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형 벤처캐피털, 재벌가 新승계 창구로 떠오르나
  • 송응철 기자 (sec@sisajournal.com)
  • 승인 2023.08.29 10:05
  • 호수 1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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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세아·효성·CJ·GS그룹 등 잇달아 CVC 설립한 배경 주목…오너 일가 사익편취와 승계에 악용될 소지 여전

최근 주요 대기업들이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설립에 속속 나서고 있다. 정부가 CVC 관련 규제를 완화하면서다. 재계에서는 CVC 활성화가 대기업과 스타트업에 모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CVC가 대기업 오너 일가의 사익편취나 편법승계 등에 악용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7월24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얼라이언스 출범식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는 이창양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뉴시스

규제 풀린 이후 대기업들 CVC 설립 러시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2021년 12월부터 지난 5월까지 포스코그룹(포스코기술투자)과 GS그룹(GS벤처스), CJ그룹(CJ인베스트먼트), 효성그룹(효성벤처스), 동원그룹(동원기술투자), 세아그룹(세아기술투자), 에코프로그룹(에코프로파트너스) 등 대기업집단 7곳이 CVC를 설립했다. LX그룹은 지난 6월 LX벤처스를 출범했고, 두산그룹과 동국제강그룹 등도 CVC 설립을 공식화한 상태다. CVC(Corporate Venture Capital)는 전략적 목적으로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대기업 산하 벤처캐피털이다.

이 기간에 대기업들의 CVC 설립이 집중된 까닭은 관련 규제가 완화됐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대기업 일반 지주사의 벤처캐피털 설립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2021년 말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대기업 일반 지주사가 벤처캐피털을 100% 자회사로 거느리는 것이 가능해졌다. ‘해외투자 비율 한도 20%’ ‘전체 펀드 외부자금 비율 40% 이내’ 등의 규제가 있었음에도 대기업들은 앞다퉈 CVC를 설립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근래 들어 재벌 3·4세 후계자들이 CVC에서 벤처캐피털리스트로 경영수업을 받는 경우가 부쩍 늘어났다는 점이다. GS가(家) 4세인 허태홍 GS퓨처스 대표가 대표적이다. 허명수 전 GS건설 부회장의 차남인 허 대표는 2012년 GS홈쇼핑 재무회계부에 입사한 후 2014년 벤처투자팀 매니저 등을 거쳐 2020년 GS퓨처스 대표에 올랐다. GS퓨처스는 지난해 9월 GS그룹 창립 이후 처음으로 개최한 신사업 전략보고회에서 북미 지역 신기술 벤처 동향과 투자활동을 소개하며 존재감을 드러낸 바 있다.

김익래 전 다우키움그룹 회장의 장남 김동준 대표도 키움인베스트먼트를 이끌고 있다. 2009년 삼일회계법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김 대표는 2014년 다우기술 사업기획팀 차장으로 다우키움그룹에 입사한 후 2018년부터 키움인베스트먼트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박용만 전 두산그룹 회장의 차남 박재원 벨스트리트파트너스 대표도 CVC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그는 두산인프라코어 재직 시절 미국 실리콘밸리의 벤처투자사 D20 캐피털 설립과 운영을 책임진 바 있다.

대표이사가 아니지만, 투자심사역 등으로 CVC에서 활동 중인 3·4세도 다수다. 이동채 에코프로 회장의 장녀 이연수 이사가 그런 경우다. 그는 그룹 내 투자사업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CVC 에코프로파트너스(옛 아이스퀘어벤처스)에서 투자심사역으로 근무하고 있다.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의 장남 박준범씨도 미래에셋벤처투자 투자심사역을 맡고 있으며, 장녀 박하민씨는 미국계 VC인 GFT벤처스의 창립 멤버로 합류해 파트너로 활동 중이다. 홍석준 보광창업투자 회장의 장남 홍정환씨는 보광인베스트먼트에서 투자심사총괄을 역임 중이다.

아직 가시화되진 않았지만 구본준 LX그룹 회장의 차녀 구연제씨는 LX벤처스에 합류해 핵심적인 역할을 맡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구씨는 범LG가로 분류되는 벤처캐피털 LB인베스트먼트에서 인턴생활을 마친 후 마젤란기술투자에 팀장으로 합류하는 등 벤처캐피털 업계에서 경험을 쌓아왔다. 향후 출범이 예정된 동국제강 CVC에도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의 장남인 장선익 동국제강 전무나 차남 장승익씨가 투입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서울 중구 남산공원에서 바라본 종로 일대 빌딩숲 ⓒ시사저널 최준필

선대와 달리 후계자 CVC 경영수업 관행화

이는 선대의 경영수업 관행과는 달라진 풍경이다. 이들은 통상 그룹 내 핵심 계열사 재무·기획 분야에 관리자급으로 합류해 실무 경험을 쌓아왔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등이 그런 경우다.

