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에 빠진 대한민국, ‘휴대용 진단키트’가 구원투수 될까
  • 정윤경 인턴기자 (yunkyeong000@daum.net)
  • 승인 2023.09.30 10:05
  • 호수 1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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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 내 마약  첨가 여부 10초 만에 감지…어려움 겪던 일선 경찰 마약 수사에도 활력소 될 전망

#1. 지난 4월 서울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서 ‘마약 음료 사건’이 발생했다. 범행을 꾸민 일당은 ‘집중력 강화 음료’를 무료로 시음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학생들을 유인한 후 ‘마약 음료’를 건넸다. 평범한 우유처럼 보였던 이 음료에는 필로폰 3회 투약 분량이 들어있었다. 투약 경험이 없던 미성년자들은 구토와 어지럼 증상을 보였다. 정신착란과 호흡곤란, 수면장애 등을 호소하는 피해자도 있었다.

#2. 2018년에는 연예인 승리가 연루된 ‘버닝썬 사건’이 있었다. 클럽 버닝썬에서 일부 직원과 손님이 속칭 ‘물뽕(GHB)’이라고 불리는 약물을 술에 타 피해자에게 마시게 했다. 가해자들은 술에 탄 약물을 마신 피해자들이 의식을 잃은 사이 성범죄를 저질렀다. 이들은 복용 후 12~24시간 안에 체내에서 배출되는 GHB의 특성을 악용해 사후 추적까지 피했다.

9월19일 경기도 수원시 성균관대학교에서 정희선 과학수사학과 교수가 시사저널과 인터뷰하며 휴대용 마약 진단키트로 시험 테스트를 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마약사범 증가에 수사 당국 전면전 선포

한국은 ‘마약 청정국’이라는 지위를 잃었다. 마약사범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2021년 한 해 검거된 마약사범은 1만6153명이었지만 올해는 상반기에만 1만252명이 적발됐다. 전문가들은 올해 처음으로 마약사범이 2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마약을 접하는 연령대도 낮아지고 있다. 2011년 기준 마약사범의 주된 연령층은 40대였으나 최근에는 20대로 내려갔다. 19세 이하 마약사범도 2019년 239명에서 지난해 481명으로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수사 당국은 마약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학원가 마약 음료 사건 직후 경찰은 서울 내 경찰서 31곳 중 11곳에서만 운영해온 ‘마약수사전담팀’을 전역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국가 전체의 마약·조직범죄 대응 역량을 회복할 수 있도록 대검찰청에 가칭 ‘마약·강력부’를 조속히 부활시키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동안 경찰의 마약 수사에는 제약이 적지 않았다. 일선 경찰이 현장에서 마약 투약 여부를 신속하게 판별해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마약 제보·신고를 받고 지구대나 파출소 인력이 현장에 도착하더라도 마약 관련 전문인력이 도착하기 전까지 마약 투약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마약수사대 역시 전문 장비의 부피가 크고 운용이 복잡해 검출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경찰청·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2018년부터 정희선 성균관대 과학수사학과 석좌교수 연구팀과 손잡았다. 그 결과, 5년 만에 ‘휴대용 마약 진단키트’가 세상에 나오게 됐다.

휴대용 마약 진단키트는 술이나 음료 등에 마약류가 들어있는지 신속하게 확인할 수 있는 리트머스시험지다. 의심이 가는 음료에 시험지를 담갔을 때 연노란색 원이 짙은 회색빛을 띠면 마약류가 포함돼 있다는 의미다. 키트는 필로폰과 코카인, 케타민, 엑스터시(MDMA) 등 시중에 유통되는 주요 마약류 10여 종을 감지할 수 있다. 검사에 소요되는 시간은 10여 초에 불과하며, 길이가 손가락 한 마디가 채 안 돼 휴대도 용이하다.

다만 아직까지는 보완점이 남아있다. 클럽이나 술집 등 어두운 공간에서 키트를 사용할 경우 색이 잘 보이지 않아 육안으로 판별하기 어렵다는 점과 맥주 등 발효 음료에 대한 반응 속도가 느리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연구팀은 진단키트 개선 작업을 거쳐 9월 중 시제품을 출시, 마약 수사를 담당하는 경찰관들에게 우선적으로 보급할 예정이다. 지난 6월 마약 진단키트 시연회를 열었던 경기남부경찰청은 “기존에도 마약 간이 시약 검사지가 있었지만 편의성이 높고 성능이 우수한 키트가 개발됐다고 해서 현장 경찰관들과 시연회를 가졌다”고 말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경찰관들이 현장에서 바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증 연구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마약 진단키트가 수사에 투입되면 당국의 마약 단속에도 힘이 실릴 전망이다. 김도우 경남대 경찰학과 교수는 “기존 모발·소변 검사는 영장이나 신체 구속 등에 대한 동의서가 필요한데 음료에 진단키트를 넣는 행위는 정당한 경찰 활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며 “진단키트로 빠른 간이 검사가 가능해지면 구속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찰이 마약 투약 의심자를 잡아둘 수 있는 근거가 생기게 된다”고 말했다.

ⓒ시사저널 박정훈
9월19일 경기도 수원시 성균관대학교에서 정희선 과학수사학과 교수가 시사저널과 인터뷰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경찰·일반인용으로 구분해 출시 예정

연구팀은 향후 일반인들도 마약 진단키트를 활용할 수 있도록 상용화에 나설 계획이다. 이 경우 ‘버닝썬 사건’처럼 원치 않게 마약에 노출되는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정희선 교수는 “‘버닝썬 사건’으로 피해를 본 여성들이 안타까웠다”며 “휴대용 마약 진단키트 개발에 나선 배경도 여성, 미성년자 등 일반 국민이 마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진단키트는 경찰용과 일반인용으로 구분될 예정이다. 경찰용은 마약류 감지 범위 등 전문성에, 일반인용은 저렴한 가격으로 접근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 교수는 “1회 검사당 2000~3000원 안팎으로 국민이 부담을 느끼지 않는 선에서 책정할 것”이라며 “가격이 저렴해야 마약에 취약한 개발도상국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정희선 성균관대학교 과학수사학과 석좌교수는 누구?

195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정희선 성균관대 과학수사학과 석좌교수는 충주여고를 거쳐 숙명여대에서 약학 학·석·박사를 받았다. 제11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장으로 부임해 초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을 지냈다. 정 교수는 국제법독성학회(TIAFT)에서 아시아권 최초로 회장을 맡기도 했다. 현재 유엔 마약범죄사무소(UNODC) 국제과학수사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정 교수는 소변에서 필로폰을 검출하는 시험법을 최초로 개발했다. 1990년대 중반 모발에서 마약을 검출하는 검사도 정 교수의 손에서 나왔다. 그는 1995년 그룹 ‘듀스’의 멤버 김성재의 사인(死因)이 ‘마약’이 아닌 ‘동물 마취제’였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로 인해 수사기관의 판단이 타살로 전환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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