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매국’ 해외 기술 유출에 반도체가 위험하다
  • 박창민 기자 (pcm@sisajournal.com)
  • 승인 2023.04.16 10:05
  • 호수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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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5년간 93건의 국내 산업기술 해외 유출 사건 발생
피해액 25조원, 반도체 핵심 기술 탈취 시도가 가장 많아 
거부할 수 없는 제안으로 핵심 인재 포섭하는 수법 주의

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되면서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 역시 붐을 이루고 있다. 특히 국가나 기업의 기술 탈취나 이를 막기 위한 첩보전은 스파이 영화를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하다. 핵심 기술이 해외에 유출된 국가는 최소 수천억원에서 많게는 수조원에 달하는 경제적 피해를 보게 된다. 반대로 기술 탈취에 성공한 쪽은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얻게 된다. 산업기술 해외 유출이 ‘현대판 매국’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사자널 임준선

해외 산업스파이들 먹잇감 된 한국 기업

반도체와 IT 분야에서 눈부신 기술 발전을 이뤄낸 한국 기업은 이미 산업스파이들의 먹잇감이 된 지 오래다. 해외 기업들은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의 핵심 기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A씨는 최근 미국 기업 인텔로 이직하기 위해 최신 반도체 초미세 공정과 관련된 국가핵심기술 및 영업비밀 등 33개 파일을 유출하다 적발됐다. 올해 초에는 삼성전자 자회사 세메스가 개발한 반도체 세정장비 핵심 기술을 빼내 장비를 만든 후 이를 중국으로 넘긴 일당이 검찰에 기소되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기술 개발 경쟁이 시작된 이차전지 분야도 마찬가지다. 2021년 초 국내 최대 양극재(이차전지 핵심소재) 생산업체인 F사 퇴직 연구원들은 해외 경쟁업체로 이직을 시도했다. 이들은 아시아 및 유럽계 후발업체 이직을 목적으로 상용 이메일과 클라우드 등을 통해 국가 R&D 과제를 포함한 다수의 기술 자료를 유출했다. 결국 F사 퇴직 연구원들은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부정경쟁방지법) 위반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해당 사건은 모두 국가정보원의 첩보에서 시작됐다. 국정원이 최근 5년간(2018년 1월~2022년 12월) 적발한 산업기술 해외 유출 사건은 총 93건으로 기업 추산 피해액은 25조원에 이른다. 특히 전체(93건)의 3분의 1(33건)이 ‘국가핵심기술’ 유출 사건이었다. 국가핵심기술이란 국내외 시장에서 차지하는 기술적·경제적 가치가 높거나 관련 산업의 성장 잠재력이 큰 기술을 의미한다. 해외로 유출될 경우 국가의 안전 보장 및 국민 경제 발전에 중대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정부는 이런 분야를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해 철저히 관리·감독해 왔다.

그럼에도 핵심 기술 유출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국정원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기술 유출은 반도체·디스플레이·이차전지·자동차·정보통신·조선·전기전자 분야에서 75건(80.6%) 발생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유출된 기술은 각각 24건, 20건에 달한다. 특히 해외로 빼돌려진 기술 가운데 총 14건은 국가핵심기술이 포함됐다. 이차전지·자동차·정보통신 분야에서도 각각 7건의 산업기술이 유출됐다. 총 21건 가운데 국가핵심기술은 11건으로 절반에 달했다. 조선 분야의 경우 해외로 유출된 산업기술 가운데 단 1건을 제외하고 5건이 국가핵심기술이었다. 

해당 분야는 모두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래를 책임질 산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도체나 이차전지 등 기술패권을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국내 산업기술을 자국으로 빼내려는 해외 경쟁 기업들의 시도가 줄을 잇고 있는 셈이다. 사실 적발된 기술 유출 사례는 일부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국내 기술 탈취 수법은 갈수록 고도화되고 교묘해지고 있다. 보안체계가 비교적으로 잘 구축된 대기업보다는 핵심 협력사를 통해 기술을 탈취하거나 중소기업의 취약한 보안 관리를 파고드는 방법이 성행하고 있다. 빼낸 기술을 유통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기술 유출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인터넷 암시장으로 통하는 ‘다크웹’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과거에는 사람과 기술을 동시에 빼돌리는 인력 매수 같은 고전적인 방법이 일반적이었다. 

