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재벌의 '기아 빼앗기' 혈투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7.08.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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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주식 집중 매집해 23% 점유, 삼성과 ‘쟁탈전’ 치열…LG·대우까지 가세해 ‘혼전’
케냐의 사파리 공원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약육강식의 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부도 위기를 맞은 기아그룹의 기아자동차를 인수하려는 삼성·현대·대우·LG 4대 재벌의 대회전을 일컫는 것이다. 이들의 승부가 <동물의 왕국>을 연상케 할 정도로 처절하게 비치는 까닭은 누가 승리하느냐에 따라 재계 판도가 뒤바뀌기 때문이다.

물론 기아그룹의 부도 위기가 곧바로 계열사 매각으로 이어질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정부와 채권단이 기아그룹에게 자구 노력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 경우 엄청난 비판 여론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서 말한 4대 재벌이 기아자동차를 인수할 가능성은, 정부와 채권단이 기아그룹 경영진의 자구 노력을 어느 정도까지 뒷받침하느냐에 달려 있다.
기아 차지하면 ‘재계 지존’ 된다

그런데도 기아자동차는‘호랑이’ 1마리와 ‘사자’2마리에 이미 포위되기 시작했다. 혼자서 사냥하는 호랑이처럼 가장 먼저 기아자동차 사냥에 나선 재벌은 삼성이다. 삼성으로서는 기아자동차를 인수하지 않고는 국내 시장을 정복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다. 최근 현대와 대우가 사자처럼 기아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 사냥에 손잡고 나선 까닭은 기아자동차 인수를 통한 삼성의 추격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이다.
기아자동차 사냥에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여의도 표범’까지 등장할 태세이다. 기아자동차에 4천억원 가량을 지원한 LG그룹이 최근 정부와 채권단으로부터 기아자동차 판매 부문을 맡아 기아그룹의 자구 노력을 도와달라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만약 정부와 채권단이 기아자동차를 매각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할 경우 후속 방안은 기아그룹과 LG그룹의 전략적 제휴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재계 관측통들은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채권단이 기아자동차를 제3자에게 인수시킬 경우 기아자동차 쟁탈전은 삼성 대 현대·대우 연합군의 한판 승부로 판가름날 것 같다. 승부 결과에 따라 자동차 업계의 판도가 바뀌기 때문에 양측 모두 비장한 각오이다. 삼성이 승리하면 머지 않아 갖출 연산 20만대 시설에다 기아자동차의 연산 87만대 시설을 합쳐 순식간에 연산 백만대를 넘는 생산 능력을 갖게 된다. 이는 업계 1, 2위인 현대와 대우를 위협할 만한 수준이다.

그렇지만 현대와 대우가 정작 걱정하는 것은 삼성자동차의 추격이 아니다. 그보다는 삼성이 기아자동차를 인수함으로써 재계 판도에 지각 변동이 오는 상황을 더 염려하는 것이다. 삼성이 자산 14조인 기아를 인수하게 되면 자산 총액이 65조에 달해 53조로 현재 재계 1위인 현대를 앞지를 수 있다. 현대의 두려움은 2등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삼성과 현대의 숙명적인 승부에 불을 당긴 것은 자동차 업계의 구조 조정에 대한 삼성의 내부 보고서였다. 사단은 기아자동차의 경영 실태를 지적하면서 자동차 업계의 구조 조정 필요성을 제기한 문제의 보고서가 지난 5월 하순 언론에 공개되면서 발생했다. 기아그룹이 이 보고서 파문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면서 6월5일 삼성을 검찰에 고발하자 사태는 엉뚱하게 삼성과 현대의 갈등으로 비화했다. 경위야 어떻든 문제의 보고서가 현대로부터 유출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검찰 조사 결과, 삼성자동차 산업분석팀 김 아무개 과장이 작성한 문제의 보고서를 그의 대학 선배인 현대자동차 남 아무개 과장이 개인적으로 받아서 보관하던 중 그도 모르는 사이 사내 통신망에 공개된 뒤 이를 취재한 <서울경제신문>이 보도하게 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문제의 보고서 파문이 7월18일 검찰의 조사 결과 발표로 가라앉기도 전에‘새우’는 이미‘고래’싸움에 등이 터지고 말았다. 기아그룹이 7월16일 부도 위기로 내몰린 것이다. 물론 문제의 보고서 파문이 기아그룹의 부도 위기를 초래한 것은 아니다. 기아특수강의 경영 부실이 직접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보고서 파문이 기아그룹의 자금 동원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보면 전혀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니다.

자동차공업협회가 6월10일 삼성 규탄 성명서를 내면서 문제의 보고서 파문을 확산시킨 배경이 석연치 않은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물론 현대자동차가 삼성 규탄을 주도한 목적은 차제에 삼성을 도덕적으로 궁지에 몰아 삼성의 기아자동차 인수를 원천 봉쇄하려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현대는, 보고서 파문을 확산시켜 기아그룹의 자금난을 더욱 조장한 꼴이 되고 만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삼성이 보고서 파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비록 문제의 보고서를 언론에 유출한 직접 당사자가 현대인 것은 사실이지만, 만약 삼성이 그 보고서를 만들지 않았다면 보고서 파문이 일어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 현대측의 시각이다. 삼성이 문제의 보고서를 작성한 목적이 자동차 업계의 구조 조정 필요성을 여론화하여 기아자동차를 인수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에 책임은 전적으로 삼성에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삼성은‘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입장이다. 문제의 보고서 파문이 기아그룹의 부도 위기에 일조했다고 하면 책임은 전적으로 보고서를 언론에 흘려 삼성을 매장하려 한 현대에게 있다는 것이 삼성그룹 관계자의 주장이다. 심지어 그는 현대가 기아자동차의 백기사 역할을 자임한 것은 ‘자신의 이익 챙기기’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공개 사과를 하지 않을 경우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라고 밝혔다.

