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회장' 후계자, 정몽구냐 정몽헌이냐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7.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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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창립 50돌 계기로 ‘차기 대권론’ 무성… 정몽구 회장·정몽헌 부회장 ‘난형난제’
올해 초 현대그룹을 아연 긴장케 했던 논문이 있다. 바로 미국 MIT 대학 프랭크 설러웨이 박사가 쓴 ‘장남이 기업 경영에 맞지 않는 까닭’이란 논문이다. 지난 2월21일 <뉴욕 타임스>에 처음으로 소개된 이 논문의 주된 내용은, 장남은 보수적이며 권위주의적 성향을 띠지만 차남은 유연하고 창조적이며 남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고 모험심이 많아 오늘날 기업 경영에는 장남보다 차남이 더 맞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정주영 명예회장이 <뉴욕 타임스>를 인용한 국내 한 신문을 통해 이 논문에 관심을 가지면서 일어났다. 물론 이는 가업을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할 대기업 총수의 처지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이 이 논문을 입수해 보고서를 만들자 그룹 분위기가 돌변했다고 한다. 그가 자신의 사후 후계자로 2남이지만 사실상의 장남인 정몽구 그룹 회장이 아닌 다른 형제를 고려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대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이 왜 설러웨이 박사의 논문을 분석한 보고서를 만들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이 연구원이 정명예회장의 정보 취득원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보고서가 그의 지시에 의해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그룹 관계자들의 견해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그가 현대그룹을 정몽구 그룹 회장보다는 5남인 정몽헌 그룹 부회장에게 맡길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미국 학자의 논문이 논란 불 당겨

이 보고서로 인해 그룹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정명예회장은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그는 보고서를 작성한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을 질책하는 한편, 2월 말에 이름 가운데 몽(夢)자를 쓰는 아들과 조카 들을 경주 현대호텔로 불러서‘몽구를 중심으로 단합하라’고 역설했다고 한다. 이로써 외국 학자의 논문으로 말미암은 정주영 사후 후계 체제에 대한 그룹내 논란은 일단 수그러들었다.

현대그룹 문화실 이영일 전무는 정명예회장이 설러웨이 박사의 논문에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내홍’을 겪은 적은 없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재계 일부 관측통들은 정명예회장이 그 논문에 흥미를 느꼈다는 것부터가 후계 체제를 아직 확정하지 않았다는 세간의 의구심을 반증하는 대목이라고 말한다. 의구심의 핵심은 정명예회장 사후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부회장 두 사람 중에서 누가 현대그룹을 맡을 것인가로 요약된다.
그러나 현대그룹의 중·하위 직원들 사이에는 정몽헌 부회장이 정명예회장을 움직여 이 인사를 주도했다는 해석이 강했다. 결과적으로 틀렸다고 밝혀지기는 했지만, 이같은 해석은 현대그룹의 후계 구도에 대한 그룹내 민심의 한 단면을 읽게 해준다. 다시 말해서 현대그룹의 많은 직원들은 정부회장을 현 직책 이상의 중요한 인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정명예회장 사후 후계 구도와 관련해 정부회장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그룹 밖보다는 안에서 더욱 높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룹내 많은 직원들로 하여금 정몽헌 부회장을 중요한 인물로 여기게 만드는가. 무엇보다도 그가 ‘몽’자 항렬 형제들 중에서 경영 능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건설과 토목으로 상징되는 현대그룹에서 낯선 전자 분야를 맡은 후 반도체 사업에 도전해 과감한 결단과 수완으로 삼성전자와의 10년 격차를 거의 줄인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그의 공적이다.

집안 화목이냐, 경영 능력이냐

정부회장의 이같은 경영 능력에 대한 평판을 바탕으로 한 이른바‘정몽헌 대망론’은 그가 맡고 있는 계열사들의 면모에서 뒷받침된다는 것이 한 현대그룹 관계자의 지적이다. 실제로 정부회장은 정몽구 회장이 직접 관할하는 현대정공·현대강관·현대산업개발 등과 달리 알짜배기라고 할 수 있는 현대건설·현대전자산업·현대상선 등을 경영하고 있다(아래 표 참조). 그만큼 정명예회장이 정몽헌 부회장을 깊이 신뢰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정몽구 회장 체제가 정명예회장 사후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무엇보다도 정회장은 2세 경영인이면서도 현대정공을 세워서 세계 굴지의 컨테이너 제조업체로 일구어내는 등 창업자의 길을 걸으면서 나름으로 뛰어난 경영 성과를 쌓아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가 현대정공과 함께 70년대 중반 직접 설립한 현대자동차써비스는 지난해 매출액 5조8천억원이 넘는 중견 기업으로 성장했다.

