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메와 슬램덩크, 한국 극장가를 질주하다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23.05.05 15:05
  • 호수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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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패니메이션’ 주목하게 한 《스즈메의 문단속》과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열풍의 3가지 이유…좋은 콘텐츠·팬덤·보편적 메시지

2023년 상반기 최고 흥행작이자 극장가의 승자. 《스즈메의 문단속》이다. 지난 3월 개봉한 이 영화는 518만 명(5월3일 기준)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면서 ‘국내 개봉 흥행 1위 일본 영화’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1월에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동원한 관객 수는 460만 명이다. 두 편의 일본 애니메이션을 관람한 관객 수가 1000만 명에 달한다는 얘기다. 주목할 점은 이 영화들의 흥행이 장기화하고 있다는 것. 《스즈메의 문단속》은 5월17일 더빙판 개봉까지 앞두고 있어 관객 수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한국 영화 시장이 유례없는 위기를 마주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두 편의 애니메이션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 현상이 단순히 한국 영화의 침체로 인한 반사효과라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이 작품들은 영화 흥행을 넘어 배경음악, 만화와 소설 단행본에 대한 관심까지 키우면서 팬덤을 움직이고 있다. 이 두 편의 ‘재패니메이션(Japan+animation)’이 한국 극장가를 장기간 질주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쇼박스 제공

‘일본 애니’가 아닌 ‘좋은 콘텐츠’

《스즈메의 문단속》과 《더 퍼스트 슬램덩크》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한국에서 흥행하는 현상을 보고, 일본 현지 언론은 ‘한국의 젊은 세대는 ‘예스 재팬 세대’’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에 《스즈메의 문단속》을 만든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예스 재팬’이라기보다는 서로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저항이 없어진 게 아닌가 싶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일본의 것’을 선호한다기보다는 ‘좋은 콘텐츠’ ‘재미있는 콘텐츠’를 장벽 없이 즐기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각국 콘텐츠들이 다양한 플랫폼을 타고 공유되면서 국가 간 ‘문화의 장벽’은 낮아졌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흥행은 《더 글로리》와 같은 한국 콘텐츠가 일본에서도 인기를 얻는 현상과 비견되기도 한다.

OTT 작품의 흥행과 달리 영화의 흥행은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내야 이뤄진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OTT 관람에 익숙해진 관객을 극장으로 향하게 하는 확실한 유인을 가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특히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일본은 세계적으로 우위에 있다. 이미 글로벌 콘텐츠가 된 《이웃집 토토로》(1988), 전 세계적 문화를 만들어낸 《포켓몬스터》(1997),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2) 등 화려한 애니메이션 라인업을 자랑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022년 발간한 일본 콘텐츠 산업 동향에 따르면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 규모는 2020년 이미 2조4000억 엔(약 24조원)을 넘었다. 전 세계 애니메이션 산업의 60% 비중을 차지한다.

한국에서 흥행한 두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콘텐츠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일본의 만화가인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명작 농구 만화 《슬램덩크》를 원작으로 하는데, 원작자가 직접 영화의 각본과 감독을 맡으며 작화를 업그레이드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올해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공식 경쟁 부문에 초청되면서 작품성을 입증했다. 일본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로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후 무려 21년 만에 이뤄진 공식 초청이다.

《스즈메의 문단속》 ⓒ㈜쇼박스 제공
《스즈메의 문단속》 ⓒ㈜쇼박스 제공
《스즈메의 문단속》 ⓒ㈜쇼박스 제공
《스즈메의 문단속》 ⓒ㈜쇼박스 제공
《스즈메의 문단속》 ⓒ㈜쇼박스 제공
《스즈메의 문단속》 ⓒ㈜쇼박스 제공
《스즈메의 문단속》 ⓒ㈜쇼박스 제공
《스즈메의 문단속》 ⓒ㈜쇼박스 제공

확실한 팬덤이 화답한 결과

두 영화에는 확실한 팬덤도 존재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세계관이 집대성된 영화다. 신카이 감독의 전작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와 함께 ‘재난 3부작’으로 불린다. 특히 재난을 혜성에 비유한 영화 《너의 이름은.》(2017)은 일본에서 1300만 관객을 돌파했고, 국내에서도 38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신드롬을 일으킨 바 있다. 그의 작품 특유의 아름다운 작화와 섬세한 언어는 신카이 감독에 대한 팬덤을 만들어냈고, 그 팬덤은 이번 영화에도 화답했다.

