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의, 전도연에 의한, 전도연을 위한 《길복순》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2.27 13:05
  • 호수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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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자체가 전도연이라는 사람의 요체
과장된 세계관 안에서 뛰노는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 충만

전설적 킬러에게 사춘기 딸이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과 가정 사이의 머나먼 간극에 선 킬러에게 주어진 비극은, 일에는 계약 기간이 있어도 엄마 역할에는 기한 종료가 없다는 사실이다. 전도연 주연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길복순》이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스페셜 부문(Berlinale Special)에서 첫선을 보였다. 청부살인 회사와 재계약을 앞둔 길복순(전도연)이 모두의 표적이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렸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 《킹 메이커》(2022)를 통해 감각적인 연출력을 선보인 변성현 감독의 신작이다. 베를린에서의 반응과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을 우선 추렸다. 국내에서는 3월31일 공개되기에 조금은 이른 시점이지만, 《길복순》의 첫인상을 가늠하는 데는 요긴한 단서가 될 것이다.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킬러와 엄마라는 역할 사이

《길복순》은 첫 장면부터 ‘죽이는’ 인물의 정체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일본 야쿠자 두목 오다 신이치로를 상대하는 길복순에게는 여유와 재치마저 엿보인다. 허세 어린 말을 늘어놓느라 바쁜 사람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버리는 길복순의 동작에는 낭비라곤 없다. 앞으로 벌어질 모든 경우의 수까지 머릿속으로 미리 시뮬레이션을 한 뒤 몸을 움직이는 길복순의 방식은, 그가 얼마나 정교하게 일하는 ‘프로’인지를 보여준다. “마트 문 닫을 시간이라.” 방금 사람을 죽인 자의 대사치고는 산뜻하기까지 하다.

제목부터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길복순(Kil Boksoon)》은 작품의 세계관이나 스타일에서 모든 것을 오직 독창성으로 승부하고자 하는 과욕을 부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든 레퍼런스를 성실하게 흡수한 뒤 특색 있는 재해석의 결과물을 내놓은 것에 가깝다. 청부살인 업체가 일반적 사업체로 운영되는 세계관, 일과 가정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는 킬러의 고뇌 등에서는 《존 윅》 시리즈와 영국 드라마 《킬링 이브》 등의 줄기를 이식한 것이 어렵지 않게 감지된다.

청부살인 업계의 파워 브랜드인 MK에서도 길복순은 A급 임무만 맡는 에이스다. 회사의 대표 차민규(설경구)가 일찍이 자질을 알아보고 키워낸 선수 중 선수다. 이 회사는 몇 년 전 무직자 및 아마추어 킬러들의 작업과 분명히 구분 짓기 위해 세 가지 규칙을 만들어 업계에 제시했다. 첫째, 미성년자는 죽이지 말 것. 둘째, 회사가 허가한 작품만 할 것. 셋째, 회사가 허가한 작품은 반드시 트라이할 것.

일에서는 더없는 프로지만, 엄마 길복순은 딴판이다. 한창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는 딸 재영(김시아)과 불통 상태인 지는 오래다. “이벤트 업체 다닌다”는 거짓말로 정체를 숨기는 엄마와, 지키고 싶은 비밀 때문에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차마 고백할 수 없는 딸 사이에는 좁히지 못할 거리만 커져 간다. 재계약을 앞두고 고심이 짙어지던 길복순은 부여받은 미션 하나를 실패한다. 나름의 윤리적 판단에 따른 자발적 실패다. 이 일로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MK의 이사 차민희(이솜), 회사의 만년 2인자이자 복순과 내연관계인 한희성(구교환), 대표 차민규는 물론이고 업계의 킬러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복순을 표적으로 삼는 상황이 펼쳐진다.

