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관계, 미사일에 달렸다
  • 워싱턴·卞昌燮 편집위원 ()
  • 승인 2000.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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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관계 최대 걸림돌…미국, 콸라룸푸르 회담 앞두고 ‘당근’ 고르기 골몰
지난해 8월 중순께 미국의 CNN 특파원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그 기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측근인 김용순 노동당 비서를 만나 북한의 미사일 문제를 꺼냈다. 그러자 김용순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방문객이 우릴 찾아와 떡을 내놓으면 우리도 떡을 대접하겠지만, 칼을 들고 오면 우리도 칼로 대응할 것이다”라고. 여기서 ‘방문객’이란 미국을 가리킨 말이었다. 김용순은 미국이 최대 골칫거리로 보는 미사일 문제와 관련해 북한의 대응 해법을 넌지시 시사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 이를 확인이라도 하듯, 북·미 협상이 벌어지던 독일 베를린으로부터 낭보가 날아왔다. 북한이 미국의 경제 제재 해제에 발맞추어 장거리 탄도 미사일 실험을 유보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물론 북한은 단서를 달았다. 북·미 관계 개선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미사일 실험을 잠정 중단하겠다는 것이었다. 비록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 유예 선언을 놓고 당시 지배적인 해석은 북한이 ‘채찍’보다 ‘당근’에 더 민감하며, 대가를 전제로 한 해결 방식에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최근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 관계에 획기적인 변화가 예상되면서 북·미 관계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많은 사람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북·미 관계 진전에 핵심 열쇠가 될 미사일 문제 해법을 놓고 당사자인 미국은 물론 남한이나 일본 등 이해 관련국 모두가 골몰하고 있는 실정이다.

테러국 지정 해제할까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사태 진전은, 미국과 북한이 오는 7월10일부터 12일까지 사흘간 말레이시아 수도 콸라룸푸르에서 미사일 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것이다. 북한과 미국은 1996년 이후 모두 네 차례 회담했지만 별 진전이 없었다. 따라서 근 15개월 만에 재개되는 이번 회담에서 미국이 과연 돌파구용으로 어떤 선물을 내놓을지 벌써부터 관심이 쏠리고 있다.

클린턴 행정부는 앞으로 북·미 관계 진전과 관련해 일종의 ‘로드 맵‘(도로 지도)을 갖고 있다. 그 로드맵이란, 지난해 9월 중순 윌리엄 페리 북한정책조정관이 제시한 권고안이다. 이에 따르면,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완전 중단할 경우 미국은 외교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북한 핵 문제의 경우 제네바 기본합의문을 통해 사실상 해법이 나와 있다. 게다가 핵시설이 있다는 의심을 받아온 북한 금창리 지하 땅굴에 대해 두 차례 현장 조사를 마쳐 의혹이 가신 상태다. 문제는 미사일이다. 북한은 현재 미사일 발사 실험을 유예한 상태이므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재개할 수 있다. 따라서 클린턴 행정부가 당면한 골칫거리는 바로 이 미사일 문제다. 특히 북한의 미사일은 클린턴 행정부가 약 6백억 달러를 들여 추진하려는 국가미사일방어(NMD) 계획과도 함수 관계이다. 미국은 이 계획을 추진하려는 명분을 북한 같은 ‘불량국’의 탄도 미사일 위협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페리 조정관이 제시한 북한 미사일 해법은 명확하다. 1단계로 북·미 관계 개선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 실험을 자제하고, 미국은 그 대가로 대통령의 행정 명령으로 풀 수 있는 북한에 대한 제재를 풀라는 것이다. 현재 이 1단계는 착착 실행되고 있다. 북한이 지난해 9월 미사일 실험 유보 선언을 한 것과 때를 같이해 미국은 일부 경제 제재 해제를 단행했으며, 최근 북한이 실험 유보를 거듭 천명하자 미국은 또다시 대폭적인 제재 해제를 단행했다. 문제는 페리 조정관이 제시한 2단계 과제인데, 이는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이 주도해 만든 미사일기술통제협정(MTCR)에 규정된 미사일 제한 규정을 준수하도록 하는 것이다. 북한이 이 협정에 가입하면 사정거리 480㎞가 넘는 미사일 개발이나 생산·실험이 원천적으로 금지된다. 나아가 페리는 북한이 미사일 부품과 제조 기술을 해외에 수출할 수 없도록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바로 이 2단계를 어떻게 실천해 가느냐와 북·미 관계의 진척 순서가 맞물려 있다고 보면 된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미사일 판매를 중단하는 조건으로 ‘현금 보상’을 거론하고 있으나, 이런 구상을 실천에 옮기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 미사일 수출을 외화 획득의 주요 원천으로 삼고 있는 북한은 한때 미국에 미사일 수출 중단 조건으로 10억 달러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리 조정관은 이런 식의 현금 보상은 오히려 북한의 협박을 더욱 부추길 우려가 있으며, 미국 연방의회가 승인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브루킹스 연구소 마이클 오한론 박사는 “북한에 현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미사일 개발을 중단케 하는 방식은 곤란하지만,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려면 미국이 북한에 요구하는 그만큼 보상책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페리 권고안을 꼼꼼히 살펴보면 핵심 대목이 한 구절 보인다. 북한 핵·미사일 해법과 관련해 미국은 ‘점진적이고 호혜적인 방식(step-by-step and reciprocal fashion)’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호혜적인 방식’이라는 문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곧 북한 미사일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려면 호혜적 차원의 ‘주고받기’가 필요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앞서 북한 노동당 김용순 비서가 언급한 ‘떡과 칼’ 얘기도 결국은 페리가 제시한 호혜주의 방식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수교 먼저 해야 미사일 돌파구 열린다”

