야 할 두 가지 포인트”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괴테라는 사람에게 문인(文人)은 일면일 뿐이다. 그는 우선 소공국 바이마르의 문화·교육·산업·세무 등 4개 부처를 총괄하며 군주를 보필하는 정치인이었다. 또 식물학·동물학·광물학·기상학·광학·색채론에 천착했고, 이 중 동물학과 색채론 부문에선 괄목할 만한 업적을 냈다. 그림까지 많이 그리면서 문학책 143권, 편지 2만여 통을 남겼다. 괴테의 글 하나하나엔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성찰이 담겨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뜻을 가지면 괴테처럼 클 수 있어” 

현대의 한국인들이 200여 년 전 독일에서 살다 간 괴테의 업적과 삶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과거에 비해 물질적인 부분이 풍족해진 반면 정신문화는 성장하지 못했다. 한국처럼 너무 급속히 변하는 사회에선 인간 정신이 발맞춰 가기 더욱 어렵다. 대부분 쓸데없이 계산하고 남과 비교하느라 힘을 다 쏟지 않나. 뜻을 가지고 그저 할 일을 하면 괴테처럼 자기를 어마어마하게 키울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괴테는 어떻게 뜻을 가지고 자기를 키웠나. 

“괴테의 활력은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사유와 강한 체험 능력, 긍정적인 성품, 자신의 삶을 스스로 빚어가는 능동성, 남다른 위기 극복 능력 등에 힘입은 것으로 보인다. 끊임없는 노력, 특히 평생의 글쓰기가 병행됐음은 물론이다.” 

요즘 개개인이든 사회든 도처에서 위기 신호가 감지된다. 괴테의 위기 극복 능력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있다면. 

“괴테는 외국어를 이것저것 배우는 게 힘들던 6세 때 여러 외국어 소설을 지음으로써 그 문제를 한꺼번에 극복한다. 라이프치히대 재학 시절엔 당대의 얕은 유행·취향에 따라 자신의 글이 무참히 비판당하자 원고를 다 불태워버렸을 만큼 절망감을 느꼈다. 큰 병에 걸려 학업을 중단하지만, 그 비판의 잣대를 규명해 보기 위해 그때까지의 독일 문학을 섭력하고 문학사를 써낸다. 학업을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출간한 건 연애 문제에 대한 극복 방법이었다.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된 괴테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다가 비슷한 처지의 소설 주인공을 만들어 (작중에서) 죽이고 자신은 해당 문제를 4주 만에(소설 집필 기간) 털어낸다. 젊은 날의 괴테 하우스 2층 전시실 테마가 바로 ‘극복’이다. 젊은 사람들이 얼른 와서 보면 좋겠다.” 

불안한 한국 문화…“사람을 키워야” 

괴테는 창작의 모든 단계에서 당대의 조류를 뛰어넘었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고 전 교수는 설명했다. 그럼으로써 자신과 모국의 문학, 더 나아가 세계 문학·문화사에서 한 시기를 창조했다. 인생과 사상에 대한 성찰이 평생 그침 없었고, 그것이 모든 성취의 원동력이다. 이런 괴테의 정신은 헌신적인 부모와 당대 독일인들을 통해 형성되고, 후대 독일인들에 의해 계승 발전했다. 전 교수는 “독일을 숱하게 오가며 괴테, 프리드리히 실러 등 대문호들의 존재보다 그들을 있게 한 교양 시민층이 더 부럽다는 생각을 늘 했다”며 “잠재력이 뛰어난 사람을 괜히 밀어내거나 미워하지 말고 처음엔 낯설더라도 호기심과 애정 어린 눈으로 ‘어, 이거 뭐지?’ 하고 바라봐야 따라 클 수 있다”고 제언했다. 

이는 K컬처의 세계화를 꿈꾸는 우리 정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괴테가 태어났을 당시 독일어는 지방(地方)어라는 인식을 면치 못했고, 독일 문학도 지방 문학 취급을 받았다. 독일의 문화 저변에서 쑥쑥 성장한 괴테는 자국 문학을 단숨에 세계 문학으로 끌어올렸다. 괴테가 독일 문화에 기여한 바를 설명하는 전 교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부러움과 우리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함께 묻어났다. 

한국 문화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높아졌으나, 내실이나 지속 가능성 등을 두고는 의문부호가 달린다. 

“즉흥적인 발상보다 장기계획이 필요하다. 장기계획의 핵심은 다름 아닌 사람을 키우는 일이다. 괴테 자서전 《시와 진실》에는 ‘우리의 소망이란 우리들 속에 있는 능력의 예감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사람 하나 잘 키워놓으면 나라 전체의 문화 수준이 올라간다.” 

