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디바’는 누구일까
  • 김영대 음악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2.10 13:05
  • 호수 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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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라부터 태연까지…대중음악의 ‘여신’이자 가장 인기 있는 스타

오디오에 관심이 있어 숍을 구경하거나 청음 테스트를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컬, 그중에서도 ‘여성 보컬’은 하나의 독립된 장르처럼 취급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음악 마니아들이 자신만의 여성 보컬 음반을 가지고 다니거나 혹은 스마트폰에 곡을 저장해 놓고 새로 구입하려는 기기를 테스트하는 장면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오디오적으로 특정 주파수대나 음색을 테스트하기 좋은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만큼 여성 보컬이 주는 매력이 보편적이면서 대중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좋은 여성 보컬은 모든 감정과 뉘앙스를 포괄한다. 감미롭고, 몽환적이며, 관능적이고, 때로는 치명적이기까지 한 이 보컬리스트들을 우리는 종종 ‘디바’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 단어의 라틴어 어원처럼, 이들은 대중음악의 ‘여신’이자 가장 인기 있는 스타이기도 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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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라 한국 대중음악 사상 가장 비범한 목소리

아티스트들의 아티스트, 이소라의 출발은 흥미롭게도 재즈였다. 지금은 수많은 가수가 흑인음악을 통해 음악에 입문하지만, 과거에는 많은 이가 포크(통기타)나 록을 통해 음악을 시작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 자체로 사뭇 독특한 시작이었다. 그렇게 이소라는 처음부터 달랐다. 천재 싱어송라이터 고찬용이 이끈 아카펠라 그룹 ‘낯선 사람들’의 보컬이었던 그녀의 목소리에는 음악을 잘 모르는 귀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특별함이 담겨 있었다. 비음 섞인 두터운 보이스, 미세한 플랫음이 주는 특유의 서정미와 우울함은 재즈 음악에 내재된 멜랑콜리를 정확히 표현했고, 이런 그녀의 독특한 음색은 천재 프로듀서 김현철에 의해 곧 발견됐다.

김현철은 그녀를 재즈 가수가 아닌 재즈풍의 팝 가수이자 발라드 가수로 재해석했고 《난 행복해》 《처음 느낌 그대로》 등 발라드가 주를 이룬 데뷔 앨범은 웰메이드 가요의 전성기였던 1995년에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대중적이라기엔 지나치게 낯선 목소리와 창법이었지만 대중은 그녀의 위대함을 그렇게 아주 빠르게 알아챘다. 발라드 가수로서 이소라의 가장 큰 장점은 그 독창적인 음색에서 비롯되는 ‘개인성’이다. 그리고 이 같은 개인성은 자신의 이별담을 그대로 옮긴 가사와 어울려 흉내 내기 어려울 만큼 독특한 정서를 만들어냈다.

대중음악에서 실연의 아픔을 담은 노래의 가사는 독특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클리셰에 가깝지만, 남자 가수가 아닌 여자 가수의 자기 고백은 당시만 해도 흔치 않았다. 이소라의 우울한 목소리는 그 안에 담긴 이야기와 감정들을 더욱 진짜라고 믿고 싶게 만드는 매력을 갖고 있었다. 3집의 《믿음》이나 6집의 《바람이 분다》도 가요계에 길이 남을 명곡이지만 김현철과 다시 조우한 4집의 《제발》은 평범한 듯한 표현들 속에서 이별의 가장 원초적인 아픔을 건드리는 절창이 눈부신 최고의 곡이다.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그녀가 슬픔을 못 이긴 채 두 번이나 NG를 내고 세 번 만에 이 곡을 완창하는 영상은 음악방송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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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현 “더 보이스(The Voice).”

미국 팝 음악에서 ‘더 보이스’, 그러니까 ‘목소리’는 불멸의 디바 휘트니 휴스턴에게 붙여진 영예로운 별명이다. 만약 우리 가요에서 그 별명이 가장 자연스럽게 어울릴 가수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바로 박정현을 언급하고 싶다. 그녀의 등장으로 가요계의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다. 당시만 해도 팝 음악의 영역이었던 R&B는 단숨에 가요의 가장 인기 있는 장르로 떠올랐고,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여자 가수 중 《꿈에》를 연습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음악 스타일이나 창법은 후대의 여성 보컬리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발라드 가수로서 박정현의 가장 돋보이는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폭발적인 가창력이다. 담백한 어쿠스틱 팝부터 초대형 발라드까지 아무렇지 않게 소화할 수 있는, 흡사 마녀의 주술과도 같이 완벽한 보컬 테크닉은 적어도 대중음악 범주 안에서는 딱히 비교할 대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같은 ‘국가대표’급 가창력은 음반뿐 아니라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를 대중에게 새로 알린 《나는 가수다》 같은 보컬 경연대회에서 여실히 입증된 바 있다.

하지만 그녀의 가창력이 단순히 성량이나 화려한 장식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컬리스트로서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은 오히려 이야기의 디테일을 섬세하게 살려내는 표현력에 있다. 이를 잘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녀의 대표곡인 《꿈에》다. 몇 번의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이 곡의 전개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상시킬 만큼 웅장하고 드라마틱하다. 이 변화무쌍한 곡을 박정현은 순간순간 다른 발성과 소리의 위치를 통해 장악해 나가는데, 극악의 난이도를 가진 곡 위에 군림하는 박정현의 모습은 놀라움을 넘어 무서울 정도다.

