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딸 통해 북한에 남한 식량 극비 반입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1997.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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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14개월 밀착 추적/작년 여름부터 신변 위험 느껴
황장엽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와 김덕홍 여광무역 총사장의 한국 망명 신청은 <시사저널>이 지난 1년2개월간 의문을 품고 추적해온 남북 관계에서 복잡한 실타래 중의 하나가 풀리는 사건이었다. 황비서가 <시사저널>의 안테나에 맨 처음 의문의 인물로 잡힌 때는 95년 12월 초순이었다.

당시 편집국에는 뜻밖의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황장엽의 딸이 한국 정부의 배려로 서울에 다니러 왔다’는 내용이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남북 관계에서 예사롭지 않은 일이 전개될 것이라고 판단한 취재진은 황비서의 딸을 초청한 국내 대북 사업가에게 연락해 그를 비밀리에 만났다.

당시 32세의 나이에 갸름한 얼굴을 한 황비서의 딸이 취재진에게 건넨 명함에는 중국 심양에 있는 명흥경무공사(明興經貿公司) 총경리 박명애(朴明愛)라고 적혀 있었다.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북한 황장엽 비서의 딸이냐고 했더니, 오래 전부터 황비서의 수양딸이 되어 한 달에 한두 번씩 평양에 가서 아버지를 만난다고 했다.

95년 12월 이후 수양딸 네 차례 단독 취재

이에 대한 의혹은 황장엽의 사인이 들어 있는 ‘아버지가 딸에게 보내는 당부’라는 제목의 친필 문건과 평양의 황비서 집에서 함께 찍은 가족 사진을 보고서 곧 풀렸다. 그는 자기가 한국을 방문한 사실이 알려지면 아버지가 큰일난다며 비밀을 지켜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취재진은 북한 주체사상의 창시자이자 권력 핵심에 자리한 황장엽 비서의 수양딸이 서울에 들어왔다는 사실, 그것도 한국 국민은 물론 북한 당국에 그의 방문 사실이 알려져서는 절대 안된다는 당부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사실상 한국 정부의 배려로 서울에 들어올 수 있었다는 표현을 썼기 때문에, 처음에는 황장엽 라인에서 들여보낸 남북한 막후 밀사가 아닌가 여기고 방한 목적을 물었다.

박씨는 당시 서울에 온 목적을 “북한의 심각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남한 민간 기업들의 지원과 남북 교역을 이끌어내려는 사업상 목적으로 들어왔다”라고 밝혔다. 그 일환으로 ㄷ 기업·ㅈ 제약회사·ㅌ 의류회사 등 몇몇 기업을 방문해 대북 지원과 교역을 호소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우성호 사건, 쌀회담 결렬 등 당시 남북한 간의 현안과 관련한 북한 지도부의 입장 등 중요 취재 정보를 얻을 목적으로 마주한 자리였던 만큼 그때까지의 대화 내용은 그리 만족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박씨는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 ‘이 사실을 절대 공개해서는 안된다’고 재차 당부하면서 깜짝 놀랄 만한 말을 꺼냈다. “이번에 서울에 오기 전에 아버지를 만났다. 그분은 주체사상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북한의 주체사상은 그분이 원래 창시한 사상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주체 철학의 변질을 안타까워하시는 아버지는 요즘 세계에 펼쳐 보이고자 하는 자기의 주체철학을 별도로 정리하고 있다. 이것이 언젠가는 빛을 볼 것이다. 틈틈이 쓰시는 내용을 내가 평양에 갈 때 조금씩 넘겨주신다.”

황장엽 비서의 수양딸이 비밀리에 서울을 처음 방문해 기자에게 전한 이 마지막 말은 이후 전개될 엄청난 사건을 암시하는 서막이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황비서의 북한내 위상과 주체사상 창시자인 그가 사상·학문적으로 고민한다고 의심할 만한 여지는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황비서의 수양딸과 헤어진 후 뒷날 남북 관계에 큰 사건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취재진은 그 방향을 가늠해 보기로 하고 이후 황장엽 비서의 해외 행적과 남북 관계의 막후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시사저널> ‘밀가루 북송 기사’ 파문과도 관련