호혜주의 방식과 관련해 클린턴 행정부가 가지고 있는 협상 지렛대는 북한에 대한 테러국 지정 해제권이다. 경제 제재가 풀려도 테러국 명단에 묶여 있는 한 북한은 경제 재건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국제 사회로부터 조달할 길이 막막하다. 미국 국무부는 지난 5월 초 연례 테러국 명단을 발표하면서 북한을 계속 잔류시켰다. 당시 국무부가 내세운 이유는 북한이 1970년대 초 일본 요도호 항공기 납치범들을 북한에 숨겨준 것이 국가 테러 조장 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이들 납치범을 국외로 추방하는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미국이 과연 테러국 지정에서 북한을 해제하겠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이 많은 것 같다. 여기에는 북한에 대해 구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협상 지렛대를 미국이 쉽사리 포기하겠느냐는 시각이 깔려 있다.

또 하나 호혜주의 방식과 관련한 흥미로운 실화가 있다. 1992년 이스라엘은 북한의 운산 부근 금광을 약 10억 달러에 매입하겠다고 제안했고, 북한은 그 대가로 시리아와 이란 등에 미사일을 수출하는 것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10억 달러짜리 극비 거래는 1993년 3월 뒤늦게 사태 전말을 눈치챈 미국이 개입해 좌절되었다. 이해 4월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미국의 특별 핵사찰 요구에 불만을 품고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 MIT 안보연구소의 군축 전문가인 데이비드 라이트 박사는 “북한과 이스라엘 간의 거래 행태를 보면 북한이 최소한 해외에 미사일 판매를 중단하는 문제에 만큼은 협상 여지를 남겨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라이트 박사는 따라서 “미국이 정치적으로는 관계 개선 카드를, 경제적으로는 경제 제재를 완전히 풀어 북한이 미사일 개발을 제한할 수 있게끔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경제적 보상만 가지고는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뉴욕 타임스> 한반도 담당 논설위원을 지냈고 현재는 뉴욕 소재 사회과학원(SSRC)의 동북아실 책임자인 레온 시걸 박사는 “북한이 결국 미사일 거래와 관련해 주된 관심을 갖는 것은 미국과의 정치적 관계를 증진하는 일이다”라고 단언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북한이 ‘북침 훈련’이라고 규정한 한·미 합동 군사훈련 완전 중단과 평화조약 체결, 궁극적으로는 대사급 수교를 미국이 받아들여야 미사일 문제에 극적 돌파구가 열릴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만큼 현시점에서 장거리 탄도 미사일 개발 문제는 북한에게 체제 보장의 ‘안전판’ 구실을 하고 있다는 반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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