베를린 현지시간으로 2월18일 첫 공개된 이후 쏟아진 반응은 대부분 호의적이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훌륭한 한국 영화이자 《밀양》과는 또 다른 어머니를 완벽하게 연기한 전도연”(카를로 샤트리안 집행위원장), “강력한 펀치를 날리는 방법을 확실히 알고 있는 작품”(스크린 데일리), “전도연은 어떤 경우에도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할리우드 리포터)와 같은 평이 나오는 식이다. 영화적 스타일에 주목하는 반응도 있지만, 무엇보다 타이틀롤을 맡은 전도연에 대한 언급이 우세하다. 그도 그럴 것이, 《길복순》의 시작과 끝에는 전도연이 있다.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배우 전도연을 장르 영화로 만든다면

전도연은 단순히 《길복순》의 주연배우가 아니다. 그보다는 작품 자체가 전도연이라는 사람의 요체라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이 영화의 주요 설정과 극본은 변성현 감독이 전도연과 작품을 찍기로 한 이후, 두 사람의 대화와 감독의 관찰을 거쳐 탄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도연은 실제로 극 중 재영과 비슷한 또래의 딸을 둔 엄마이기도 하다. 길복순의 직업인 킬러를 배우로 치환해 바라볼 때 《길복순》은 비로소 제대로 흥미로워지는 지점이 있다. 업계에서 커리어로 자신만의 역사를 충실하게 쌓아온 배우 전도연이 킬러 길복순을 부르는 말마따나 ‘살아있는 전설’이기에 가능한 영화이기도 하다.

청부살인에는 굳이 ‘작품’이라는 표현이 붙고, 킬러들은 회사와 계약 관계를 맺은 존재로 등장한다. 끊임없이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 사이에서도 품위를 지키고 실력을 유지하는 프로의 태도를 갖춰야 하는 길복순의 고뇌는 실제 전도연의 그것과 공명할 것이다. 킬러라는 직업은 애초에 타인을 죽이는 자가 사람을 기르고 보살펴야 하는 엄마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아이러니로부터 탄생한 설정이겠지만, 어떻게 보면 기가 막히게 훌륭한 배우의 작업을 목격했을 때 시쳇말로 ‘죽이는 연기’라고 표현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길복순이 깔끔한 솜씨로 사람을 죽이듯, 전도연은 지금껏 관객을 연기로 죽여왔다. 한 배우의 커리어와 인생이 영화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겐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헌정의 태도. 장르적 외피와 스타일을 모두 걷어낸 《길복순》의 알맹이다.

그래픽 노블을 보는 듯한 이 영화의 연출 스타일에 리얼리티를 기대하긴 어렵다. 오히려 한껏 과장된 세계관 안에서 뛰노는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가 충만한 작품이다. 다만 길복순이 미션을 실패한 순간부터 이후의 서사 흐름, 특히 각 캐릭터가 퇴장하는 방식은 점점 고조되는 액션의 스타일과는 반대로 밀도가 떨어지는 느낌이라 일말의 아쉬움이 남는다. 전도연을 위시한 모든 배우가 매력적으로 캐릭터를 소화하는 가운데, 탁월한 실력으로 MK의 인턴 킬러가 된 영지를 연기한 배우 이연은 이 작품의 히든카드라 할 만하다.

베를린을 수놓는 ‘K콘텐츠’, 그리고 한국 영화인

《길복순》 외에도 이번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는 한국 제작 작품 그리고 배우들의 행보를 여럿 발견할 수 있다. ‘베를린의 단골손님’ 홍상수 감독은 스물아홉 번째 장편 《물 안에서》를 공개했다. 새로운 영화적 비전을 담은 작품을 소개하는 인카운터스 섹션 초청작이다. 배우를 꿈꾸던 남자가 영화 연출을 선언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유태오가 출연하는 《패스트 라이브즈》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A24와 한국의 CJ ENM이 공동으로 투자·배급한 작품.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남녀가 20여 년 뒤 뉴욕에서 재회하는 이야기다. 한국계 캐나다인 감독 셀린 송이 연출했다.

포럼 부문 초청작인 유형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우리와 상관없이》도 눈길을 끈다. 뇌경색을 앓은 한 중년 여배우의 첫 주연작 공개 날, 그와 작업했던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각기 다른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내용이다. 파노라마 섹션 상영작인 한슈아이 감독의 《그린 나이트》는 중국 스타 판빙빙과 한국 배우 이주영이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외로운 두 여자가 한국 지하세계 세력에 맞서는 이야기다. 이주영은 지난해 《브로커》로 칸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이후 이번 베를린까지, 세계 3대 영화제 중 이미 두 곳을 밟은 배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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