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반대운동 전선, 시애틀 · 프라하 지나 서울로
  • 고제규 기자 (unjusisapress.com.kr)
  • 승인 2000.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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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치는 反세계화 물결
작전명 ‘N30’. 1999년 11월30일 미국 북서부의 공업 도시 시애틀에 몰려든 시위대는 세계무역기구(WTO) 제3차 각료회의 개막식을 무산시켜 버리고 말았다. 미국 노동자, 프랑스 농부, 한국 인권운동가, 인도 학생, 환경운동가·페미니스트·종교인·동성애자…. 인종도 국적도 소속 단체도 제각각인 이들 시위대 5만여 명은 ‘WTO 반대’‘WTO는 물러가라’ 같은 구호를 외치며 시가지를 휩쓸었다. 6백만 달러라는 거액의 예산을 치안 확보 및 요인 경호에 배정했던 노력이 무색하게, 미국 정부는 전세계 협상 대표 앞에서 30년 만에 처음 최루탄을 사용하고 시애틀 전역에 비상 사태를 선포하는 ‘망신’을 당했다.

2000년 9월26일. 체코의 수도 프라하 또한 시위대로 뒤덮였다. 체코 정부는 1993년 체코가 ‘자본주의와 서방’으로 복귀한 것을 기념하는 상징적인 사업으로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 연차 총회를 유치했다. 바로 이 총회를 저지하기 위해 이른바 ‘반세계화 시위대’가 4만명 가까이 프라하로 몰려든 것이었다. 이들의 작전명은 ‘S26’.

시위대는 ‘경찰도 할 일이 많은데 쓸데없이 소요를 일으키면 결코 관용할 수 없다’는 체코 경찰의 사전 경고에도 불구하고, ‘IMF는 합법적 마피아’‘부유한 국가들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IMF를 박살내자’ 같은 구호를 외치며 시내 전역에서 게릴라식 시위를 펼쳤다.
2000년 10월, 이번에는 서울이다. 오는 19∼21일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를 앞두고 국내 시민·사회 단체들은 ‘시애틀-프라하를 지지하며, 계승하겠다’고 선언했다. 경실련·민주노총·참여연대·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한 1백30여 단체는 10월20일을 ‘아셈2000 신자유주의 반대 서울 행동의 날’로 선포하고,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일부 단체는 거사 날짜를 조합해 작전명을 정하는 반세계화 시위대의 국제적인 관행에 따라 ‘O20(October 20th)’을 인터넷 영문판 사이트 이름으로 내걸고 있다. 민간 단체의 이같은 움직임에 따라 경찰에는 초비상이 걸렸다(28~29쪽 상자 기사 참조).

국제적인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반세계화 운동을 초창기부터 주도해 온 ‘제3세계 외채 탕감 위원회(CADTM)’ 에릭 뒤상 위원장은 프라하 시위가 끝난 직후 벨기에의 유력 일간지 <르 스와르>와 가진 인터뷰에서 “운동은 계속될 것이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중요한 집회가 조만간 제3 세계의 3개 대도시에서 열릴 것이다”라며, 그 중 하나로 서울을 지목했다. 나머지는 아프리카 세네갈의 다카르(12월11∼17일)와 남미 브라질의 포토 알레그레(2001년 1월25∼30일)이다.

그렇다면 서울에서도 대대적인 아셈 저지 시위가 벌어질 것인가. 그렇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조심스러운 전망이다. ‘세계화 3대 기구로 꼽히는 WTO·IMF·IBRD 총회라면 민중 단체가 당장 저지 투쟁에 나서겠지만 아셈은 성격이 약간 다르다’는 것이 박석운 노동정책연구소장의 말이다. 신자유주의적 무역 기준을 결정하고 실질적으로 집행하는 3대 기구와 달리 아셈은 결속력이나 규정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형식만 따진다면 아셈은 아시아·유럽 정상이 만나 공식 의제 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 받는 ‘느슨한 협의체’이다. 그렇지만 민간 단체 사이에는 아셈의 본질을 둘러싼 논의가 분분하다. ‘아셈2000 신자유주의 반대 서울 행동의 날’에 참가하는 단체는 크게 세 부류. 이번 행사를 앞두고 한국과 아시아·유럽의 시민·사회 단체가 한시적으로 결합한 ‘아셈2000 민간 포럼’(민간포럼)과 IMF 사태 직후 결성되어 활동해온 ‘투자협정·WTO 반대 국민행동’(WTO국민행동)‘신자유주의반대·민중생존권쟁취민중대회위원회’(민중대회)가 그것이다.

이들 세 단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민중에게 축복이 아닌 재앙과 고통을 안겨 주고 있다’는 데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세계화의 부정적인 영향이 국제적인 부의 불평등, 발전의 불균형, 고용 파괴, 환경 파괴, 삶의 질 하락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셈을 대하는 시각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다.

먼저 민간포럼은 아셈을 인정하되, 이를 ‘인간 중심적인 모습’으로 개혁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곧 아셈이 신자유주의적인 의제를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항하되, 아셈 과정에 빈곤 퇴치 등 정치·사회 안보 측면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민간 포럼은 10월18∼19일 노동·농업·여성·환경 등 13개 분과 별로 워크숍을 진행하고, 여기에서 얻은 결론을 토대로 이른바 ‘민중의 비전’을 작성해 이를 정부간 정상회담에 전달할 계획이다.