최근 들어 정몽구 회장에 대한 각종 평가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점도 정명예회장 사후의 후계 구도와 관련해 그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는 요즘 국제적으로 급변하는 기업 환경에 대해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한다고 한다. 그는 올해 들어 사장단 회의를 주재할 때마다 수준 높은 질문을 던져 참석자들을 긴장시킨다는 것이 한 그룹 관계자의 전언이다.

그럼에도 현대그룹 내에는 정몽헌 부회장의 경영 능력을 다소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영일 전무는 “정몽구 회장이 경영 능력이 다소 모자란다면 형제들이 도와주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그는‘경영 능력이 그룹 회장을 결정하는 유일한 잣대일 수 없다’면서, 정몽구 회장 체제가 지속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로 정명예회장 일가의 엄한 가부장제 전통을 들었다.

실제로 ‘몽’자 항렬 형제의 일원으로 현대그룹의 한 중견 계열사를 맡고 있는 인사도 이전무의 지적에 동의한다. 한마디로 가풍이 너무 엄해 동생이 형을‘넘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형제 모임에서 군기반장은 항상 정의원이 맡는데, 어릴 적에 정의원은 야구 방망이로‘줄빳다’를 치면서 군기를 잡았다고 그는 기억한다.

그러나 이 논리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종합기획조정실의 한 중간 간부는 이를 인정하면서 “조선 시대에도 차남이 뛰어나면 세자로 발탁되었는데 오늘날 기업에서 가부장제 전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장남이 경영권을 맡는다는 것은 사실 납득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정명예회장은 3월 들어‘의미 심장한’인사를 극비리에 단행했다. 지난해 20조원이 넘는 매출액을 기록해 삼성물산에 이어 국내 랭킹 2위를 차지한 현대종합상사(사장 박세용)를 정몽헌 부회장에게 맡긴 것이다. 당시 정몽구 회장으로서는 정명예회장이 막강한 정보력을 자랑하는 종합상사를 정부회장에게 맡겼다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으리라는 관측이 많았다.

종합상사가 정몽헌 부회장의 친정 체제에 편입되면서 정몽구 회장으로서 신경 쓰이는 부분은 역시 인맥이다. 그룹 경영을 총괄하는 종합기획조정실장 겸 종합상사 사장인 박세용 사장이‘정몽헌 사람’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 앞서의 종합기획조정실 관계자의 분석이다. 사실 박사장은 정몽헌 부회장이 관할하고 있는 현대상선 사장도 맡아 오면서 이미 정몽헌 사람으로 분류되어 왔다. 또한 이내흔 현대건설 사장도‘정명예회장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바로 직속 상사인 정몽헌 부회장과 가까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정몽구 회장에 대한 각종 평가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점도 정명예회장 사후의 후계 구도와 관련해 그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는 요즘 국제적으로 급변하는 기업 환경에 대해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한다고 한다. 그는 올해 들어 사장단 회의를 주재할 때마다 수준 높은 질문을 던져 참석자들을 긴장시킨다는 것이 한 그룹 관계자의 전언이다.

그럼에도 현대그룹 내에는 정몽헌 부회장의 경영 능력을 다소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영일 전무는 “정몽구 회장이 경영 능력이 다소 모자란다면 형제들이 도와주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그는‘경영 능력이 그룹 회장을 결정하는 유일한 잣대일 수 없다’면서, 정몽구 회장 체제가 지속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로 정명예회장 일가의 엄한 가부장제 전통을 들었다.

실제로 ‘몽’자 항렬 형제의 일원으로 현대그룹의 한 중견 계열사를 맡고 있는 인사도 이전무의 지적에 동의한다. 한마디로 가풍이 너무 엄해 동생이 형을‘넘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형제 모임에서 군기반장은 항상 정의원이 맡는데, 어릴 적에 정의원은 야구 방망이로‘줄빳다’를 치면서 군기를 잡았다고 그는 기억한다.

그러나 이 논리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종합기획조정실의 한 중간 간부는 이를 인정하면서 “조선 시대에도 차남이 뛰어나면 세자로 발탁되었는데 오늘날 기업에서 가부장제 전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장남이 경영권을 맡는다는 것은 사실 납득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정명예회장은 3월 들어‘의미 심장한’인사를 극비리에 단행했다. 지난해 20조원이 넘는 매출액을 기록해 삼성물산에 이어 국내 랭킹 2위를 차지한 현대종합상사(사장 박세용)를 정몽헌 부회장에게 맡긴 것이다. 당시 정몽구 회장으로서는 정명예회장이 막강한 정보력을 자랑하는 종합상사를 정부회장에게 맡겼다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으리라는 관측이 많았다.

