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자금 시한폭탄 폭발한다
  • 文正宇·李叔伊 기자 ()
  • 승인 1997.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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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이회창 양면 공격…YS 막다른 길에
대선 자금은 김영삼 정부의 원죄다. 김대통령이 지난 4년 동안 입에 달고 살다시피 한 개혁과 변화라는 정책 목표는 번번이 이 원죄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구시대와 결별하려는 김대통령의 노력은 언제나 이 원초적 제약 때문에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김대통령은 취임 뒤 곧바로 여당을 쇄신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첫걸음은 여당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구 민정·공화계 당직자들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간직하고 있던 대선 자금 자료를 무기로 삼아 저항하는 바람에 그들에게 각각 수천만원씩 위로금을 대가로 지급해야 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대선 자금 자료는 자민련과 국민회의에 흘러들어가 지금도 김대통령의 목을 죄고 있다.

여권의 부패한 고위 인사들에 대한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김대통령은 끊임없이 이들 구 여권 인사들이 대선 자금과 관련해 폭탄 선언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한편 자신을 도와준 인사들을 배신했다는 공격을 받아야 했다. 95년 10월께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불거졌을 때 김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구속이라는 초강수를 두었지만, 정작 본인도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거액을 지원받지 않았는가 하는 의혹에 휘말려 큰 상처를 입었다.

석달째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한보 태풍도 따지고 보면 출발점은 김대통령의 대선 자금이다. 김대통령이 한보로부터 선거 자금을 거액 지원받았기 때문에 계속 한보에 끌려들어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한보 특위 청문회를 통해 제기된 근본적인 의혹이다. 김현철 비극의 씨앗도 이미 김대통령이 대선 자금을 끌어들일 때부터 뿌려졌다는 것이 정가의 정설이다.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에 개혁 의지로 똘똘 뭉쳤던 현철씨팀이 변질하기 시작한 것은 각종 이권 사업을 추진하면서 대선 때 도와준 사람들을 봐주면서부터였다. 현철씨팀은 이들과 얽히면서 부패해 갔다.

김대통령은 그동안 이 원죄를 벗어버릴 기회를 항상 엿보았다. 본래는 95년 말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마무리될 즈음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노씨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고 실토했을 때 김대통령도 적당한 수위에서 고백할 것을 검토했었다. 당시 미국을 방문한 김대통령에게 일부 여권 인사들이 이번 기회에 대선 자금 문제를 완전히 털고 가자고 건의했던 것이다. 그런데 귀국해 보니 강삼재 총장을 비롯한 민주계가 ‘20억+α’설로 DJ를 맹공하고 있어서 김대통령은 자기 고백을 단념했다고 한다. 야권이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문제가 커질까 염려한 까닭이다.
김대통령은 지난 연두 기자회견 때도 대선 자금 문제를 언급하려고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주변에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느냐고 만류해 또다시 보류했다고 한다. 그러다 얼마전 다시 청와대가 대선 자금 공개를 검토한다는 얘기가 언론에 흘러나왔다. 청와대 한 수석이 한보와 김현철 정국을 마지막 수습하는 방안으로 대선 자금 공개를 건의하는 보고서를 올렸는데, 그것이 중간에 언론에 유출된 것이다. 청와대는 현철씨 구속에 즈음해 담화문 형식으로 대선 자금 문제까지 공세적으로 정리하고 넘어갈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보 정국을 마무리하고 국면을 전환함으로써 대선 정국에서 유리한 입지를 선점하려는 일종의 정면 돌파 전략이었던 셈이다.

YS, 공개 기회 수차례 놓치고 결국 궁지 몰려

그러나 이번에도 김대통령은 선수를 뻬앗기고 말았다. 국민회의가 92년 대선 당시 민자당 경리실 차장이었던 김재덕씨가 김대통령의 공조직 대선 경비만 3천1백27억원에 이른다고 실토했다고 먼저 치고 나왔기 때문이다. 김대통령은 자신이 주도해 대선 자금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갈 기회를 상실한 것이다.

김대통령의 대선 자금 문제에 대해 가장 단호한 입장을 보이고 있는 여야의 대표 주자는 국민회의 김총재와 신한국당 이대표이다. 두 사람 진영의 참모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할 때 공통적으로 튀어나오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승부수’이다. 두 사람이 앞으로 전개될 대선 자금 정국을 대선 고지에 오르기 위한 중요한 승부처로 보고 있다는 얘기이다.

김대통령의 대선 자금에 대한 국민회의의 공세는, 김총재가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고 실토한 뒤 여당의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 각종 설을 마구잡이로 유포하던 때에 비해 오히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 않다. 김총재 진영에서는 ‘끝장을 보겠다’‘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말들이 거침없이 흘러나온다. 국민회의 설 훈 부대변인은 “대통령의 하야는 헌정 중단이 아니다. 총리가 대신하면 된다”라며, 경우에 따라서는 공세의 수위를 한껏 높일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국민회의 김총재가 공세를 강화한 근본적인 이유는 이번 기회에 여당 후보의 돈줄을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김총재 진영은 비슷한 조건이라면 지금 당장 선거를 치르더라도 낙승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여당의 돈줄을 졸라매지 못하면 선거는 해보나 마나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금권 선거의 폐해를 환기해 다시는 여당 후보가 돈을 물쓰듯 할 수 없도록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김총재의 한 측근은, 권노갑 의원이 구속되는 수모를 겪으면서까지 내놓지 않고 때만 기다려왔던 비장의 카드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김대통령의 당선 전후 거액의 정치 자금을 상납하고 고속 성장한 한 재벌 그룹을 비롯해, 김대통령에게 대선 자금을 제공하고 온갖 혜택을 누린 기업들의 비리가 속속 밝혀질 테니 지켜보라고 덧붙인다. 다시는 기업들이 정치에 개입해 장난을 치지 못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DJ 공격 목표는 YS 탈당·중립내각 구성