이에 반해 WTO국민행동이나 민중대회는 아셈을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아셈은 또 하나의 세계화 추진 기구라는 것이 이들의 기본 시각이다. 이들 단체는 특히 이번 회담에서 다자간 무역 체제 강화 및 뉴라운드 개시에 대비한 협력 관계 구축 문제가 핵심 의제로 다루어질 것이라는 전망에 주목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아셈이 지향하는 것은 상품·서비스가 자유롭게 거래되고 금융 시장이 완전 자유화되며 금융 거래의 투명성이 보장되는 체제로서, 이는 다시 말해 ‘초국적 자본이 침투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을 의미한다는 것이 이들 단체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외교통상부의 한 관계자는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아셈인데, 미국 중심의 세계화를 반대한다는 시민단체들이 무엇 때문에 아셈에 재를 뿌리려 하느냐”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제창한 ‘제3의 길’을 비롯한 유럽식 자본주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아류에 불과하다는 것이 박석운 소장의 비판이다.
민간 단체 내부의 이같은 시각 차이는 전세계적인 흐름과도 맥을 같이한다. 시애틀 회의 이후 반세계화 운동 진영에는 사상적 대립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화 3대 기구를 둘러싸고 나온 이른바 ‘개혁론’과 ‘해체론’의 갈등이 그것이다. 먼저 개혁론자들은 노동·환경 기준을 무역과 연계함으로써 세계무역기구를 비롯한 자유 무역 및 투자 협정을 ‘개혁’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유무역협정에 노동·환경 기준을 포함하는 것만으로는 어떤 실질적인 효과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 해체론자들의 주장이다. 이를테면 환경단체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세계무역기구 안에 ‘무역환경위원회’가 설치되었지만, 이 위원회는 무역이 환경 파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기보다는 오히려 환경 관련 법률이 어떻게 자유 무역을 제한하고 있는지 연구하는 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세계화 3대 기구 전면 해체를 주장하는 이들은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는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언설에 맞서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는 구호를 확산시키고 있다.

2만∼3만명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번 아셈 기간 시위에서 시애틀-프라하 사태가 재연되지 않으리라고 낙관할 수 없는 것은 몇 가지 변수 때문이다. 첫 번째는 농민과 학생의 움직임이다. WTO국민행동의 한 관계자는 ‘농번기와 대학교 중간 고사 기간이라는 악재가 겹쳐 있기는 하지만 이들이 얼마나 역량을 결집해 내느냐에 따라 시위 양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이종화 정책실장은 “IMF 이후 개방 농정으로 인한 피해를 농민이 가장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라며, 한·칠레 자유 무역 협정 체결에 쐐기를 박기 위해서라도 총력 투쟁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지난해 시애틀 시위에 참가했던 한 농민단체 지도자는, 그때는 남의 나라여서 다양한 시위 전술을 펼치는 데 한계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한국대학생총연합과 전국학생연대회의 같은 학생 단체 또한 아셈이 열리는 10월 셋째 주를 ‘광폭한 투쟁 주간’으로 설정하는 등 총력 투쟁을 다짐하고 있다.

두 번째 변수는 노동계의 움직임이다. ‘아셈2000 신자유주의 반대 서울 행동의 날’을 주도적으로 조직하고 있는 민주노총은 이번 아셈 시위를 구심점 삼아 자동차 해외 매각·공기업 민영화·금융 부문 통폐합 등 3대 구조 조정을 저지하는 하반기 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민주노총 산하 금속산업연맹이 10월11일 쟁의 행위 찬반 투표를 거쳐 10월19∼21일 시한부 파업을 할 예정이고, 공공연맹과 사무금융연맹 또한 대규모 상경 투쟁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 김태연 기획국장의 말이다.

세 번째 변수는 민간 단체 내부의 분열 조짐이다. 최근 인권운동사랑방·천주교인권위원회·인권실천시민연대를 비롯해 민간포럼 인권 분과에 속한 13개 단체가 탈퇴를 선언했다. 이들은 △민간포럼의 재정을 지나치게 정부에 의존함으로써 민간 단체의 독립성을 상실한 점 △민간포럼 행사장으로 예정했던 봉은사(아셈 행사장 인근에 있다)에 대해 정부가 사용 불허 방침을 내리자 집행부가 별 저항 없이 이를 수용한 점 등을 이유로 꼽았다(인권 단체에 앞서 전농 또한 ‘아셈에 대한 인식의 불철저성’을 문제 삼아 민간포럼을 탈퇴했다).
민간 포럼은 한국·독일·덴마크·네덜란드 정부로부터 행사비 대부분(약 2억8천만원)을 지원받고 있다. 그러나 민간 단체의 위상을 높이고 일반 민중의 요구를 정부간 정상회담에 전달하는 것이 민간포럼의 역할이라면, 다양한 참가자를 초청하기 위해 정부 보조금을 받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며, 2년 전 아셈 회의 때는 영국 정부가 민간포럼 행사비를 전액 지원했다는 것이 국제협력위원회 양영미 간사의 반박이다. 포럼 개최 장소는 경찰이 뒤늦게 정한 ‘A구역’(출입 통제 구역)에 봉은사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기, 세계를 휩쓸고 있는 반세계화 운동의 성과는 아직 미약하다. 그렇다고 국제 기구가 이를 무시할 수만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창근 WTO국민행동 정책위원은 ‘아셈이야말로 남반부 민중이 중심이 된 최초의 대규모 투쟁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시애틀·워싱턴·프라하 시위가 북반부 시민단체 중심의 투쟁이었다면 아셈 시위는 남반부 노동자·농민이 중심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전지구적인 반세계화 운동에 괄목할 만한 진전을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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