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남북화합 상징적 공간’ 만들겠다던 철원군, 사업 돌연 중단
  • 변문우 기자·정용석 인턴기자 (bmw@sisajournal.com)
  • 승인 2022.12.09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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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발부터 삐걱댄 ‘평화기념관’ 사업…전문가 “엉터리 사업보고서”
철원군 “타당성 평가 문턱 못 넘어”…문체부 “대부분 재심사 요청”
화살머리고지 평화기념관 조감도 ⓒ강원도 제공
화살머리고지 평화기념관 조감도 ⓒ강원도 제공

강원도 주요 현안 사업이었던 ‘철원군 화살머리고지 평화기념관 건립 사업’이 첫 삽을 뜨기도 전에 중단된 것으로 확인됐다. 철원군은 사업 중단의 주된 이유로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의 공립박물관 설립타당성 사전평가 문턱을 넘지 못했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철원군은 정작 사전평가에 대한 재심사 요청이 가능한 데도 이를 요청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올해 한 자릿수 재정자립도를 기록하고 있는 철원군이 수백 억원 규모의 사업을 무리하게 성급히 추진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9일 철원군에 따르면, 군은 설립요건 미달·사업성 등을 이유로 지난 6월 말 평화기념관 건립 사업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당초 사업 내용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기념관을 2025년까지 완공하는 것이었다. 총사업비 283억원 가운데 국비는 191억원이 투입될 계획이었다.

해당 사업은 기획 과정부터 이현종 철원군수와 지역구 국회의원들까지 힘을 모은 주요 현안이었다. 이 군수는 지난 2021년 8월 기획재정부 관계자를 직접 만나는 등 국비 확보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2022년 신년사에서도 “특색 있는 관광자원을 개발하겠다”며 이 사업을 예시로 들었다. 10대 강원도의회는 지난해 평화지역개발촉진지원 특별위원회 회의를 두 차례 열고 이 사업을 꼼꼼히 챙기기도 했다. DMZ 관광벨트 등을 중심으로 연 5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포부도 뒷받침됐다. 또 철원군은 “남북간 상호신뢰와 민족공동체 회복을 위한 사업”이라며 목적성을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추진 1년도 채 되지 않아 사업은 중단됐다.

화살머리고지 유해발굴 지역 ⓒ국방부
화살머리고지 유해발굴 지역 ⓒ국방부

“부실한 계획안, 사업 의지 의구심”

사업은 첫발부터 삐걱거렸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사업 초기 작성된 연구용역 보고서부터 엉터리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 사업 자문위원을 맡았던 이동기 강원대 평화학과 교수는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지난해 엉터리 용역보고서가 와서 비판했던 기억이 있다”며 “평화기념관과는 거리가 먼 전쟁기념관 사례들을 모아 ‘사업성을 갖췄다’는 평가의 보고서를 보았을 때 역사나 박물관 관련 전공자가 참여했는지조차 의문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철원군은 지난 2021년 6월까지 6개월간 진행된 연구용역의 대가로 한국자치경제연구원에 2억원의 비용을 지급했다.

이 교수의 개선 의견을 받은 철원군은 묵묵부답이었다. 사업이 좌초된 지 반 년가량 지났지만 이 교수는 어떠한 피드백도 받지 못했다. 또 다른 자문위원이었던 정병욱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는 “자문위원으로 선정됐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철원군에서) 한 통의 전화도 온 적이 없다”고 했다.

사업 의지에도 물음표가 찍힌다. 철원군은 지난 5월10일 해당 사업이 문체부의 국공립박물관 설립타당성 사전평가에서 퇴짜를 맞았지만 이후 재심사 요청도 하지 않았다. 국공립박물관 설립을 위해서는 ‘박물관 및 미술관진흥법’에 따라 문체부가 주관하는 설립타당성 사전평가에서 미리 설립·운영 계획 등을 평가받아야 한다. 재심사 요청은 연속으로 3회까지 가능하다.

사업비 70% 가량을 국비와 지방비로 충당할 수 있었던 사업이었지만 재도전 없이 쉽게 포기한 것이다. 심사에 떨어진 지자체들은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재심사를 요청하는 게 통상적이다. 문체부에 따르면 진주실크박물관, 용산역사박물관, 평택박물관 등이 한 번의 재심사를 거쳐 추진된 사업이다. 재심사를 두 번 받아 사업이 진행된 사례로는 담양역사박물관, 거제시립박물관 등이 있다. 문체부 관계자는 “지자체 입장에서 설립타당성 사전평가를 어렵게 생각하고 부담을 가질 수 있다”면서도 “부적정 판정을 받은 기관·지차체는 재심사 요청을 통해 사업을 적극 추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관계부처도 갑작스런 사업 중단을 예상하지 못했다. 해당 사업을 지원하는 통일부는 난처한 입장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철원군에서 적극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요청해서 올해 12억원의 예산을 반영했던 건데 갑자기 사업 중단 통보를 받았다”며 “철원군의 사업 추진 의지가 없어 해당 예산은 불용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강원도 관계자는 “국비와 지방비를 크게 지원하는데도 철원군이 포기한 것”이라면서 “문체부의 요구 조건도 못 채울 건 아니다. 할 수 있었지만 중요한 건 철원군의 사업 의지”라고 했다.

지난 7월1일 강원 철원군청에서 열린 제39대 철원군수 취임식에서 이현종 군수가 선서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7월1일 강원 철원군청에서 열린 제39대 철원군수 취임식에서 이현종 군수가 선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적자 운영 예상돼 포기” “尹 대북 기조 영향도”

철원군은 깐깐한 정부 조건을 사업 중단의 이유로 들었다. 문체부의 평가를 통과하려면 계획보다 과한 예산을 책정할 수밖에 없다는 게 철원군의 설명이다. 철원군 관계자는 “문체부의 요구 조건을 다 맞춰서 사업을 진행하려면 인건비, 관리운영비 등이 크게 늘어난다”면서 “건립 후 적자 운영될 사업이 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라고 답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 달라진 ‘대북 기조’가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도 있다. 해당 사업은 통일부의 ‘DMZ 평화적 이용 사업’에 속한 사업으로 DMZ를 세계적인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해 추진됐다. 다만 ‘DMZ 평화적 이용 사업’은 전년 대비 55%가 감액된 120억2700만원의 예산이 올해 편성됐다.

더군다나 문재인 정부의 9·19 군사합의 이행 사항으로 추진한 남북공동 화살머리고지 유해발굴의 평화적 의미를 계승하는 사업이기에 더욱 추진동력을 잃었다는 설명도 나온다. 더불어민주당 강원도당 관계자는 “윤석열 정부의 대북관에 비춰 봤을 때 평화기념관은 시의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며 “예산을 조정할 때 전 정부 사업이거나 관심이 떨어지는 사업은 후순위로 미루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한편 ‘화살머리고지’는 백마고지와 함께 6·25 전쟁 기간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중부 전선의 요충지로 당시 두 차례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진 곳이다. 국군과 중공군을 포함한 참전 유엔군의 유해가 다수 있을 것으로 추정돼 최초 남·북 공동 유해발굴을 추진한 역사적 상징성이 높은 곳으로 손꼽힌다.

유해 발굴 작업은 지난 2018년 9·19 군사합의를 계기로 이듬해 시작됐다. 다만 남북관계 소강 여파로 북측이 호응하지 않으면서 남측 단독으로 발굴이 진행됐다. 이후 2021년 6월 유해 발굴 사업이 종료됐고 발굴된 유해는 총 424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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