이런 변화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대기업들의 신성장동력 확보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대기업 후계자들은 벤처캐피털리스트로 활동하면서 미래산업에 대한 통찰과 신사업 발굴 경험 등을 쌓을 수 있다. 그룹의 신규 성장동력을 발굴했다는 경영 성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도 이점이다.

재계는 CVC가 대기업과 스타트업 모두에 이익이라는 입장이다. 스타트업은 대기업의 자본과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다. 또 적절한 시점에 투자 대기업에 회사를 매각하는 방식으로 출구전략을 모색할 수도 있다.

대기업 입장에서도 신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처음부터 인수합병(M&A)에 나서는 위험 부담을 떠안을 필요가 없어진다. CVC를 통해 유망 스타트업들의 새로운 기술과 사업 모델을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결국 CVC가 대기업과 스타트업 사이에서 일종의 ‘중매’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CVC에 대한 우려는 여전하다. CVC가 대기업 오너 일가의 사익편취나 편법승계 등에 악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앞서 공정위도 2020년 6월 대기업 일반 지주사의 CVC 보유 허용을 추진하는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에게 이런 우려를 전달한 바 있다. 대기업의 CVC 보유를 허용할 경우 벤처기업 내부거래와 일감 몰아주기 등을 통해 총수 일가가 사익을 편취하거나, 편법 경영 승계에 악용할 우려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CVC가 승계 자금 창구로 활용된 사례도 있다. CJ그룹 CVC인 CJ인베스트먼트(옛 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가 대표적이다. 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는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장남인 이선호 CJ제일제당 경영리더(51%)와 이경후 CJ ENM 경영리더(24%) 등 오너 일가가 지배하는 씨앤아이레저산업의 100% 자회사였다. 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는 사실상 CJ가(家) 3세들의 개인회사였지만 CJ그룹 계열사들이 출자한 조합을 운용하며 사세를 확장해 왔다. 2021년에도 ‘글로벌 혁신성장펀드Ⅱ’를 론칭하면서 CJ제일제당과 CJ ENM, CJ대한통운, CJ올리브영 등 계열사들로부터 520억원 규모의 투자를 약정받기도 했다.

씨앤아이레저산업은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대기업의 CVC 보유가 가능해진 지난해 8월 그룹 지주사인 CJ에 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를 매각했다. 이후 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는 사명을 CJ인베스트먼트로 변경하며 CJ그룹의 CVC가 됐다. 이 거래를 통해 이선호·이경후 남매는 221억원의 현금을 확보했다. 재계에서는 이 자금이 향후 승계 자금으로 활용될 것으로 보고 있다.

CJ인베스트먼트의 사례와 반대로 CVC가 대기업 3·4세들이 설립한 스타트업에 ‘묻지마 투자’를 단행하는 사례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이후 그룹 계열사들의 일감을 몰아줘 몸집을 부풀리면 해당 스타트업을 설립한 오너 일가는 자신의 돈을 한 푼도 들이지 않고 막대한 승계 자금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시사저널 최준필·박정훈·이종현·사진자료

정부, CVC 활성화에 드라이브

이런 우려에도 정부는 대기업 CVC 활성화에 한층 힘을 싣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7월20일 ‘2023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서 벤처투자 활력 제고를 위해 공정거래법 개정을 통한 CVC 규제 완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현행 40% 이내로 제한된 CVC 외부출자 비중 확대가 골자다. 이 경우 CVC들은 그룹 계열사 등을 통해 더욱 손쉽게 투자금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산업통상자원부도 같은 달 24일 국내 CVC 42개사와 ‘CVC 얼라이언스’를 출범시켰다. 2025년까지 1조원의 정책펀드와 7조원의 민간 주도 펀드 등 총 8조원의 CVC 펀드를 조성하는 게 목표다.

학계에서는 CVC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제도 개선을 주문하고 있다. 자본시장연구원 소속 박용린 금융산업실 선임연구위원은 ‘해외 CVC 현황과 일반지주회사 CVC에 대한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대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되는 국내 경제구조의 특수성을 감안해 일반 지주사 CVC의 긍정적 기능은 살리면서 금산분리 원칙의 훼손이나 경제력 집중, 대주주 사익편취 가능성 등 잠재적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을 꾸준히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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