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은 한국 현대사의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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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0.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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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들, 베트남 양민학살 진상규명 촉구… 현지 방문•성금 전달 등도 계획
‘베트남전을 바로 볼 수 있다면 한국 현대사를 재조명할 수 있다.’ 지난 3월11일부터 4월5일까지 베트남 중부 지역에서 베트남전 때 한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베트남 양민 학살 현장을 답사하고 돌아온 시민단체 ‘나와 우리’ 공동대표 김현아씨의 보고서 가운데 일부이다. 올해 초에 결성된 ‘베트남전 양민학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공동대표인 강정구 교수(동국대•사회학)도 같은 시각이다. ‘베트남전은 한국 현대사의 거울’이라는 것이다.1965년부터 1973년에 이르는 9년여 동안, 청룡•백마•맹호 부대 등 모두 31만2천8백53명이 참전했던 베트남전. 그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상반된다. ‘공산주의와 싸운 자유 세계의 성전’과 ‘베트남 인민의 민족해방 독립투쟁’이라는 인식. 전자가 박정희 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보수적 입장이라면, 후자는 진보적 진영의 시각이다. 한국군 또는 미군에 의한 베트남 양민 학살 문제는 후자에 의해 거론되고 있다.

“참전 한국군처럼 그들도 약자였다”

지난해 9월, 시사 주간지 <한겨레 21>에 의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베트남전 양민 학살은, 한국전쟁 때 미군이 이 땅에서 저지른 노근리 양민 학살 문제가 세계적 뉴스로 떠오르면서 증폭되기 시작했다. 노근리에서 비극을 당한 아버지 세대의 아들들이 베트남전에 파병되어 ‘원치 않은 가해자’가 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고엽제 후유증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고 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다시 피해자가 되는 악순환인 것이다.

‘나와 우리’ 김현아 대표는, 오늘날 한국의 경제 발전이 국민의 동의 없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강행된 베트남전 참전의 ‘열매’라고 말했다. 김대표는 “만일 우리가 베트남전 덕분에 이렇게 풍요를 누리고 있다면, 당시 희생된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사과와 배상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베트남인들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은, 베트남전 양민 학살 진상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뿌리 박혀 있는 군사 문화와 반인권, 그리고 반평화의 구조적 모순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종군 위안부와 노근리의 비극과 베트남전 양민 학살 사이에 끊을 수 없는 맥락이 있다고 강조하는 강정구 교수는 “가해자인 우리가 먼저 사죄할 수 있다면, 미국과 일본에 대해 노근리 문제와 종군 위안부 문제를 당당하게 따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사?인류사에 떳떳한 민족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다”라고 말했다.

보도에 따르면, 베트남 당국은, 아직 불확실한 통계라는 단서를 달면서 한국군에 집단 학살된 베트남 양민의 수가 5천여 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은 이보다 훨씬 많은 수가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베트남 피해자들은 베트남 정부에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김현아 대표가 베트남 중부 꾸앙응하이성 선띤현에서 만난 응웬 판 할아버지(73)는 1966년 음력 9월27일 마을에 쳐들어온 한국군에게 전가족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다. 그 부대가 바로 최근 언론을 통해 양민을 학살했다고 시인한 해병 중대장이 지휘한 부대였다고 김대표는 말했다. 늙고 병들어 경제 능력이 전혀 없는 응웬 판 할아버지는 베트남 정부로부터 아무런 보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참전 한국군이 그랬듯이, 베트남 피해자들도 거의 다 가난한 시골 사람들이었다”라고 김대표는 말했다.
종전 25주년을 앞두고, 베트남전 당시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예비역 장교가 언론을 통해 양민 학살을 시인함으로써, 양민 학살 문제는 새로운 차원을 맞고 있다.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시민단체가 현지를 방문하고, ‘나와 우리’는 현지 피해자들에게 매달 성금을 전달하기로 했다. 이들과 입장을 달리하는 ‘월남 참전 전우복지회’(회장 김문구)는 현지에 ‘민간인 희생자’를 위한 위령탑을 건립할 예정이다. 김회장은 “양민 학살은 없었다”라고 주장한다.

일부 참전 군인 출신과 정부 당국은 시민단체의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부정적이다. 국방부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부각한 언론사의 처지를 이해한다면서 “그러나 월남전이 전선이 없는 비정규전 형태로 전개되었다는 특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현지 주민의 일방적 주장만을 기사화하는 것은 사실 자체가 왜곡될 수 있다”라고 밝혔다. 국방부는 베트남 정부도 이 사건이 공론화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서, 노근리 ?고엽제 문제 등 한?미 간에 해결해야 할 사안에 대한 성숙한 접근이 필요할 때라고 덧붙였다. 가해자가 먼저 사죄해야 한다는 시민단체들과 정반대 쪽에 서 있는 것이다.

李文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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