《꿈에》만큼 대중적인 히트곡은 아니지만 박정현 스스로 자신의 가장 위대한 곡으로 꼽는 《미장원에서》는 보컬리스트로서 박정현이 갖고 있는 표현력과 기교의 극한을 만끽할 수 있는 걸작이다. 이승환의 《천일동안》이 생각나는 웅장한 스케일과 점층적인 전개, 《꿈에》 이상의 깊은 감정을 요하는 난해한 패시지들을 그녀는 단 한순간의 주저함 없이 능숙하고 완벽하게 소화한다. 이런 가수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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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 K팝이 낳은 최고의 여가수

인기 그룹 출신의 보컬이 그 그룹을 능가하는 커리어를 갖게 되는 건 남녀 가수를 통틀어도 극히 드문 사례다. 그런 의미에서 소녀시대의 메인보컬리스트 태연의 존재는 더 각별하다. 그는 K팝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그룹인 소녀시대에 필적하는, 아니 어떤 의미에서 소녀시대의 커리어를 뛰어넘는 솔로 커리어를 보유한 가수가 된, 자타 공인 K팝 시대가 낳은 최고의 보컬리스트다.

소녀시대가 2009년에 《Gee》를 통해 슈퍼스타로 등장하기 이전에 그녀는 이미 발라드 가수로서 대중 속에 파고들었다. 인기 드라마 《쾌도 홍길동》과 《베토벤 바이러스》의 수록곡 《만약에》와 《들리나요》가 연속으로 히트하며 태연은 가장 촉망받는 발라드계 신성이 된 것이다. 그도 그럴 법했다. 풍부한 성량과 빈틈없는 테크닉, 무엇보다도 누구의 취향도 두루 만족시킬 수 있는 대중적인 톤은 최고의 발라드 가수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었다. 태연은 그 모든 걸 갖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서늘하고 차갑다. 테크닉은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으며 과잉도 결핍도 없는, 그야말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감정선을 자랑한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지극히 “K팝스럽다”고 할 만하다.

가요적인 감수성을 갖고 있지만 촌스럽지는 않은, 대중적이지만 세련된 그의 보컬은 한류 시대의 K팝이 갖는 글로벌한 감수성 그 자체다. 태연의 커리어는 《INVU》나 《Weekend》 같은 리듬감 있는 댄스곡들로 기억되는 경우가 더 많지만 그녀의 가장 빼어난 절창 중에는 여지없이 아름다운 사랑노래들이 여럿 포함돼 있다. 2020년에 발매된 2집 앨범 리패키지 버전의 수록곡 《너를 그리는 시간》은 그녀의 커리어 사상 최고 발라드 곡이다. 기술적으로 빈틈이 없어 때로는 차갑게도 느껴지는 태연의 목소리에 포근하고 느긋한 감성을 부여하는 서정적인 멜로디, 태연 안의 가장 따뜻한 면모를 이끌어내는 섬세한 노랫말도 정말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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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미 자유롭고 꾸밈없는 영원한 맨발의 디바

이은미의 감수성은 여타 발라드 가수들과는 다르다. 발라드는 기본적으로 서정성을 내세우는 음악이고, 그런 이유로 가수의 음색 역시 섬세한 미성들이 주를 이룬다. 《녹턴》을 들어보자. 이은미의 목소리는 절절하고 처연하지만 흔히들 이야기하는 ‘예쁨’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같은 이유 때문에 이은미의 발라드는 대중에게 가장 인상적인 사랑노래로 각인될 수 있지 않았을까.

쇳소리 섞인 그녀의 목소리는 블루스와 록 음악에 뿌리를 둔 것으로, 그녀가 객원보컬로 활동했던 신촌블루스 시절로 돌아간다. 198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던 한국 언더그라운드 음악은 TV가 음악의 가장 중요한 매체로 떠오른 1990년대를 맞아 대부분 설 자리를 잃었다. 언더그라운드 출신의 실력 있는 음악가들이 대중적인 방법론을 취하며 ‘오버’로 올라오게 되는데, 이은미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발라드 곡 《기억속으로》가 크게 히트하며 그녀에게는 새로운 커리어의 챕터가 열렸다. 《어떤 그리움》마저 잇따라 히트하며 일반 가요팬들에게도 이은미는 익숙한 이름이 됐다.

이은미가 지금과 같은 국민가수 반열로 본격적으로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최고의 히트메이커 윤일상과 만나면서부터다. 발라드보다는 댄스곡으로 더 유명했던 천재 작곡가 윤일상은 이은미라는 일생의 디바를 만나 가요계에 길이 남을 명곡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함께 만든 《애인있어요》 《녹턴》 《헤어지는 중입니다》는 당대의 히트곡을 넘어 특히 여성팬들의 영원한 애창곡으로 남게 됐다.

이은미를 이야기하면서 그녀의 공연에 대한 열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인기 가수가 됐어도 영원히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정신을 간직한 그녀의 진정한 매력은 1000회가 훌쩍 넘는 라이브콘서트 무대에서 온전히 발휘된다. 물론 공연가적인 이은미의 성격은 음반에서도 전해진다.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지만 계산적인 스튜디오 레코딩에서조차 그녀의 목소리는 앞서 언급한 그 어떤 가수들보다 그 질감이 거칠고 자연스럽다. 그래서 ‘맨발의 디바’라는 별명은 그녀의 외향이나 무대 매너가 아닌 그녀의 음악적 태도 그 자체를 가리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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