해외 경쟁 기업들의 경우 국내 연구개발 핵심 인재를 빼내기 위해 ‘징검다리 이직’ 수법을 활용한다. 현재 국내 기업들은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해 ‘동종업계 이직 금지 제도’ ‘전직 금지 가처분소송’ 등으로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경쟁국 기업은 외관상 업계와 전혀 관련 없는 기업을 설립해 국내 핵심 인재를 스카우트하고 있다. 제도상 이직 금지 제재를 회피하면서, 기술 인재들을 채용해 영업비밀을 빼가고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국내 기술 탈취는 크게 다섯 유형으로 이뤄지고 있다. △국내 업체 내부에 유출 조력자 심기 △협력업체 공략, 불법 기술 유출 종용 △리서치 업체를 통한 기술 정보 대행 수집 △국내 대학 및 연구소에 공동연구 빙자 접근 등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산업스파이들은 기술 유출 대상 기업 임직원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 고액 연봉과 파격적인 조건을 들이밀어 국내 핵심 인재들을 유혹하는 것이다. 실제로 삼성전자 자회사인 세메스 전 연구원 등은 기술 유출 대가로 약 1200억원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연구원들은 중국의 반도체 기업과 합작법인을 설립해 관련 기술을 모두 이전하는 조건으로 합작법인 지분 20%를 받기로 한 것으로 파악된다. 2006년 현대차 해외사업부의 중국 담당 직원의 경우 2년 동안 3000억원의 개발비가 투입된 회사 기술을 중국 기업에 10억원에 넘기기도 했다. 

기술 유출에 가담한 직원들은 막대한 뒷돈을 챙기지만, 기업에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안기게 된다. 2014년 국내 이동통신 중계기 개발업체의 영업담당 임원은 회사 기밀을 미국 경쟁사로 빼돌렸다. 기밀 유출 이후 사활을 걸던 프로젝트가 무산되면서 해당 업체는 문을 닫았다. 회사 대표는 지병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매출 500억원대에 연구개발 인력만 60명이었던 강소기업이 기술 유출로 한순간에 무너졌다. 

ⓒ연합뉴스
정진우 대검 과학수사부장이 2022년 10월27일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한 대응방안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술 유출 범죄 키운 솜방망이 처벌

재계 안팎에서는 반복되는 기술 유출 범죄가 솜방망이 처벌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대법원 사법연감을 기반으로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처리된 제1심 형사공판 사건 81건을 검토한 결과 △집행유예(39.5%) △무죄(34.6%) △재산형(8.6%) △유기형(6.2%) 순으로 판결된 것으로 나타났다. 5년간 1심 재판에서 유기징역(실형)을 선고받은 사건은 총 5건에 불과했다. 산업기술 유출 사건의 무죄 선고 비율은 같은 기간 전체 형사사건 무죄율(3.0%)보다 11.5배 이상 높았다.

이렇게 기술 유출 범죄의 처벌 수위가 지나치게 낮은 원인으로는 ‘양형기준’이 꼽힌다. 2019년 산업기술보호법이나 부정경쟁방지법의 법정형은 상향됐지만, 실제 선고를 내릴 때 참고하는 양형기준은 법정형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기술 유출 관련 법령은 다툼의 여지가 많으며 피해 정도를 산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처벌을 피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김민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의 기술 유출에 대한 법의 처벌 규정 수위는 주요국과 비교해 낮지 않으나, 실제 법원에서 선고되는 형량은 법정형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기업에선 기술 유출로 인한 산업 경쟁력 저하 등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지만 정작 법원의 판결은 미약한 수준에 그친다는 얘기다. ‘걸려도 남는 장사’란 말이 업계에서 나올 정도다. 전문가들은 국가 경제에도 막대한 손실이니만큼 산업기술 유출을 막기 위한 법망이 더욱 촘촘해져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지적한다. 

