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기의 과유불급] ‘대통령의 무덤’ 한일 문제 앞에 선 윤 대통령
  • 전영기 편집인 (chunyg@sisajournal.com)
  • 승인 2023.03.10 12:05
  • 호수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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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다른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낸다. 좋은 일을 하기도 하고 나쁜 일을 하기도 한다. 한일 협정이나 한일 합의는 많은 사람이 나쁘다고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좋은 것으로 귀결되곤 했다. 김대중(DJ) 대통령 때 청와대 의전비서관과 외교안보수석을 지냈던 김하중 전 통일부 장관의 《증언》(2015년 출간)엔 국민 감정을 거슬렀지만 국가 이익을 위해 일왕을 “천황(天皇)”으로 호칭한 DJ 얘기가 나온다. 반일이나 친일 외에도 용일(用日)·극일(克日)의 방법론이 있으며 일본과 문화 공유, 시장 개방, 안보 협조, 미래 가치 등 다양한 차원의 관계 확대 및 심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김하중의 《증언》에서 신선한 영감을 얻기 바란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11월13일(현지 시각) 캄보디아 프놈펜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는 모습 ⓒ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11월13일(현지 시각) 캄보디아 프놈펜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는 모습 ⓒ 연합뉴스

“천황”이라고 부른 김대중, ‘오부치 사죄’ 이끌어내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방문 전 한일 관계는 전임 김영삼 대통령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는 발언으로 악화일로, 어업협정까지 파기된 상태였다. 방일 직전 DJ는 일왕을 천황이라 호칭해 국내 언론의 질타를 받고 있던 박정수 외교부 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영국이 자기들의 왕을 여왕이라고 부르면 우리도 여왕이라고 부르고, 미국이 대통령이라고 부르면 우리도 대통령이라고 불러주는 겁니다. 당황하지 말고 당당하게 설명하고 계속 천황이라고 부르세요.”

DJ는 정부 관계부처는 물론이고 국민 다수가 반대했던 일본 문화 개방에 대해서도 “한민족은 독창성을 가진 민족이기에 중국 문화권에서도 동화되지 않았다. 일본에 문화를 개방한다 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밀어붙였다. 이런 조치는 대통령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들이다.

그 결과 유명한 1998년 10월의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 나왔다. 선언에는 “오부치 총리대신은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이에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DJ가 받아낸 ‘오부치 사죄’는 현 기시다 총리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3월6일 한일 관계 정상화 조치에 대해 일본 정부는 “오부치 선언의 인식을 계승하겠다”고 밝혔다. 현직 총리의 입에서 새로운 사과가 나오지 않은 것은 유감이지만 외교적으로 오부치를 계승한다는 일본의 입장 발표를 굳이 폄하할 이유도 없다. 외교 협상이라는 게 상대가 있는 것이니까. 당장 국민 감정은 윤석열 대통령이 대일 굴욕에 외교 완패를 했다는 쪽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사정이 바뀔 수 있다고 본다. 안 그렇다 해도 윤 대통령이 전후 최악의 상황인 한일 관계의 전진을 위해 디딤돌을 놓았다고 평가하고 싶다.

 

박근혜, 괜찮은 합의안 만들어 놓고 국민 감정 덫에 걸려

한일 관계는 경우에 따라 대통령의 무덤이라 할 만큼 위험한 사안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전수조사를 토대로 2015년 12월 상당히 괜찮은 수준의 ‘한일 정부 간 합의’를 끌어냈다. 그러나 당시 문재인 제1야당 대표가 “무효화”를 주장했고, 국민 감정이 불붙어 지지도가 추락했다. 결국 2016년 4월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자 박 대통령은 무너졌다. 윤석열 대통령도 강제징용에 대해 양국 정부 합의도 아닌 우리 정부의 일방적 조치를 발표했으니 벼랑 끝에서 몸을 던진 것이나 다름없다.

재임 시 문재인 대통령은 ‘박근혜 위안부 합의’를 실질적으로 무효화시켜 놓고 임기 말엔 “양국 정부 간 공식 합의였다”(2021년 1월18일)고 딴 사람처럼 말했다. 대통령직을 뜰 때가 되니 파국적 한일 관계의 책임을 피하고 싶었던 것인지 그 속을 알 수가 없다. 자기가 한 일을 부정하고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행동하는 대통령보다 욕을 먹고 무덤에 가더라도 할 일은 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자세를 사고 싶다. 

전영기 편집인
전영기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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