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랐다" "송구하다"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가 결국 국회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다. 헌정사 두 번째 대법원장 낙마다. 인사청문회에서 재산 관련 의혹을 비롯해 성범죄 판결, 편법증여, 역사관 등 쏟아지는 논란을 제대로 뚫지 못한 이 후보자는 '법을 잘 모르는 대법원장 후보자'라는 오명을 안고 물러나게 됐다.
6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이 후보자 임명동의안은 출석 의원 295명 중 중 찬성 118명, 반대 175명, 기권 2명으로 부결됐다.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된 것은 1988년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자 이후 35년 만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8월22일 서울남부지방법원장·대전고등법원장을 거쳐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있던 이 후보자를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했다. 이 후보자는 부산중앙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연수원 16기로 법관에 임용된 후 32년 간 법관으로 활동했다. 보수 성향의 법관 모임인 '민사판례연구회' 출신으로 일본 게이오대 연수를 두 차례 받는 등 일본 법조인들과 교류가 많아 법원 내 대표적 '지일파'로 분류된다.
이 후보자가 차기 대법원장으로 지명되자 법조계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의외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대법관 출신이 아닌데다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도 없는 등 전례에 비춰 뜻밖이라는 반응이 뒤따랐다.
일각에서는 윤 대통령과의 친분이 후보자 지명에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도 나왔다. 이 후보자는 윤 대통령의 서울대 법대 1년 후배로, 재학 당시에는 별다른 친분이 없다가 법조계에서 활동하며 가까워진 것으로 전해진다.
대통령실은 친분 관계에 따른 인선 의혹을 일축하며 "이 후보자는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두 번이나 역임하는 등 32년간 오로지 재판과 연구에만 매진해온 정통 법관"이라며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신장하는 데 앞장서 온 신망 있는 법관"이라고 엄호했다.
하지만 인사청문회에서 확인된 각종 논란과 태도, 답변은 '신망'을 주기엔 역부족이었다는 평가다. 청문회를 앞두고 이 후보자가 과거 일부 판결에서 성범죄 피고인 형량을 젊다는 이유 등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로 감형해준 사실이 확인되고 배우자와 자신의 부동산 투기, 재산신고 고의 누락 의혹 등이 불거졌다.
특히 처남이 운영하는 가족회사 옥산과 대성자동차학원의 비상장주식 9억9000만원 상당을 본인과 배우자, 두 자녀가 보유한 사실을 수 년간 재산신고에서 누락하다 늑장 신고한 사실이 드러나며 거센 질타를 받았다.
이 후보자는 '보유 사실을 몰랐다'는 취지로 해명했지만, 야당은 법을 잘 모르는 판사에 준법정신이 부족한 대법원장 후보자라며 맹공했다.
지난달 19∼20일 열린 청문회에서 이 후보자 일가족이 처가 회사로부터 2013년∼2022년에 걸쳐 총 3억여원을 배당금으로 수령했다는 사실까지 추가로 공개되며 입장은 더 난처해졌다. 야당 의원들은 10년 간 수억원대의 배당금을 받고도 처가 회사 주식 보유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했고 여론도 갈수록 악화됐다.
자녀에게 편법 증여를 했다는 의혹과 비전공자인 아들의 김앤장 인턴 활동 논란, 건국절 등 역사관 문제까지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이 후보자는 이틀간 진행된 청문회에서 "몰랐다" "송구하다"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신고해야 한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등 답변을 반복했고, 급기야 야당 의원으로부터 "판사가 법을 몰랐다는 말을 왜 그렇게 자주 하느냐"는 질타가 나오기도 했다. 청문회 답변 과정에서 웃음을 보이는 등 이 후보자의 태도도 논란이 됐다.
이 후보자 임명동의안 표결의 키를 쥔 더불어민주당은 이 후보자에 대해 부적격 판단을 내리고 윤석열 대통령의 또 다른 인사 참사로 규정했다.
여야의 강경 대치 국면에 표결 날짜가 두 번이나 연기되면서 이 후보자는 막판 '가결 호소' 목소리를 내며 뒤집기에 나섰고 비상장주식 처분 계획도 밝혔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들과 청문회준비단 소속 판사들이 여의도로 총출동해 설명자료를 배포하는 등 위법 논란을 무릅쓰고 총력전을 벌였지만 끝내 부결을 막아내진 못했다.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 가결 후폭풍을 마주한 민주당이 국회 동의 없이는 임명 불가능한 대법원장을 놓고 단일대오를 형성하려 한 점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 후보자가 낙마하면서 제17대 대법원장 임명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검증을 거친 인사를 윤 대통령이 지명한 후 인사청문회를 거쳐 다시 국회 동의를 받기까지 최소 한 달이 소요될 전망이다. 민주당은 사법부 공백 우려가 있지만 부적격 후보자가 사법부를 이끄는 것이 더 문제라며 '제2, 제3 부결'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 퇴임 후 사법부 수장 자리는 이날 기준 12일째 공석이다. 이대로라면 대법원장 공백이 해를 넘길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낙마한 이 후보자는 이날 오후 청문회준비팀 사무실로 사용한 서울 서초구 한 빌딩 앞에서 "빨리 훌륭한 분이 오셔서 대법원장 공백을 메워 사법부가 안정을 찾는 것이 저의 바람"이라고 심경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