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확 바뀐 박정희재단 “좌우, 남녀노소 다 와달라”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2.11.18 12:05
  • 호수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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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함’ 돋보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5주년 기념식
4월 유영구 이사장 취임 후 변화 바람…대중에 미칠 영향 주목

“정치와 무관하게 살아온 저하고 얘기해 봐야 별 뾰족한 수가 없을 거예요.” 

11월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5주년 기념식 도중 장내에 슬쩍 미소가 번졌다. 사회자인 김동건 아나운서가 던진 이 멘트 때문이다. 앞서 ‘박정희 전 대통령 역할 전문 배우’로 꼽히는 독고영재씨가 인사말과 근황을 전하며 “(보수 성향 연예인으로서) 문재인 정부 시절 활동이 뜸했는데, 해당 문제는 나중에 사회자와 상의할 예정”이라고 농담하자 나온 반응이다. 

이어 김 아나운서는 독고씨에게 “노래 공부를 해서 노래를 잘하게 된다면 제가 진행하는 《가요무대》에 열심히 쓰겠다”고 말했다. 청중이 와르르 웃음보를 터뜨렸다. 

기념식은 시종일관 편안하고 위트 넘치는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주최 측인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 음악 봉사단체 마노아마노와 협업해 형식적이고 딱딱한 순서를 대폭 줄이고 대부분 시간을 문화공연으로 채웠다. 

11월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5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고 있다.ⓒ시사저널 이종현
마노아마노 대표이자 소프라노인 김은경씨와 테너 신동원씨가 축하 공연을 펼치고 있다.ⓒ시사저널 오종탁
ⓒ시사저널 이종현
유영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오른쪽)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 EG 회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시사저널 이종현

정치색 배제하고 문화공연 통해 호응 끌어내

유영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환영사와 윤석열 대통령 축사 낭독(강승규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대독), 기념영상 상영 등 순서가 짧게 이어진 뒤 곧바로 공연이 시작됐다. 

먼저 마노아마노 대표이자 소프라노인 김은경씨와 테너 신동원씨가 성악 공연을 펼쳤다. 대중에게 익숙한 오페라 아리아에 더해 《님이 고이 잠든 곳에》 《황성옛터》 《짝사랑》 등 박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 곡들이 공연됐다. 앙코르 요청에 두 성악가가 선보인 곡은 박 전 대통령을 향한 《해피 버스데이 투유(Happy birthday to you)》다. 

성악 공연이 끝나고 무대에 오른 배우 손숙씨는 《건설하는 아침》 《당신이 그리우면》 등 박 전 대통령이 지은 시를 모두 외워 낭송했다. 피날레는 쎄시봉 멤버들이 장식했다. 가수 조영남씨, 윤형주씨, 김세환씨가 히트곡들을 연달아 불렀다. 객석에서 내내 환호가 울려 퍼졌다. 

기념식 참석자는 중년층 이상이 많았으나, 20·30대도 심심찮게 보였다. 강경 보수층이나 그 반대 단체의 원색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일방적인 찬양·숭상과도 거리가 멀었다. 이는 유영구 이사장이 지난 4월 취임하면서 꺼내든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의 기치와 맞닿아 있다. 바로 좌우, 남녀노소 모두를 아우르는 재단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유 이사장은 “문화예술인들의 재능기부, 개인과 기업의 십시일반 후원 등을 통해 소박하지만 아름답고 품격 있는 기념식을 치렀다”면서 “이런 분위기를 계속 이어가야 ‘박 전 대통령과 그의 업적을 많은 사람에게 알린다’는 재단 설립 취지를 제대로 살릴 수 있다”고 밝혔다.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 붙은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5주년 기념식 관련 현수막ⓒ시사저널 이종현
박정희대통령기념관 건물ⓒ시사저널 이종현

“문턱 없이 누구나 드나들 수 있어야”

그동안 탄생 기념식을 비롯한 박 전 대통령 관련 행사는 과도한 우상화로 덧칠돼 극렬 지지자가 아닌 국민의 접근을 제한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박 전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에서는 구미시청이 행사 예산을 부담하는 문제를 두고 여론이 들끓었다. 2017년 박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 때 구미의 일부 시민단체는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과도한 기념사업은 국민 갈등만 일으킬 수 있으므로 즉시 중지하라” “박 전 대통령을 우상화하는 일회성 사업보다 다른 시급한 일에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는 등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박 전 대통령의 장녀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란만장한 정치 역정을 거치는 가운데 행사가 정략적으로 이용된 경우도 여러 번이다. 

