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 부른 몰락…빚으로 쌓은 건축왕의 ‘모래성’
  • 춘천·동해=공성윤 기자 (niceball@sisajournal.com)
  • 승인 2023.05.01 10:05
  • 호수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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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임대사업에 강원 토지 개발까지 손대면서 부채 6000억원으로 불어나
피해는 고스란히 인천 세입자와 동해 시민들에게 돌아가

2월28일 인천 미추홀구 한 빌라에서 30대 청년이 숨진 채 발견됐다. 전세사기 혐의로 구속된 ‘건축왕’ 남헌기(61) 사건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 시사저널은 3월17일자 기사(‘건축왕’, 전세금으로 강원 개발사업 벌였다…“최문순의 대장동”)를 통해 남씨의 행적을 되짚어보며 그의 실명을 처음 공개했다. 이후 4월14일과 17일 연달아 남씨의 피해자인 20대 남성, 30대 여성이 또 극단적 선택을 했다. 사건은 일파만파 커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엄단을 지시한 가운데 시사저널이 암시한 정치권과의 연관성은 전국적 화두가 됐다.

청년 3명의 목숨을 앗아간 남헌기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 시사저널은 남씨의 10여 년간 사무가 기록된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단독 입수했다. 100GB에 달하는 디스크 안에는 남씨의 행각을 뒷받침할 근거 자료가 다수 포함돼 있었다. 해당 자료를 토대로 남씨의 흥망성쇠를 따라가봤다.

남헌기 전 동해이씨티 회장 ⓒ연합경제tv화면캡처
남헌기 전 동해이씨티 회장 ⓒ연합경제tv화면캡처

학원가 스타에서 건설업계 거물로 성장

남씨는 전세사기의 흔한 수법인 갭투자 대신 인천을 중심으로 주택 2700여 세대를 직접 지어 전세보증금을 챙겼다. 그가 ‘건축왕’으로 불린 배경이다. 다만 남씨가 처음부터 건설업에 종사했던 건 아니다. 인하대를 졸업하고 육군 대위로 전역한 그는 당초 교육사업에 진출했다. 1990년부터 2006년까지 남씨는 입시·외국어·컴퓨터학원 등 100여 곳의 학원을 설립해 운영했다. 이 시기에 연세대 교육학 석사 과정을 졸업했고, 사단법인 한국학원총연합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그는 종교 관련 사업에도 손을 뻗었다.

그러다 2010년대 초 건축사업에 발을 들였다. 2011년 상진종합건설을 설립해 인천에 주택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또 측근 명의로 세운 새힘종합건설, 창영종합건설 등에 시공을 맡겼다. 남씨의 딸 A씨(34)가 본인의 이름을 따 설립한 건설사도 그중 하나다. 주택이 준공되면 공인중개사와 중개보조원 등을 끌어들여 임대인으로 세웠다. 남씨 일당은 폐업한 사무소를 포함해 7곳의 공인중개사사무소를 관리했다.

남씨는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을 일으켜 자금을 조달했다. 차입처 대다수는 시중은행이 아닌 저축은행, 단위농협·수협, 새마을금고 등이었다. 남씨가 PF 자금으로 쌓아올린 주택은 모두 고스란히 전세사기 피해 명단으로 이어졌다. 최근 극단적 선택을 한 피해자 2명이 살던 집도 그중 하나였다.

남씨 사업에 대해 잘 아는 익명의 외부 관계자는 “사업성이 나빠 제1금융권에서 대출을 못 받으니 금리가 높은 제2금융권에서 돈을 당겨 썼다”고 전했다. 또 “대출을 받을 때 감정평가사가 부동산 평가액을 부풀려 담보대출 가능 금액을 늘렸고, 대출 브로커가 금융사에 다리를 놓았다”며 “감정평가사와 브로커는 그 대가로 거액의 수수료를 현금으로 챙겼다”고 귀띔했다.

