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형 ‘재벌의 봄’은 언제 다시 올까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23.12.12 07:35
  • 호수 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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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500대 기업 오너 일가 1614명 주식 가치 전수조사 2탄
IT 플랫폼·게임·식품·유통업계 총수들 엔데믹 직격탄…자동차·이차전지는 역대급 실적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일 때의 일이다. 2021년 국내 증시는 유례없는 호황을 맞았다. 코로나19 사태로 유동성 잔치가 계속되면서 코스피는 처음으로 3000선을 돌파했다. 기업들의 ‘IPO(기업공개) 러시’도 이어졌다. 크래프톤과 카카오뱅크, 카카오페이, SK바이오사이언스, SK아이이테크놀로지 등이 말 그대로 ‘공모 대박’을 쳤다. 금융감독원 집계에 따르면, 2021년 IPO를 통해 국내 증시에 유입된 자금만 15조원에 이른다.

그래서일까. 시사저널이 매년 조사를 진행하는 주식 부자 순위에서 신흥 기업 오너들이 전통 대기업 총수들을 누르고 상위권에 대거 이름을 올렸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IT 플랫폼과 바이오, 게임업체들이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위기를 거치며 급성장했다. 이들 회사 오너들의 주식 가치 역시 크게 증가했다”면서 “창업형 부자의 부상은 지난 수십 년간 고착화된 재계 체제를 뒤흔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재계 판도 ‘지각변동’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가 대표적이다. 공정거래위원회 기업집단포털에 따르면, 카카오는 2016년 이후 90곳 이상의 기업을 M&A(인수합병)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코로나19는 카카오의 식탐을 더 자극했다. 언택트(비대면) 문화가 확산하면서 카카오는 쇼핑, 간편결제, 콘텐츠, 플랫폼 사업 등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김 창업자의 주식 가치 역시 덩달아 올랐다. 2021년 9월10일 기준으로 김 창업자의 주식 가치는 7조6861억원이다. 호텔신라 이부진 사장(6조1831억원), 현대차 정의선 회장(3조6796억원), 아모레피시픽 서경배 회장(3조6611억원), SK 최태원 회장(3조4240억원), LG 구광모 회장(2조5989억원) 등 재벌 총수 등을 제치고 주식 부자 3위에 깜짝 등극했다.

‘배틀그라운드’를 개발한 게임사 크래프톤 역시 2021년 화려하게 증시에 데뷔했다. 상장 당시 크래프톤의 공모액은 4조3098억원이었다. 코스피 역대 공모액 중에서 두 번째로 높았다. 상장 이후에도 주가는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한때 주가가 57만원에 육박할 정도였다. 덕분에 장병규 의장의 주식 가치는 3조원을 넘어섰다. 이 밖에도 방시혁 하이브(당시 빅히트) 의장(3조5443억원),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2조5235억원), 방준혁 넷마블 의장(2조5393억원),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1조5951억원), 박관호 위메이드 의장(8897억원) 등 IT 및 게임업계 오너들이 신흥 재벌로 떠올랐다.

방준혁·김택진 등 ‘1조원 클럽’ 탈락 고배

불과 2년여 만에 이 같은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IT 플랫폼과 게임 등 신흥 재벌의 자산 가치가 급속하게 꺼졌다. 코로나 특수를 누렸던 관련 기업들의 주가가 크게 하락한 게 원인이었다. 시사저널이 최근 기업 분석 연구소 리더스인덱스에 의뢰해 국내 500대 기업 오너 일가 1614명의 주식 가치를 전수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김범수 창업자의 주식 평가액은 11월10일 기준 2조7053억원을 기록했다. 연초 대비 24.6%, 2년 전(7조6861억원)과 비교하면 64.8%나 주식 가치가 감소했다. 주식 부호 순위 역시 3위에서 8위로 2년 만에 5계단이나 밀려났다.