그러나 한동안 별다른 사항은 감지되지 않았다. 황비서의 수양딸이 한국을 처음 방문해 <시사저널> 취재진을 만난 뒤 96년 7월께 두 번째로 서울에 왔다 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방문한 지 한참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런데 <시사저널> 취재진은 중국 심양에서 대북 지원 사업을 벌이는 그가 정체 불명의 한국 자금으로 북한에 식량을 여러 달 동안 계속 들여보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한국 정부가 정부 차원의 식량 지원은 물론 민간 차원의 북한 동포 돕기 운동마저 철저히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보가 사실이라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더구나 지난해 9월 잠수함 사건이 터진 이후의 국내 분위기에서는 굶주리는 북한 동포를 돕자는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사저널>은 지난해 11월 한국 정부 및 기업이 비밀리에 대북 밀가루 지원을 해온 것을 포착해 이른바 ‘밀가루 북송’ 기사를 보도하려다 청와대 등의 압력으로 이를 삭제하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11월에 <시사저널> 취재진은 황장엽 비서의 수양딸이 벌이는 활동과 관련된 의문을 풀어보고자 심양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뜻밖에도 명흥경무공사는 북경에 있는 여광무역회사 김덕홍 총사장 등과 협력해 대남 사업과 대북 식량 공급 역할을 맡고 있었다. 특히 황장엽 비서의 수양딸인 박씨는 사실상 요령성에서 북한으로 들어가는 대북 지원 물자의 수송을 도맡다시피 처리하고 있었다.

다음날 북한측 감시원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자리를 마련한 박명애씨는 북한의 참혹한 기아 실태와 아버지를 걱정하는 말을 2시간 가량 털어놓았다(31쪽 인터뷰 참조). 지난 10개월 동안 열두 차례 평양을 방문해 아버지 황장엽 비서를 만나고, 황비서가 꾸리고 있는 국제주체재단 평양사무소 앞으로 식량을 보냈다는 그는, 한국이 식량 지원을 계속 하지 않을 경우 ‘올 겨울을 못넘길 것’이라는 말로 아버지로부터 들은 북한내 식량 사정의 절박함을 전달했다.주체재단이 식량 반입 창구

이날 그는 한국 기업의 대북 지원과 관련해 한국의 ㅎ그룹 등 대기업, 종교 단체 등이 자기와 북경의 주체평화재단 사무소 등에 기금을 보내면 자기가 밀가루와 옷감·소금 등 생필품을 사서 평양에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박명애씨가 <시사저널> 취재진에게 제공한 수출증명서와 수출계약서 및 철도 송장 등 문건에 따르면 96년 4월부터 11월까지 한국측 자금으로 그가 평양에 보낸 물자의 내역은 밀가루 1백50만달러어치(5천t), 소금 50만달러어치(만t), 테트론(옷감) 25만달러어치(30만m) 등 총 2백25만달러어치에 달하는 것이었다(29쪽 아래 사진 참조).

그 이튿날 심양의 고려호텔 커피숍에서 다시 만난 박명애씨는 한국의 비밀 대북 지원에 대한 취재진의 집요한 질문 공세를 받고 망설이던 끝에 아버지 황장엽 비서와 자기가 북한에서 곤란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말문을 돌렸다. “내 이름 석자가 알려지면 절대 안되듯이, 아버지의 일과 상황이 알려져도 절대 안된다. 지금 나와 아버지는 한국에서는 무얼 어떻게 해도 두렵지 않으나 이북에서 어떻게 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만일 내가 아는 대로 얘기하면 아버지도 나도 끝장난다.”

박씨에 따르면, 96년 여름부터 아버지 황비서와 자기에게 감시가 부쩍 심해지고 있다고 했다. 몇 가지 곤란한 사정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우선 박씨의 경우 아버지를 도와 사업을 벌이면서 북한 당국이 모르게 두 차례 서울을 방문했는데 심양의 북한 영사관이 조사할 것이 있다며 자기를 불렀다는 것이다. 박씨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에 다녀온 사실을 알아챈 것으로 알고 깜짝 놀랐다. 다행히 서울의 언론 보도 내용에 대한 경위 조사였다. 내가 한국으로 들여보내는 조선 상품들과 관련해 영도자(김일성·김정일) 이름이 한국 신문에 마구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된 거냐는 추궁이었다. 내가 서울측 사업 파트너의 실수 때문인 것 같다고 해명하고 나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겠다는 담보서를 쓴 뒤에야 무마됐다.”

말하자면 박씨가 한국을 방문한 사실을 알고 있는 <시사저널> 취재진 때문에 만에 하나 북한 쪽이 이를 알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눈치였다. 절대 비밀을 지키겠다고 재차 약속하자 그는 아버지 황비서가 북한에서 최근 겪고 있는 곤경으로 이야기를 옮겼다.