만화 《슬램덩크》는 단순한 스포츠 만화가 아니라 추억 그 자체였기에,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개봉하기 전부터 주 마케팅 대상은 추억과 향수를 지닌 3040 남성이었다. 원작의 팬덤이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인기를 초반에 견인했고, 이후 1020세대와 여성 관객까지 유입되면서 관객층이 확대됐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주)NEW 제공
《더 퍼스트 슬램덩크》 ⓒ(주)NEW 제공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마케팅이 등장하는 것도 팬덤 때문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개봉 당시, 여의도 더현대 서울을 시작으로 한정판 굿즈와 유니폼을 판매하는 팝업스토어를 오픈했다. 오리지널 《슬램덩크》를 편집한 신장재편판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원작자인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영화를 제작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들썩인 팬덤은 영화 제작 과정이 담긴 책 《슬램덩크 리소스》에도 환호했다.

《스즈메의 문단속》 역시 5월부터 8월까지 대규모 팝업스토어를 운영하기로 했다. 영화의 특색을 살린 인테리어와 메뉴를 선보이며 지난 4월까지 운영한 《스즈메의 문단속》 콜라보 카페도 인기를 끌었고, 다양한 굿즈가 매진되며 영화의 인기를 방증했다. 영화 속 스즈메가 문을 닫는 장면을 패러디한 숏폼 콘텐츠가 SNS에서 유행처럼 퍼지자, 수입사인 미디어캐슬은 명장면 패러디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영화의 흥행은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확장됐다. 지난 4월에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 OST를 부른 밴드 텐피트의 내한 라이브 이벤트가 열렸다. 《너의 이름은.》과 《스즈메의 문단속》 OST의 주인공인 밴드 래드윔프스는 올해 7월 내한해 공연할 예정이다.

《슬램덩크》를 편집한 신장재편판(왼쪽)과 영화 제작 과정이 담긴 책 《슬램덩크 리소스》 ⓒYES24
《슬램덩크》를 편집한 신장재편판(왼쪽)과 영화 제작 과정이 담긴 책 《슬램덩크 리소스》 ⓒYES24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스즈메가 문을 닫는 장면을 패러디한 숏폼 콘텐츠가 유행처럼 퍼지자, 수입사 미디어캐슬은 명장면 패러디 대회를 개최했다. ⓒ미디어캐슬 인스타그램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스즈메가 문을 닫는 장면을 패러디한 숏폼 콘텐츠가 유행처럼 퍼지자, 수입사 미디어캐슬은 명장면 패러디 대회를 개최했다. ⓒ미디어캐슬 인스타그램

보편적인 메시지가 만들어내는 힘

영화 관객층이 확대된 배경을 영화의 ‘보편적인 메시지’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의 큰 틀을 바꾸지 않고 인물도 그대로 등장시켰지만, 주요 인물이 아니었던 송태섭으로 주인공을 바꿨다. 원작자인 만화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캐릭터 중 송태섭에 대해 더 그리고 싶었다. 연재 당시 그를 전부 그려내지 못했다는 미련이 남아있었다”며 “옛날에 그렸던 것들은 아직 아픔을 겪지 못한 상태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약자와 상처 입은 사람들이 그럼에도 앞으로 나서는 것, 고통을 극복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는 것이 이번 영화의 테마다 싶었다”고 밝혔다.

영화는 코트를 뛰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물과 패배하더라도 노력의 결실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비추면서 청춘들을 위한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를 보냈고, 세대를 막론한 공감을 받았다. 시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작품이 된 것이다. 원작을 접하지 못했던 1020세대는 “왼손은 거들 뿐” “포기를 모르는 남자” 등 밈으로 접한 명대사도 영화를 통해 확인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동일본 대지진을 주제로 삼고, 재난을 마주했던 일본의 지역들을 배경으로 그려낸 영화다. 일본적 요소가 가득한 영화이고, 일본에 생긴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지극히 일본스러운 영화지만 이 영화는 코로나19를 비롯해 지금껏 우리가 마주했던 모든 사회적 재난을 떠올리게 했다. 재난을 기억하고, 상처와 트라우마를 가진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로드무비는 따뜻한 풍경과 함께 하나의 위안처럼 관객들에게 기억됐다.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이 보내는 보편적인 메시지가 아시아권을 중심으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일본과 문화가 비슷한 동아시아권인 한국과 중국에서 《스즈메의 문단속》과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여전히 장기 흥행 중이다. 4월20일 중국에서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개봉 첫날부터 엄청난 관객을 동원하며 나흘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중·일 관계가 악화한 상황에서도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인한 ‘문화 훈풍’이 불어온 것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미국과 유럽에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에 밀리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스즈메가 슈퍼 마리오를 밀어내고 흥행 가도를 달린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지난 20년간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 관계가 좋지 않았던 적도 있지만, 그와 상관없이 한국 관객들과 소통해 왔다. 그런 관계가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 이런 방식으로 서로 교류해 나간다면 세계가 조금 더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또 “핸드드로잉 애니메이션이 대중화돼 있지 않은 미국과 달리 아시아권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흥행이 돋보이고 있다. 한국에서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개봉한 상황에서, 영화 시장에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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