실제로 2021년 16만원대까지 치솟았던 카카오 주가는 10월27일 장중 3만7000원대까지 떨어졌다. 최근 한 달여간 카카오 주가가 5만원대를 회복했지만 과거 고점에 비하면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향후 전망도 좋지 않다. 김 창업자와 카카오는 현재 금감원과 검찰, 공정위 등 사정기관으로부터 전방위 압박을 받고 있다. 공정위는 현재 카카오모빌리티의 이중 수수료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 시세조종 의혹을 조사해 왔던 금융감독원 특별사법경찰은 김 창업자를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서울남부지검 금융조사2부는 곧바로 경기 성남시에 있는 카카오 판교아지트 소재 카카오그룹 일부 사무실에 대해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조사 결과에 따라 적지 않은 후폭풍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 밖에도 장병규 크래프톤 대표(1조3618억원)와 방준혁 넷마블 의장(9597억원),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6832억원) 등 주요 게임업체 오너들의 주식 평가액도 크게 하락했다. 특히 방 의장과 김 대표의 경우 올해 회사 주가가 급락하면서 ‘1조 클럽’에서도 탈락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통상적으로 게임주는 금리 인상 시기에 미래가치 할인율이 높아져 주가가 약세를 보인다”면서 “미국 연준이 당분간 금리를 인하할 계획이 없는 만큼 이 같은 기조는 이어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신흥 부자 중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자존심을 지킨 인사가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다. ‘BTS의 아버지’로 불리는 방 의장은 올해 조사에서 2조7880억원의 주식 평가액으로 전체 7위를 기록했다. 2021년(3조5443억원)과 비교하면 평가액이 줄었지만, 전년 대비 평가액은 5457억원(24.34%) 늘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실제로 하이브는 최근 견조한 실적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3분기에는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향후 전망도 나쁘지 않다. 증권가에서는 BTS 공백에도 하이브 주가가 꾸준한 상승 곡선을 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당시 주식 가치가 크게 하락했던 기존 재벌들도 오랜만에 기지개를 켜고 있다. 삼성과 현대차, LG, 효성, DB그룹 오너 일가의 주식 가치는 적게는 3%대, 많게는 30%까지 증가했다. 이 중에서도 자동차 관련 기업의 평가액 증가가 눈에 띈다. 현대차그룹이 대표적이다. 현대차와 기아는 올해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영업이익만 보면 현대차가 15년 만에 삼성전자를 앞질렀을 정도다. 올해 현대차와 기아의 합산 영업이익은 27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덕분에 정의선 회장(3조1967억원)의 주식 가치는 연초 대비 8.91%나 상승했다.

한국타이어그룹(현 한국앤컴퍼니그룹)도 올해 사상 최대 실적 랠리를 이어가고 있다. 주력 계열사인 한국타이어는 지난해 연결 기준으로 매출 8조3942억원, 영업이익 7057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매출은 17.5%, 영업이익은 9.9% 증가했다. 올해도 이런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 주요 증권사들이 추정한 매출과 영업이익 전망치 평균은 각각 9조61억원과 1조1588억원이다. 매출과 영업이익 역시 역대 최고치를 경신할 것으로 예상된다. 주가 흐름도 나쁘지 않다. 연초 3만원대 중반에서 현재는 4만원대 중반을 오르내리고 있다. 조현범 회장(4148억원)의 주식 가치 역시 연초 대비 34.68%나 상승했다. 주요 기업 중에서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3년째 계속된 형제간 경영권 분쟁은 호실적의 변수가 되고 있다. 조양래 명예회장은 2020년 장남인 조현식 고문과 장녀인 조희경 이사장, 차녀 조희원씨 등을 제쳐두고 막내인 조현범 회장에게 보유 지분 전부(23.59%)를 넘겼다. 이후 형제간 법적 분쟁이 불거졌다. 법원은 조 회장의 손을 들어주며 경영권 분쟁 역시 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올 초 조 회장이 200억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검찰에 구속 기소되면서 경영권 분쟁이 재연됐다. 조 회장은 최근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법원 판단에 따라 판세가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 상황이다.

주식 부호 상위 50위권에 들지는 못했지만, 이차전지 업체인 에코프로비엠 최문호 대표와 에코프로머터리얼즈 김병훈 대표의 주식 가치도 많이 올랐다. 두 사람의 주식 가치는 각각 286억원으로 연초 대비 143%나 올랐다. 전체 평가 대상 중에서도 상승 폭이 가장 컸다. 이 밖에도 김남호 DB그룹 회장(4189억원)과 정몽진 KCC 회장(4830억원), 정몽익 KCC글라스 대표(2986억원), 정몽열 KCC건설 대표(1850억원),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3556억원), 조현상 효성그룹 부회장(3175억원) 등의 주식 가치가 11~39%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엔데믹으로 식품·유통업계 총수들 ‘울상’

엔데믹이 본격화되면서 국내 식품과 유통업계도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해 보복소비 등으로 호황을 누린 식품·유통업계는 올해 불황으로 돌아섰다.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 금리 인상으로 인한 이자 비용 상승으로 소비심리가 급속히 악화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유통업계 ‘빅3’인 롯데와 신세계, 현대백화점의 오너 일가 주식 평가액도 대부분 20% 이상 하락했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2335억원)의 하락률이 24.39%로 가장 높았다. 뒤를 이어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4040억원)이 -22.29%,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2630억원)이 -16.25%를 기록했다.

이들 외에 함영준 오뚜기 회장(3853억원)의 주식 가치는 16.90%, 이재현 CJ그룹 회장(3312억원)의 주식 가치는 25.50%,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2496억원)의 주식 가치는 34.38% 각각 하락했다. 그나마 김호연 빙그레 회장의 주식 가치가 2028억원으로 38.61% 오르며 업계의 체면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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