“10월에 평양에 들어가 아버지를 만났더니 고민이 많으셨다. 지난 8월 아버지가 일본 학자들을 평양으로 초청해 세미나를 연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온 내용이 한국 신문들에 왜곡되게 실려 아버지가 곤경에 처했다고 한다. 비공개로 진행된 학술 세미나 자리에서 주체과학원의 한 학자가 ‘조선도 4자 회담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라는 식으로 말한 일이 있는데, 이 내용이 귀국한 한 일본 학자의 입을 통해 한국 언론에 ‘황장엽 비서가 4자 회담 수용을 검토하고 있다’라는 식으로 왜곡 보도됐기 때문이었다. 이 일로 아버지는 보위부가 뒷조사를 벌이고 있음을 감지하고 위험을 느끼고 있다고 말씀하셨다.”황장엽 “세계 학자들과 마음껏 토론하는 것이 소원”

그는 이어 아버지가 자기 학문의 뜻이 북에서 잘못 펼쳐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최대 소원은 한국을 포함한 세계 학자들과 흉금을 털어놓고 마음껏 학문을 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황장엽 비서가 북한에서 처해 있는 어려운 사연의 내막에는 더 깊이 들어갈 수 없었다. 박명애씨는 커피숍내 몇 자리 건너편에 앉아 있는 두 사내를 눈짓으로 가리키더니 목소리를 낮추라고 하며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기 두 사람은 나를 감시하러 붙은 조선 사람들이다.”

결국 이 자리에서는 박씨가 북한 당국의 인정 아래 북한 주민의 극심한 식량난 해결에 한국 민간 부문을 끌어들이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으나 당국의 인정보다는 아버지 황비서의 ‘뜻’을 좇고 있음이 확인된 셈이다. 나아가 북한 최고 지도부의 핵심 인물이라고 외부에 알려진 황장엽 비서는 북한당국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식량난 해결의 고민을 떠안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박씨는 <시사저널> 취재진에게 한국에 돌아가면 잠수함 사건으로 식어버린 동포애에 다시 불을 지피는 캠페인 기사를 써 달라고 거듭 호소했다. 어떤 식으로든 한국으로부터 식량을 지원받으려는 황비서에게 이렇게 고군분투하는 박씨는 고마운 딸이자 일꾼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북한 주민 대다수가 기아 선상에 내몰리는 상황에서 한국에서의 대북 비밀 지원, 그것도 기껏해야 연간 밀가루 만t도 넘지 못하는 지원은 식량 문제 해결에 노심초사한다는 황비서에게 갈증만 부채질할 것으로 보였다.

그날 밤 박명애씨는 요령 대학 총장을 지낸 펑위중(馮玉忠) 교수(64·경제학)를 대동하고 기자와 다시 만났다. 펑위중 교수는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을 현장에서 실천하는 교육자로 평가 받는 인물이다. 또 남북한 학계 지도층과 폭넓게 교류하고 있는 인물로서, 특히 황장엽 비서와는 학문적으로 스승이자 친구 사이로 서로 존경하며 깊은 우애를 맺고 있었다.

펑교수는 수 차례 황장엽 비서를 만나러 평양을 방문해 서로 학문적 교감을 나누고 그 지평을 넓혀 94년 이후 매년 한두 번씩 ‘비공식적인 남북 학술 교류’를 성사시키기도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황비서의 수양딸 박명애씨는 스승인 펑교수를 따라 통역으로, 또는 단독 메신저로 평양의 아버지 집을 오가기도 했던 것이다.

펑교수(당시에는 총장)가 남북 학자들의 교류를 주선할 수 있었던 것은, 북한 학계의 대부인 황장엽 비서와의 깊은 우애를 바탕으로 관심과 배려를 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록 황비서 자신은 정치 지도자라는 신분 때문에 직접 참석하지 못하고 자신의 왼팔 격인 진영걸 조선사회과학자협회 부위원장으로 하여금 주체과학원 및 김일성 대학 교수들을 이끌고 나가도록 했지만, 북한 실정에서는 이 정도도 황비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황비서 외의 다른 라인으로 추진한 남북 학술 교류가 거의 성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32쪽 기사 참조).