전영애 교수가 2011년 6월16일(현지시간) 독일 바이마르 국립극장에서 괴테 금메달을 수상하고 있다.ⓒ전영애 교수 제공
전영애 교수가 2011년 6월16일(현지시간) 독일 바이마르 국립극장에서 괴테 금메달을 수상하고 있다.ⓒ전영애 교수 제공

■ 전영애 교수는 누구 

독문학자이자 시인인 전영애 교수는 지난 5월 독일로 날아가 라이너 쿤체상을 수상했다. 격년으로 시상하는 라이너 쿤체상은 욀스니츠시에서 이 지역 출신이며 독일 전체가 사랑하는 예술가인 쿤체 시인의 업적을 기리고자 제정했다. 독일어로 시를 쓰는 뛰어난 시인에게 상을 주는데, 높은 문학적 수준은 물론 저항정신을 갖췄는지도 까다롭게 심사한다. 이에 대체로 해당 시점에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독일 시인이 수상의 영예를 안아 왔다. 비(非)독일인, 더구나 동양인에게는 베를린 장벽과도 같은 수상 문턱을 전 교수가 와르르 무너뜨렸다. 라이너 쿤체상의 8번째 수상자가 된 그를 위해 현지에서 성대하면서도 세심한 시상식이 열렸다. 전 교수 개인으로선 독문학자가 아닌 시인 타이틀로도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큰 기점이 됐다. 

하지만 전 교수는 라이너 쿤체상을 받는 자신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단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 중 머물렀던 가옥에서 11월10일(현지시간) 열릴 기념비적인 행사 역시 아무런 사진 기록 없이 지나갈 예정이다. 전 교수의 독일어 시 낭송회가 이날 열린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가 나를 촬영할 순 없다”고 농담했다. 시인으로서의 활동보다 번역과 후학 양성에 집중하는 데 대해서도 전 교수는 “내 시가 뭐 중요하겠나“라며 큰 미련을 두지 않는다. 좋은 번역서와 가치관을 주위에 전하겠다는 ‘올바른 목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다. 

전 교수가 2011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 학회로부터 괴테 금메달을 수상했을 땐 다행히 동생이 사진을 찍어뒀다. 그때 괴테 금메달 수상 연설에서 그는 담담히 “이 영예에 어울리는 자격을 갖추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배움과 인생의 깊이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연설이다. 전 교수의 삶은 이래저래 계산하며 밀리지 않으려 기를 쓰고, 남을 밀쳐내기도 해야 하는 ‘성공 방정식’과 거리가 멀었다.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69학번인 전 교수는 1973년 서울대를 전체 수석으로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진학했다. 여성이 학문을 하는 데 대한 편견이 있던 시절이다. 그는 유학과 박사 과정 진학에서 남학생들에게 밀렸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고 석사 졸업과 동시에 결혼해 남매를 낳으면서 공부의 길은 더욱 멀어져만 갔다. 마침내 독일 유학길이 열렸으나 태어난 지 두 달 된 아이가 눈에 밟혀 3학기 만에 돌아오기도 했다. 

전영애 교수가 인터뷰 중 선친 전우순 선생의 유품을 소개하고 있다. 1000여 장에 달하는 이 문서는 한자로 적힌 증조부의 문집을 국역한 것이다.ⓒ시사저널 이종현
전영애 교수가 인터뷰 중 아버지 고(故) 전우순 선생의 유품을 소개하고 있다. 1000여 장에 달하는 이 문서는 선친이 한자로 적힌 증조부의 문집을 국역한 것이다.ⓒ시사저널 이종현

낭패 속에서 집에 혼자 앉아 수많은 독일어 원서를 읽고 번역한 10년은 학문적 토양이 다져지는 시간이었다. 결국 1985년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 교수는 경원대(가천대의 전신)에서 11년간 교수로 있다가 1996년 서울대로 자리를 옮긴다. 이후 한국괴테학회장, 독일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원 수석연구원, 바이마르 고전주의 재단 연구원 등을 맡아 숱한 연구 업적을 이뤘다. 아울러 《괴테 시 전집》과 《파우스트》 《데미안》 《변신·시골의사》 등 여러 독일 문학 작품을 한국 독자들이 원문에 최대한 다가갈 수 있도록 번역했다. 서울대에서 그가 강의한 ‘독일명작의 이해’ 수업은 매해 명강의로 꼽혔다. 

전 교수는 괴테의 운문 《파우스트》를 읽기 버거워하는 서울대 학생들에게 “에베레스트에 올랐던 사람(《파우스트》를 독파한 사람)이 관악산을 못 가겠느냐”며 학업 동기를 부여하곤 했다. 알고 보니 이는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2005년 85세의 나이로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5895m) 정상에 올라 화제를 모은 고(故) 전우순 선생(2010년 작고)이다. 역대 킬리만자로 등정에 성공한 사람 중 두 번째 고령자였다. 전우순 선생은 킬리만자로를 정복한 뒤에도 작고하기 한 해 전까지 매년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전 교수는 “아버지는 사람이 뜻을 가지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나도 괴테 금메달 수상 때 했던 말을 지키려 애는 쓰는데, 힘도 시간도 돈도 없어 품은 뜻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일단 빚이 점점 늘어나는 중이다”라며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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