종합상사가 정몽헌 부회장의 친정 체제에 편입되면서 정몽구 회장으로서 신경 쓰이는 부분은 역시 인맥이다. 그룹 경영을 총괄하는 종합기획조정실장 겸 종합상사 사장인 박세용 사장이‘정몽헌 사람’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 앞서의 종합기획조정실 관계자의 분석이다. 사실 박사장은 정몽헌 부회장이 관할하고 있는 현대상선 사장도 맡아 오면서 이미 정몽헌 사람으로 분류되어 왔다. 또한 이내흔 현대건설 사장도‘정명예회장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바로 직속 상사인 정몽헌 부회장과 가까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형제들이 소그룹 맡아 ‘분할 경영’할 가능성도

반면 정몽구 회장의 인맥은 그룹 내에 경복고 동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 인맥은 주로 정몽구 회장이 맡고 있는 현대정공·인천제철·현대산업개발에 포진해 있다. 경복고 출신으로 정몽구 회장과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대표적 인물들로는 유기철 현대정공 부회장, 노관호 인천제철 사장, 오영권 현대자동차써비스 부사장, 유인균 현대산업개발 사장, 이계안 종합기획조정실 전무 그리고 지금은 그만 둔 임평규 전 현대강관 사장 등이 꼽힌다.

정몽구 회장은 인맥에 의한 조직 기반 측면에서 정몽헌 부회장에 비해 불리한 형세이다. 이는 정몽헌 인맥으로 분류되거나 그와 가까운 인사들이 현대그룹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7인 운영위원회’(주재는 정몽구 회장이 하고 위원으로는 정몽헌 부회장, 정몽규 자동차 회장, 박세용 종합기획조정실장, 이내흔 건설 사장, 김정국 중공업 사장, 이익치 증권 사장)에 정부회장을 포함해 3명이나 들어 있다는 점에서 엿보인다.

현대그룹 일각에서는 정몽구 회장이 취임하면서 고로 방식의 일관제철 사업 추진에 총력을 기울여 온 것은, 조직 기반에서 정몽헌 부회장에게 밀리게 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한 차원이라는 분석도 제기되었다. 다시 말해 이영일 전무의 지적처럼 일관제철 사업은 정명예회장의 숙원 사업이므로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뒤 이 사업을 궤도에 올려 놓게 되면 정몽구 회장으로서는 자신의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정몽구 회장의 일관제철 사업에 대한 집착은 현대그룹이 한보가 부도나기 훨씬 전부터 한보철강 인수를 극비리에 추진해 왔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는 점에서 엿보인다. 4월 초순 정몽구 회장의 측근으로 현대그룹 계열사 사장을 지낸 ㅇ씨는 금융권 인사를 만나 현대그룹이 작년부터 한보철강을 인수하려는 극비 작업을 벌여왔다고 밝히면서, 한보철강이 인수되면 초대 사장은 자신이 될 것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정명예회장이 자신의 사후 후계 구도와 관련해 정몽구 회장의 불도저식 돌파력과 집안의 화목을 중요시할 것인지 아니면 정몽헌 부회장의 경영 능력을 우선할지 속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후계 구도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정몽구 회장이 그룹 회장을 계속 맡되 정몽헌 부회장 등 형제들이 각각 소그룹을 이끄는 형태로 후계 구도가 정해질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요즘 들어서는 힘을 얻고 있다.

문화실 이영일 전무도 정명예회장은 삼성처럼 그룹을 분리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다면서, 우리나라 기업들도 결국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는 쪽으로 간다고 보면‘소그룹 책임 경영제’가 가장 설득력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동안 꾸준히 거론되던, 현대자동차의 발전에 가장 공이 큰 정세영 전 그룹 회장 일가로 자동차를 분리할 가능성이 실현되기 힘든 까닭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요즘 재계에 나타나고 있는 흐름은 자못 흥미롭다. 바로 작년 말 한라그룹 정인영 회장이 차남 정몽원씨를 그룹 회장으로 발탁한 데 이어 최근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도 후계자로 차남 동빈씨를 내정함으로써 재계에 바야흐로 ‘차남 전성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그룹의 경우에서 보듯 현대그룹의 후계 구도도 결국 왕(王) 회장이라고 불리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의중, 이른바‘왕심’에 따라 결정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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