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패권전쟁에 ‘새우 등’ 터진 K반도체
  • 이호길 시사저널e. 기자 (always@sisajournal-e.com)
  • 승인 2023.06.03 12:05
  • 호수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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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보안 이유로 美 반도체 업체 마이크론 제재…보복 조치에 미․중 갈등 다시 심화 양상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전쟁’이 격화하면서 중간에 낀 우리나라 기업들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미국은 경제 핵심 파트너이고, 반도체지원법(CHIPS Act) 보조금을 받으려면 미국과 보조를 맞추는 게 필요하다. 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에 대규모 생산시설을 운영 중인 데다 규모가 큰 현지 시장을 포기할 수도 없다. 양국 갈등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전략적 무대응으로 일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미·중 반도체 갈등은 중국이 5월21일(현지시간) 미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에 대한 제재를 발표하면서 심화되는 추세다.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 산하 인터넷안보심사판공실(CAC)은 마이크론 제품에서 심각한 네트워크 보안 문제가 발견돼 중요 정보시설 운영자는 이 회사 제품 구매를 금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중국 당국이 외국 반도체 기업을 대상으로 사이버 안보 심사를 실시하고 제재를 가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AP 연합
최근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전쟁이 격화되면서 국내 기업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사진은 G20 정상회의에서 악수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AP 연합

“마이크론 제재는 미국에 보내는 경고”

중국은 마이크론 제재 이유를 보안 문제라고 밝혔지만, 미국의 잇따른 대중(對中) 반도체 수출통제에 대한 맞불 성격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18나노미터(nm)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14나노 이하 로직 반도체 등 첨단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을 사실상 금지한 데 이어 일본·네덜란드와도 협의해 공급망 배제를 강화했다. 중국은 이에 반발해 마이크론 제품 구매 제한 조치를 내렸다는 것이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마이크론 제재는 미국에 대한 중국의 보복으로 봐야 한다”며 “중국 YMTC가 낸드 쪽에서 성장 속도가 빠르다. 마이크론을 배제하는 보복과 함께 자국 메모리 기업을 육성하기 위한 다목적 카드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이규복 반도체공학회장도 “컴퓨팅이나 프로세싱용 반도체가 아닌 이상 범용 제품인 메모리에는 문제가 될 만한 보안 이슈가 별로 없다”며 “보안은 제재 구실로 봐야 하고, 중국이 미국에 경고 신호를 보내기 위해 마이크론에 타격을 가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국내 기업들은 이 같은 중국의 조치에 따라 단기적인 수혜를 볼 수 있다. 중국 시장에서 마이크론이 제외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외에는 안정적인 메모리 반도체 공급처가 없기 때문이다. D램의 경우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가 제품을 생산 중이지만, 기술적 수준이 낮다는 평가를 받는다. D램 시장에서 최첨단 공정은 12나노급인데, CXMT 제품은 17나노 수준이다.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는 232단 낸드를 선보였지만, 생산력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보다 낮다. 지난해 기준 마이크론의 중국 매출은 33억 달러(약 4조3620억원)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시장 점유율을 높여 실적 개선을 노릴 수 있다.

그러나 반도체 업계는 반사이익보다 지정학적 리스크 고조에 따른 불확실성 확대를 우려한다. 미국이 마이크론 제재 맞대응에 나설 경우 불똥이 국내 기업으로 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메모리 공장을 가동 중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오는 10월 만료인 반도체 장비에 대한 수출 제한 유예 조치 연장이 필요한데, 미국의 대중 반도체 규제가 강화되면 첨단 장비 반입이 어려워질 수 있다. 삼성전자는 전체 낸드 물량에서 중국 시안 공장 비중이 40%를 차지하고, SK하이닉스는 D램과 낸드 각각 40%와 20%를 우시와 다롄 공장에서 생산할 정도로 중국 거점의 중요성이 크다.

미국이 국내 기업에 중국 압박 동참을 요구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앞서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 행정부가 한국 정부에 ‘중국의 마이크론 공백을 한국 반도체 기업이 채우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통신은 한국이 이를 따를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마이크 갤러거 미국 하원 미중전략경쟁특위 위원장은 최근 “동맹국인 한국이 (마이크론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미·중 양자택일 어려워…실리 추구해야”

이처럼 미국의 압박 수위는 강해졌지만, 한국의 최대 반도체 시장은 여전히 중국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반도체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40.3%에 달했다. 지난 1분기 기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전체 매출 중 각각 18.8%와 30.4%가 중국에서 발생했다.

반면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고도화된 반도체 설계 기술을 보유해 협업이 필요하다.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 중이고, SK하이닉스도 첨단 패키징 공장을 지을 예정인 가운데 양사가 현지에서 반도체법 보조금을 받을 때 가드레일(안전장치) 불이익이 없도록 당국과 협상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국내 기업들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진퇴양난’인 형국이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 눈치를 안 보기는 어렵고, 중국에서 이득을 보면 또 미국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며 “국내 기업들이 난처한 상황이다. 미·중 양자택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 양국 갈등으로 인한 압박이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국내 기업의 피해를 막으려면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동맹국이 타격을 입으면 기존 반도체 공급망이 붕괴할 수 있는 만큼 이 같은 우려를 미국에 전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규복 반도체공학회장은 “미국이 중국을 제재하면 현지에 공장을 지은 기업체들도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장비 반입 규제 측면에서 전면 해제는 어렵겠지만, 약간의 여지를 둬야 한다고 요구할 필요성이 있다”며 “정부 차원에서 국내 기업에 불똥이 튀지 않도록 미국과 적극적으로 협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략적 무대응 기조를 유지하면서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 등에 공식 입장을 내지 않고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 교수는 “정부가 미·중 사이에서 유연한 줄다리기 외교 정책을 펼치면서 양국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며 “기업 입장에선 미·중 갈등의 모든 부분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대외 변수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철저하게 실리를 좇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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