어쨌든 이날 밤 펑교수는 황비서와 학문·사상적으로 교감하고 있다는 남북 분단과 통일에 대한 견해에 대해 한마디로 ‘반도는 반드시 전쟁 없이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그는 이어 남북한을 각각 방문해 지도자와 백성들을 만나온 과정에서 느낀 점을 이렇게 말했다. “90년대 들어 한국에 아홉 번, 조선에 다섯 번 다녀왔는데 남북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부지런하고 용감하고 강건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차이점은 경제 격차가 너무 심하다 보니까 이에 따라 문화 차이도 크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학문적으로 존경하는 남쪽의 김준엽(고려대)·조영식(경희대) 전 총장, 북쪽의 황장엽 비서를 각각 만나면서 서로 평화적으로 도와 해결하기를 바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작년 12월 큰아들의 골동품 밀매 사건으로 곤욕

취재진은 황비서에 관해 더 묻고 싶었지만 박씨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술잔이 돌수록 시름 깊은 얼굴로 변하던 박씨는 해가 뜬 후 북한 땅에서 보게 될 굶주린 동포들과 수해로 인해 벼가 말라 비틀어진 들녘을 다시 볼 생각에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떠나기 전 그는 취재진이 요청한 앞서의 대북 지원 관련 서류 일체를 넘겨 주었다. 한국측이 돈을 대 자기가 북한으로 보낸 밀가루·옷감·소금 등과 관련한 서류였다.

이후 박명애씨의 동향과 황장엽 비서의 대외 일정에 주목하고 있던 취재진은 지난 12월 말에 박씨가 ‘마지막’으로 평양의 아버지를 만나고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북측 요원들에게 체크되므로 서울에서는 전화를 걸지 말라는 박씨의 부탁에 따라 대북 교역을 하는 한 기업인에게 박씨의 동향을 알아보아 달라고 해놓은 터였다.

이 기업인에 따르면, 박씨는 12월 말에 평양에 들어갔다 온 뒤, 황비서가 크게 곤욕을 치른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고 한다. 발단은 황비서의 큰아들 황경모씨가 북한의 국보급 골동품·고화 등을 박명애씨에게 보내 한국 업자에게 판 뒤 그 돈으로 식량을 구해 보냈는데 이 사실이 보위부에 발각되어 통치자인 김정일 비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골동품·고화들은 현재 서울 인사동 가게들이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김정일은 황비서를 직접 불러 나라의 보물들을 빼돌렸다고 대로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김정일의 매제(여동생 김경희의 남편) 장성택이 나서서 가까스로 수습했다고 한다. 장성택은 황장엽의 며느리(사건을 일으킨 황경모의 부인)의 삼촌이었기 때문에 황비서와는 사돈지간인 셈이다.

황비서와 그의 수양딸 박명애씨의 동태를 추적하면서 시시각각 다가드는 긴박한 낌새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중 1월29일자로, 황비서가 일본 주체평화재단이 개최하는 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북한을 떠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리고 13일 뒤 황비서는 그의 오른팔 격인 김덕홍 여광무역 총사장과 함께 북경 주재 한국영사부 건물로 들어가는 ‘역사적 드라마’를 연출해 냈다.

95년 12월 초순 서울을 몰래 방문한 황비서의 수양딸 박명애씨를 통해 들은 최초의 충격적 내용은 황비서의 한국 망명이라는 모습으로 귀결된 셈이다. 지난 1년2개월 간의 사건 전개 추이를 되돌아 볼 때 박명애씨 취재를 통해 감지한 내용 중 풀리지 않은 의문은, 북한 내에서 황비서가 곤란한 상황으로 몰릴수록 그에 비례해 식량난 해결을 위한 황비서 라인의 몸부림은 더 처절해졌다는 점이다. 이 의문을 풀어줄 열쇠는 망명 요청 이틀 후 황비서가 한국 영사부에서 쓴 자필 심경 진술서 중 특히 다음과 같은 구절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나만 미쳤겠는가 하는 것이다. 민족이 분열된 지 반 세기가 넘었는데 조국을 통일한다고 떠들면서도 서로 적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심지어 상대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떠들고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제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행동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한편 민족의 적지 않은 부분이 굶주리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서로 관심도 없이 시위만 벌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도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 문구는 고뇌와 갈등 속에서도 끝까지 안에 남아 변화를 시도하고자 했지만 민족 이성에 반하는 남북 양측의 태도가 그가 설 자리를 잃게 만들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한편 박명애씨는 아버지가 망명하기 이틀 전인 2월10일 북경에 있던 김덕홍 총사장으로부터 급히 피하라는 연락을 받고 안전지대로 피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시사저널>이 박씨와 관련한 그간의 취재 과정과 내용을 공개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가 이 사건 직전에 피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였다.

황비서의 부인 박승옥은 현재 모스크바 대학에 교환 교수로 나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에서는 황장엽 비서가 김정일의 고교 시절 가정 교사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수양딸 박명애씨에 따르면 실은 황의 부인 박승옥 교수가 제왕학을 지도한 가정 교사였다고 한다. 그 밖에 황비서의 자녀(2남1녀)들은 북한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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