기아자동차는 정세영 명예 회장, 아세아자동차는 몽구·몽헌 준다?

물론 삼성과 현대의 주장 중에서 어느 쪽이 옳은지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이 의문은 문제의 보고서 파문 이후 기아자동차 인수를 조직적으로 준비한 기업을 찾아내면 어느 정도 풀릴 수 있다. 왜냐하면 기아그룹의 자금난을 통해 손쉽게 기아자동차 인수를 기대했거나 의도했던 기업은 보고서 파문이 발생한 때부터 기아그룹 부도 위기 시점까지 각종 경로를 동원해 기아자동차 주식 매집에 나섰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는 의외로 나타났다. 기아그룹이 부도 위기에 몰리기 직전까지 주식 매집을 해 기아자동차 인수를 조직적으로 준비한 듯한 쪽은 삼성보다는 현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현대는 보고서 파문 직후부터 기아그룹 부도 위기 시점까지 기아자동차의 주식 약 8.5%를 사들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반면 삼성은 지난 3월 기아자동차 대주주인 기산의 주식 5.6%를 샀다가 내다 판 뒤 기아자동차 주식 매집을 중단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현대가 최근 확보한 기아자동차 지분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6월17~25일에 현대해상과 경기은행의 현대신탁계정을 통해 1.03%인 77만주를 확보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기아그룹이 7월14일 발행한 사모전환사채 5백억원어치를 인수해 5% 지분을 매집했다. 마지막으로 7월11~18일에 동원증권·동서증권·한국생명에 위탁해 약 2% 지분을 극비리에 사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현대가 확보한 기아자동차의 지분이 현대자동차가 이미 갖고 있던 9.8%까지 합쳐 18% 정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시사저널>은 현대가 올해 초 은밀하게 교보생명에 위탁해 기아자동차 지분 5%를 확보한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현대가 확보한 총지분은 23%를 웃돈다. 이는 포드와 마쓰다가 보유한 19.47%와 삼성이 보유한 약 6.3%를 합친 25.77%보다 겨우 2.77% 모자라는 엄청난 지분이다.

이로써 현대가 기아자동차를 인수하기 위한 노력을 조직적으로 해왔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자동차산업의 구조 조정 필요성을 여론화해 기아자동차를 인수하려는 삼성의 의도를 막으려 했다는 현대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현대가 문제의 보고서 파문으로 말미암아 기아그룹의 자금난이 더욱 심해지자 차제에 기아자동차를 적대적으로 인수하는 쪽으로 급선회했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면, 이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 회장 일가와 그의 동생인 정세영 현대자동차 명예 회장 일가간 재산 분배의 일환이라는 분석이 설득력 있다. 현대자동차를 어느 일가가 갖느냐는 오랜 다툼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써 정주영 명예 회장이 기아자동차를 인수해 정세영 일가에 주고 현대자동차는 정몽구 그룹 회장이나 정몽헌 그룹 부회장에게 물려주는 방안으로 정리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이같은 내용은 정세영 명예 회장이 얼마 전 제주도에서 있은 전경련 회장단 회의를 계기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만나 기아자동차는 현대가, 아세아자동차는 대우가 각각 인수하기로 합의했다고 알려지면서 어느 정도 드러났다. 게다가 정세영 명예 회장과 김우중 회장이 최근 김선홍 회장을 만나 현대와 대우가 경영이 부실한 기아특수강을 공동 운영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정부와 채권단은 삼성에 우호적?

현대는 이와 같이 기아자동차 쟁탈전에서 삼성보다 훨씬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상태이다. 그런데도 현대는 정부와 채권단이 삼성측에 기울어 있다고 보고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현대가 대우와 기아자동차를 공동 인수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이 채권단의 1차 회의에 앞서 <조선일보> 1면 머리 기사로 느닷없이 보도된 된 배경도 정부와 채권단의 삼성 편향에 제동을 걸기 위한 현대그룹의‘언론 이용하기’였다는 분석이 많다.

그런데 대우는 현대와 입장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대우그룹의 한 사장급 인사는 최근 채권단이 삼성측에 기울어져 있다고 해도 이를 문제삼기 어렵다고 밝혔다. 삼성이 기아자동차 인수 금액을 현대보다 많이 제시할 경우 채권단이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대우는 이미 연간 2백만대 생산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삼성의 기아자동차 인수를 막을 까닭이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러나 핵심적인 논점은 기아자동차를 누가 차지하는 것이 자동차산업 구조 조정의 바람직한 방향이냐 하는 것이다. 재계는 최소한 삼성이 인수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이다. 이는 삼성이 포화 상태의 자동차산업에 진출한 것부터가 잘못이라는 인식을 깔고 있다. 그럼에도 삼성의 인수를 인위적으로 막는 것은 설비 투자 중복이라는 부작용만 반복하는 결과를 빚을 뿐이라는 여론도 살아나는 상황이다.

어쨌든 삼성과 현대는 한 가지씩 난관에 부닥쳐 있다. 삼성의 고민은 기아의 강성 노조를 과연 끌어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반면 현대는 제철사업을 포기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한다. 기아자동차를 인수하게 되면 정주영 명예 회장의 숙원인 제철사업 진출은 물 건너 가기 때문이다. 만약 현대가 제철사업을 포기하지 않고 삼성의 기아 인수를 막는 데만 치중할 경우 정부와 채권단의 마음이 기울어 있는 삼성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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