이번 105주년 기념식이 변화의 기점이 될 것으로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기대한다. 유 이사장은 “박 전 대통령이 종합적인 판단으로 경제 발전의 기틀을 다진 사실은 보수든 진보든 중도든, 어느 정당이든 인정할 수 있다. 이런 자산을 바탕으로 박 전 대통령 기념사업이 과거에 묶이지 말고 미래를 지향해야 한다”면서 “박 전 대통령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그리움에 눈물을 쏟는 데서 한발 나아가 문턱 없이 누구나 편하게 드나들며 배우고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돌아가신 박 전 대통령과 유족도 재단이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젊은 층에 ‘박정희 알리기’ 주력 

이날 박 전 대통령 유족 중에선 아들 박지만 EG 회장이 유일하게 참석했다. 유 이사장 옆에 앉은 박 회장은 밝은 표정으로 공연을 관람했다. 박 전 대통령의 시에 작곡가 임긍수씨가 곡조를 붙인 《님이 고이 잠든 곳에》를 두곤 “오늘 처음 들었다”며 관심을 표했다. 기자가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의 외연 확장 시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묻자 그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특히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한 활동이 중요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박 회장은 “아버지와 함께 일한 분들은 이제 거의 다 돌아가셨다”면서 “이제 젊은 층이 아버지를 알고 그 뜻을 배우면 좋겠다는 게 아들로서의 바람”이라고 밝혔다. 잠시 머뭇하던 그는 조심스레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애국심이 투철한 분이셨다. 그것만이라도 알아준다면 좋겠다”고 전했다.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의 주안점 역시 젊은 세대에 맞춰져 있다. 청년세미나, 박정희아카데미 등 오프라인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동시에 유튜브를 통한 온라인 소통에도 노력을 쏟고 있다. 유 이사장은 “역량을 모아 어떻게든 젊은 층과 박정희 정신이 단절되는 것을 막고 연결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유영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이 버스정류장 표지판에 ‘박정희대통령기념관’ 문구가 새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있다. 앞서 기념관 위치를 알리는 표시가 전무해 사람들이 찾아가기 어려웠다.ⓒ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제공

■ “후원 회원 100만 명 만드는 게 목표” 

유영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미니인터뷰 

전신인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를 포함하면 23년여 동안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을 이끈 역대 리더는 관료 또는 학자 출신이었다. 취임 7개월째를 맞은 유영구 이사장은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재단이 때에 따라 필요한 리더를 세워 왔다”며 “현시점에 내게 이사장직을 맡긴 건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의 업적을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는 강렬한 목적 때문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학교법인 명지학원 설립자이자 명지대 2대 총장을 지낸 고(故) 유상근 선생이 유 이사장의 아버지다. 유상근 선생은 박 전 대통령 재임 당시 국토통일원(통일부의 전신) 차관·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유 이사장은 아버지가 작고한 1992년 명지학원 이사장직을 맡아 2008년까지 수행했다. 한국기원 상임이사, 대한체육회 부회장,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등 대외 활동도 활발히 했다. 좌우, 여야, 나이, 신분 가릴 것 없이 폭넓은 인간관계를 쌓아 국내 대표 ‘마당발’로 통했다. 

2009년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로 추대돼 2년여간 활발히 활동하던 유 이사장에게 갑자기 악재가 밀려왔다. 명지학원 이사장 재직 시절 명지학원 수익사업체인 명지건설의 부도를 막기 위해 교비를 지원한 게 문제가 됐다. 유 이사장은 2011년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돼 7년여간 수감 생활을 했다. 교비를 착복하지도, 다른 이와 사전에 공모하지도 않았으나 법원의 판단을 되돌릴 순 없었다. 그는 “지금 시간을 되감아 그때로 돌아간대도 같은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벌금이나 추징금을 한 푼도 선고받지 않고, 유 이사장의 결정으로 파산을 면한 영세 건설업자들이 재판부에 탄원서까지 제출한 점 등이 그나마 위안거리가 됐다. 

수감 중 대통령이 두 차례 바뀌었다. 대한민국 사회도 몰라보게 변했다. 오랜 공백기를 깬 유 이사장은 ‘인생의 마지막 봉사 기회’라고 생각하며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을 맡았다. 그는 “‘박정희 올바로 알리기’만큼 인생에서 보람된 일이 없을 듯해 고민 끝에 이사장직을 수락했다”면서 “모든 힘을 다해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다”고 전했다. 

그는 4월1일 취임 후 안내 표지판 만들기 등 기본적인 부분부터 바꿔가기 시작했다. 앞서 일반 사람들이 외진 곳에 있는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도로, 버스정류장, 지하철역 등 어디에도 기념관 위치를 알리는 표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 이사장은 직접 발로 뛰며 배너를 설치하고 정류장 표지판에 관련 문구를 넣도록 했다.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을 상세히 소개하고 후원 방법을 안내하는 팸플릿도 만들었다. 그는 “몇몇 독지가가 내는 거액의 후원금도 소중하지만, 매월 정기적으로 일정 금액을 후원하는 회원들을 모집하는 게 급선무다. 후원 회원이 많아야 재단에 힘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2012년 2월 개관한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의 누적 방문객은 17만 명가량이다. 1년4개월여의 리모델링 기간을 제외하면 연간 2만 명도 채 찾지 않은 셈이다. 얼마 전 국민에게 개방된 청와대엔 하루 평균(주말 기준) 2만 명이 다녀가고 있다. 

전시실, 도서관, 어린이도서관 등으로 구성된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은 입장료가 없다. 제반 시설과 유튜브 ‘박정희TV’ 등을 운영하기 위한 자금은 오로지 기부금으로 충당된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아도 예산의 벽에 부닥치기 일쑤다. 

유 이사장은 “일단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한 명이라도 더 찾도록 해야 하기에 입장 유료화는 언감생심”이라며 “‘후원 회원 100만명 모집’ 캠페인을 진행하는 한편 노무현재단, 김대중도서관, 김영삼민주센터 등과 중지를 모아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정부 예산을 요청하는 방안도 고민하려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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