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원, 트로트를 가장 트로트답게 만드는 가수
  • 김영대 음악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3.20 13:05
  • 호수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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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 앨범 ‘ONE’, 새로운 트로트 시대의 모범답안…게으르지 않은 ‘순도 높은 음악성’도 주목

수많은 대중음악 장르 중에서 트로트는 사실상 유일하게 대중만을 위해 복무하는 음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 안에도 다른 음악 장르들처럼 음악적인 기교나 아티스트적인 자의식, 심지어는 시대에 대한 고민이 없을 리 없지만 그럼에도 그런 것들이 트로트의 본질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트로트의 가장 중요한 매력은 대중과 호흡하고 그들의 애환을 달래주고 그들의 입에서 즐겨 불려질 때만이 그 소명을 다하는 장르라는 점이다.

그래서 트로트는 자의식 과잉이나 지나친 실험을 허용하지 않으며, 그 어느 장르보다도 목소리의 호소력을 통해서만 대중을 설득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가수의 남다른 능력과 개성을 요구받는 장르이기도 하다. 자, 여기 명실상부 한국 트로트의 현재이나 미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찬원의 첫 솔로 앨범 ‘ONE’이 있다. 그리고 이 음반은 트로트라는 음악이 가진 공감과 위로, 소통과 유흥의 미학을 이찬원이라는 목소리가 얼마나 정확히 꿰뚫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연합뉴스
제23회 인제빙어축제 개막 이틀째인 1월21일 강원도 인제군 남면 빙어호에서 가수 이찬원이 축제 대표 캐릭터들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공연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트로트의 본질에 충실한 첫 솔로 앨범

앨범 타이틀 ‘ONE’을 통해 이찬원이 드러내고자 하는 가장 명백한 의도는 역시 ‘처음’이라는 키워드일 것이다. 아티스트에게 첫 정규작이란 경연대회 발표곡이나 디지털 싱글 같은 시도와는 차원이 다른 무게감을 갖는다. 흔히 스튜디오 앨범이라고도 불리는 정규작은 그 사람의 음악적 정체성을 오롯이 표현해 내야 함은 물론, 각각의 음악적 시도가 사운드와 이야기를 통해 어떤 뚜렷한 의도와 의미성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더욱이 그 의도와 의미를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첫 시도라는 점에서 그 의욕의 크기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찬원은 이미 《미스터트롯》과 다양한 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 이미지와 음악적 색에 대한 판단이 내려진 가수다. 달리 표현하면 대중은 이미 이찬원의 장단점과 색을 어느 정도 꿰뚫고 있고, 가수 입장에서 이 같은 기대감을 뚫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보여주기에 트로트는 더더욱 쉽지 않은 장르다.