김총재 진영은 적어도 이 문제를 김대통령이 탈당하고 중립 내각을 구성할 때까지 밀어붙이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김대통령이 주도해 여당의 대권 구도가 일사불란하게 정리되는 것을 막아 여당의 혼란을 부추기겠다는 의도이다. 그래야 튀어나올 사람도 튀어나오고 분위기가 어수선해져 정국 주도권이 DJ에게로 넘어오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다만 김총재 본인이 쓴 대선 자금에 대한 여권과 민주당의 역공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민주당 이기택 총재는 김총재가 지난 대선 때 중앙선관위에 신고한 액수의 3배인 6백억원 정도를 썼다고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김총재측은 대선 자금 공세가 신한국당 이대표가 당내 입지를 굳히는 역효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한다.

김총재측이 요즘 김대통령을 대하는 자세는 지난달 김대통령에게 경제난 극복을 위한 영수회담을 제의했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김총재는 당시 여야가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며 유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었다. 그는 김현철씨에 대한 비난 수위도 낮춰, 그와 김대통령 사이에 밀약이 있지 않느냐는 의혹도 샀다. 당시 국민회의 관계자들은 정치 현안은 제쳐두고 경제 공부에만 몰두했었다.
그 때문에 DJ가 갑자기 김대통령에 대한 공세의 고삐를 죄는 데는 또 다른 사정이 있지 않느냐는 분석도 나온다. 정가에서는 여권이 황장엽씨가 언론에 본격 등장할 시기에 맞춰 다시 한번 김총재에게 색깔 공세를 퍼부을 것이라는 얘기가 흘러다닌다. 실제로 김총재 진영에서는 ‘YS가 살려 달라고 손을 내밀 줄 알았더니 오히려 우리를 치려한다’며 김총재측이 여권의 수상쩍은 움직임을 포착했음을 암시한다. DJ의 대선 자금 공세에서는 감정까지 묻어난다.

양김의 전쟁이 다시 불붙은 데다 여권의 2인자인 이회창 대표마저 김총재에게 맞장구를 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정국은 더욱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다. 물론 이대표는 여당뿐만 아니라 야당의 대선 자금도 공개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청와대측의 난감해 하는 분위기와 당내 민주계의 반발 기류에도 불구하고 대선 자금을 공개해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대표의 첫째 표적은 야당의 대선 자금이 아니라 김대통령의 대선 자금이라는 얘기이다.

그동안 음모론을 주장해온 일부 민주계 인사들은 이대표의 움직임을 김대통령과 민주계의 마지막 탈출구를 봉쇄하려는 시도로 본다. 한보 사태의 와중에서 김대통령과 민주계에 압박을 가해 여당 대표 자리를 차지한 그가 대선 자금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해 김대통령과 민주계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이홍구·이수성 고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민주계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차단하려는 승부수라는 분석도 있다.

이대표 진영의 한 인사는, 이대표의 대선 자금 발언을 너무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아 달라고 주문한다. <중앙일보>와 문화방송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질문이 나와 답변했을 뿐이고, 나중에 당에서 논란이 되었기에 같은 수준의 얘기를 반복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대표의 대선 자금 발언이 우연히 나왔다고 보기는 힘들다. 토론회가 열리기 이전에 이미 대선 자금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에, 이대표 진영에서는 대선 자금에 관한 질문이 나올 것에 대비해 발언 수위를 면밀히 검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대표의 한 측근은 ‘일부 민주계가 말하듯 마치 군사작전을 전개하는 것처럼 치밀하게 계획된 대로 행동하는 것은 절대 아니며 그만한 능력도 없지만,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면밀히 계산해 움직이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한다. 음모론 시각에서 보든, 이대표 진영이 설명하는 대로 보든, 그만큼 대선 자금 발언에는 이대표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는 얘기이다.

이대표, 김심 압박·민주계 견제 이중 포석

이 측근은 김대통령이 이대표를 여당의 대표로 발탁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대선 자금 문제를 계속 들먹여 김대통령에게 압박을 가해 이대표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가겠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이대표 진영은 대선 자금 문제로 힘이 빠지고 궁지에 몰린 김대통령이 다른 생각을 품을 새 없이 일찌감치 여당 후보를 띄우는 쪽으로 방향을 잡도록 유도하려는 것이다.

김대통령이 지난 대선 때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지금까지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적어도 5천억 이상은 썼다는 것이 정가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한보와 현철씨 문제로 김대통령에 대한 신뢰도가 땅에 떨어진 지금, 과연 YS는 신고 액수와 너무나 다른 엄청난 규모의 대선 자금에 대해 어떻게 국민에게 양해를 구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인가. 그가 신고액보다 많은 액수를 썼다고 시인할 경우 재임 기간에는 공소 시효가 정지된다는 해석을 적용하면 임기 뒤 사법 처리 대상이 된다는 견해도 있다.

김대통령은 그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높을 때 진솔하게 대선 자금 문제를 해명하고 사과할 기회를 놓쳐 끝내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말았다. 국민회의 김총재는 차기 정권 창출 문제에 대해 김대통령이 완전히 손을 떼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압박하고 있고, 이대표는 자신의 손을 들어주는 것만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김대통령이 다른 길을 찾을 경우 정국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대선 자금이라는 시한 폭탄의 초침이 마지막 순간을 향해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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