국정원-특허청-검찰 삼각 공조로 대응

국내에서 산업스파이를 조사 및 수사하는 기관은 국정원과 검찰 그리고 특허청이다. 먼저 국정원은 국내 첨단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해 2003년 ‘산업기밀보호센터’를 주축으로 산업스파이 차단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가핵심기술 보유 기업 및 국가 연구개발 수행 연구소를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 등을 통해 업계 기술 보호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기술 유출 첩보를 입수해 수사기관에 넘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 

대전지방검찰청의 경우 특허범죄 중점검찰청으로 기술 유출 사건을 전담한다. 2019년 지식재산권 사건 중 법적·기술적 쟁점이 복잡한 사건을 전국 검찰청으로부터 이송받아 대전지검에서 수사한 후 관할 법원에 직무대리 기소를 하는 방식의 ‘전문사건 직무대리 기소’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현재 대전지검 특허범죄조사부는 전문성을 갖춘 검사와 수사관을 우선 배치하고, 특허청 직원을 파견받아 연평균 200건가량의 자문 의뢰 건을 처리하고 있다. 

특허청 기술경찰은 국가핵심기술의 해외 유출을 막고 특허권·영업비밀·디자인권 침해·유출 범죄 수사를 위해 2019년 3월 설립됐다. 2021년 7월 기술범죄수사 전담조직인 기술경찰과로 확대 개편했다. 기술경찰은 박사(공학·약학·법학·디자인), 변호사, 변리사, 포렌식 전문가, 심사·심판 경력자 등 다양한 전문성을 가진 수사관으로 구성해 기술전문수사를 위한 인적 토대를 갖췄다. 특허청은 올 상반기 기술범죄수사지원센터를 신설했다.

현재 국정원-특허청-검찰의 삼각 공조로 국내 기술 유출에 엄정하게 대응하고 있다. 먼저 국정원이 기술 유출 첩보를 입수해 검찰과 특허청 등에 넘기며 사법 처리를 지원하고 있다. 특허청은 국정원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토대로 기술 침해 여부와 해당 기술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판단한다. 검찰은 국정원이나 특허청과 공조해 산업스파이를 기소하는 역할을 한다. 

지난 1월 반도체 웨이퍼연마(CMP) 관련 기술을 중국에 유출하려던 국내 대기업·중견기업 전 직원 3명을 구속하는 등 6명을 기소한 사건은 국정원과 특허청, 검찰의 공조수사를 통해 이뤄지기도 했다. 국정원 관계자는 “기술 보호가 국가 안보 차원에서 대응할 필요성이 높아진 만큼 기업·연구소는 물론 관계 및 안보기관 등의 유기적인 협력이 더욱 중요해졌다”며 “검찰-경찰-특허청-산업부-과기부-중기부 등 유관기관과의 공조를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중고 시달리는 삼성전자

끊이지 않는 기술 유출과 14년 만의 최악 실적 

삼성전자는 올 1분기 매출 63조원, 영업이익 6000억원을 기록해 지난해 동기보다 각각 19%, 95.75% 감소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4월7일 공시했다. 분기별 영업이익이 1조원 밑으로 떨어진 것은 2009년 1분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4년 만이다. 이번 실적은 그동안 증권가에서 예상했던 영업이익 전망치 1조원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으로 ‘어닝쇼크’(실적 충격)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IT 수요 부진이 지속되면서 반도체 부문 실적이 악화해 전체 실적이 지난 분기 대비 큰 폭으로 하락한 것이다. 최근 D램과 낸드플래시 판매량과 가격이 동반 하락하며,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불황이 깊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는 이날 메모리 반도체 감산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감산 발표 이후 주가는 일부 회복됐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상대적으로 경기를 많이 타는 메모리 반도체를 대신할 신성장동력을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부 직원의 잇따른 핵심 기술 유출 사건까지 발생했다. 삼성전자는 현재 협력사들의 기술 자료 전수조사에 나선 상태다. 최근 수년간 핵심 기술 유출이 계속된 만큼, 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행보로 풀이된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2일부터 한 달간 협력사 기술 자료 취급에 대한 자진 신고 기간을 운영했다.

실제로 지난 1월 삼성전자 자회사 세메스의 직원이 중국 업체에 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됐으며, 삼성디스플레이에서도 연구원이 회사 내부망에 접속한 후 외부 유출이 금지된 핵심 자료를 확보해 중국 경쟁사로 이직한 사례도 있어 경영진이 곤혹스러워 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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