다행스럽게도 이 같은 첫 시도에 대한 우려는 타이틀 곡 《풍등》에서 상당 부분 해소된다. 새 앨범에 대한 고민이 이미 어떤 과정을 지나 담담하게 걸러져 나온 듯한 이 곡은 이찬원이 갖고 있는 어른스러운 목소리와 태도에 더없이 잘 맞아떨어지는 수작이다. 한국적인 혹은 동양적인 분위기가 짙게 드리운 가운데, 서글퍼 사무치게 한스러운 스토리지만 지나친 감정과잉 없이 어른스러운 완급 조절을 통해 능숙하면서도 근사하게 표현된다. 꾹꾹 눌러진 슬픔은 오히려 이 곡이 가진 예스럽고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한껏 강조하고 있으며, 드라마틱한 편곡이 마치 한 편의 뮤지컬처럼 아스라히 시각화돼 펼쳐진다. 이 한 곡만으로도 이찬원의 첫 솔로작은 충분한 명분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흥미롭게도 ‘ONE’은 이찬원 이름의 마지막 글자인 ‘WON’과 동음이의 관계를 갖기도 한다. 그의 첫 작업이 무엇보다도 이찬원스러움에 대한 표현일 것이라는 암시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찬원스러움이라는 게 무엇일까. 새삼 궁금해진다. 당연히 먼저 떠오르는 것은 트로트 가수로서의 그의 음악적 정체성이다. 그런데 트로트 가수로서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또 얼마나 애매한가. 사실 많은 이가 오해하고 있지만 트로트는 단일한 장르라기보다는 방법론이나 정서에 가까운 음악적 구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국악이 있고, 록도 있으며, 라틴 리듬, 포크나 발라드스러운 편곡이 담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스타일의 편곡은 그 어느 때라도 정확히 트로트만이 가진 ‘뽕’의 정서 안에 녹아들어야 하며 그 의도가 대중에게도 온전히 명확히 전달돼야 한다. 그것을 다른 말로 장르적 진정성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리고 이 같은 장르의 진정성이라는 측면에서 이찬원의 첫 앨범은 제법 모범적인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이찬원은 트로트라는 장르를 단순히 ‘활용’하지 않고 그 장르가 갖고 있는 수없이 다른 정서를 때로는 정석적으로 때로는 변칙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브라스가 주도하는 경쾌한 행진곡풍의 《사나이 청춘》은 앨범에서 가장 강한 흡인력을 가진 현대적인 트로트 곡으로 완성됐지만, 이어지는 《건배》는 바이올린과 기타를 통해 그와 대조적인 성숙함을 풍겨내는 어쿠스틱한 사운드에 녹여낸다. 두 곡 모두 트로트의 전형성을 이질적인 악기 편성과 편곡을 통해 변주해낸 작업이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트로트의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의 장르적 진정성을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너무도 당연하게 그의 목소리다. 트로트 가수 이찬원의 가장 큰 미덕은 역시 가장 고풍스러운 성향의 곡들부터 가장 트렌디한 편곡까지 모두 일관된 목소리로 아우를 수 있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부터 트로트를 통해, 트로트를 위해 연구되고 단련된 그의 목소리는 단 한 번도 반복됨 없는 다양한 편곡 속에서 전혀 위화감 없이 그 모든 다른 색깔에 대응한다. 《바람 같은 사람》은 마이너풍 발라드와 트로트 가락을 절묘하게 뒤섞은, K팝 시대에 이제는 귀해진 성인 취향의 ‘가요’다. 이어지는 《트위스트고고》는 제목 그대로 로큰롤의 한 갈래인 트위스트에 한 시대를 풍미한 고고 리듬을 결합한 현대적인 댄스곡이다.

 

이찬원 목소리가 가장 중요한 음악적 요소

이찬원의 목소리가 아니라면 1990년대 댄스가요라고 해도 큰 위화감이 없을 만한 곡이다. 그런가 하면 모든 면에서 가장 정통 트로트의 정서에 근접한 《밥 한 번 먹자》가 있다. 《사나이 청춘》과 정서적으로 이어지는 곡으로, 가장 직관적으로 이찬원의 트로트를 감상할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모든 각각의 시도는 이찬원의 목소리 속에서 트로트 음악으로서의 맥락과 설득력을 성공적으로 확보한다. 중저음을 강조한 그의 톤은 그 자체로도 유니크한 매력을 갖고 있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완성된 기교와 정서는 가장 예스러운 곡들을 현대적으로, 가장 현대적인 곡들을 고풍스럽게 들리도록 만든다. 《오.내.언.사》는 이번 앨범의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로 ‘팬송’의 각별한 의미와 감동이 K팝 아이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직접 써내려간 노랫말 때문인지는 몰라도 앨범을 통해 이찬원의 보컬이 가장 ‘개인적’으로 들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역시 그 핵심은 목소리다.

지난 몇 년간 트로트는 ‘트롯’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고, 더 이상 ‘성인가요’나 ‘뽕짝’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찬원과 같은 경연대회 출신의 젊은 피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익숙한 장르의 새로운 해석을 꾀하기도 하며, 본인의 음악적 정체성과 성향에 어울리는 새로운 컨템포러리 대중음악으로서 트로트의 새 흐름을 실험하고 있다. 어느 것이 정답이거나 옳은 길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그 핵심이 전통과 현대와의 조화를 통한 장르적 진정성과 일관성이라 말한다면 이찬원의 ‘ONE’은 제법 모범적인 답안이라 할 만하다. 비록 그의 음악적 포부나 욕심은 다양한 갈래로 뻗쳐 있지만 그 모든 시도는 팬들이 기대하는 이찬원의 정체성과 동떨어진 곳으로 향하지 않고 늘 본질로 돌아온다. 그는 결코 트로트의 큰 틀을 벗어나는 법이 없지만 그럼에도 이 장르가 품을 수 있는 수없이 다른 방법론을 다양하게 시연하고 있다. 이 두 미션을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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