남씨는 일반 분양사업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자신이나 주변인 명의로 주택을 보유한 채 임대사업을 펼쳤다. 지난해 8월 기준 남씨가 관리한 임대사업자는 81곳이다. 폐업한 업자(27곳)까지 포함하면 모두 108곳이다. 다주택 보유에 따른 세금 폭탄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빌려 임대사업자를 등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식으로 남씨 일당은 인천에서 △건설사(상진, 새힘, 창영 등) △공인중개사사무소 △임대사업자 등 ‘삼각편대’를 구성해 건축-중개-임대 사업을 총괄했다. 그 밖에 인테리어업체, 건물관리업체, 청소업체, 주유소, 카페 등도 운영했다. 남씨가 관리한 임대사업자는 법인·개인사업자까지 포함하면 총 161곳에 이른다.

임대주택은 전세를 놓고 세입자로부터 보증금을 받아 통장 잔고를 메웠다. 여기에 보유 주택을 담보로 빌린 돈을 더해 또 새로운 주택을 지어 나갔다. 외부 관계자는 “통상 주택사업을 안정적으로 끌고 가려면 PF 대출 원금을 갚으면서 사업을 확장해야 하는데 남씨는 대출 이자만 갚고 원금 상환 부담은 그대로 진 채 계속 주택을 지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식으로 공급한 주택은 총 2708세대에 이른다. 관계자는 “남씨 주택이 깡통으로 전락해 대금을 못 받고 속앓이를 하는 건축 하도급업자도 상당히 많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온갖 의혹에도 망상 개발 손대…타조 없는 타조농장만 남아

인천 주택사업에 매진하던 남씨는 2017년 들어 강원 토지 개발사업에 눈독을 들이게 됐다. 최문순 전 강원지사의 주요 공약이던 동해시 망상지구 개발사업이다. 강원도 산하 동해안권경제자유구역청(이하 동자청) 주도로 지금도 진행 중인 이 사업은 복합리조트 등 건설을 목표로 한 초대형 프로젝트다. 이 사업을 선점하기 위해 남씨는 특수목적법인(SPC) 동해이씨티국제복합관광도시개발(이하 동해이씨티)을 설립한 후 2018년 1월 망상지구에 속한 동해시 괴란동 178만㎡짜리 임야를 낙찰받았다. 낙찰가는 143억원이었다. 당시 남씨 측은 임대보증금 등으로 재원을 조달하겠다고 밝혔다. 동자청은 2018년 11월 망상 3개 구역 중 1지구의 개발사업자를 동해이씨티로 선정했다.

동해이씨티의 사업은 거의 진척되지 않았다. 토지 개발사업을 진행하려면 시행사가 토지를 닦고 공공시설 설치, 개발계획 승인, 환경영향평가 등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관할 기초단체인 동해시와 시민단체의 반발에 부닥쳐 삽 한 번 뜨지 못했다. 남씨를 둘러싼 숱한 의혹 때문이었다. 그중 하나는 남씨가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회사 규모를 부풀렸다는 주장이다. 그 밖에 동자청이 동해이씨티를 개발사업자로 선정하기 위해 매입 의무 부지의 면적을 축소해 줬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서울중앙지검은 이와 관련해 지난해 11월 남씨를 경제자유구역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금리 인상도 가속화됐다. 대출 이자는 늘어나는데 상환은 계속 미뤄졌다. 지난해 7월부터 미추홀구 일대에서 전세사기 고소가 잇따랐고, 올 3월 인천지검은 남씨를 사기와 공인중개사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그가 소유한 망상 토지도 경매에 나온 상태다. 동해이씨티 측은 망상 토지 근저당권과 세입자 전세보증금을 포함한 부채가 약 6000억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시사저널은 4월26일 남씨가 망상에서 운영했다는 유일한 사업체인 타조농장을 찾아가봤다. 굳게 잠긴 철장 너머에 타조는 온데간데없고 개 3마리만 짖어대고 있었다. 인근 주민은 “타조가 꽤 많았는데 관리가 안 돼 굶어 죽거나 다른 데 팔려간 것으로 안다”고 했다. 나머지 땅은 수풀이 무성한 채로 방치돼 있었다. 전종규 동자청 망상지구 범시민비상대책위원회 기획국장은 “이제 동물학대 정황까지 드러날까봐 두려울 지경”이라며 “빚으로 쌓아올린 남헌기의 탑은 파도 한 번에 무너질 모래성이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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