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협·4자 회담 연계, 소탐대실한다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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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구미 기업 유치 위해 한국에 먼저 손짓…미·일과 수교 땐 한국 기업 외면…4자회담 성사용 ‘경협 카드’는 무용지물
남북 관계가 해빙기를 맞는가 싶으면 으레 신문 1면 머리 기사를 차지하는 뉴스가 있다. 대우그룹의 남포공단 가동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무공)의 나진·선봉 무역관 개설을 축으로 하는 본격적인 남북 경협이 임박했다는 전망이다. 이 기사는 최근 3년 동안 남북 관계가 좋아질 때마다 거의 모든 언론 매체가 크게 보도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호전될 것 같던 남북 관계가 다시금 악화하는 바람에 그와 같은 낙관적인 전망은 늘 빗나가고 말았다.

정부는 최근 북한이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4자 회담을 수용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차원에서 남북 경협 확대 조처를 취했다. 그동안 국내 기업들에게 권고했던 투자 상한선(5백만달러)을 폐지하고 남북 시범 사업의 범위를 경공업에서 통신과 전자까지 확대한 것이다. 이같은 조처는 4자 회담과 관련해 싱가포르에서 남북 밀사가 접촉한 직후에 나왔다. 남북 경협이 본격적으로 추진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또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남북 경협이 본격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이번에도 빗나갈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앞날이 밝다. 왜냐하면 정부는 당초 북한이 4자 회담을 수용해야 남북 경협을 확대하려고 했으나, 북한의 4자 회담 수용 여부가 분명하지 않은데도 남북 경협 확대 조처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북 밀사 접촉을 통해 정부가 4자 회담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 긍정적임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조처를 취한 것이 아니냐 하는 분석이 유력하다.

정부는 4월23일 남북 밀사의 싱가포르 접촉을 통해 북한 당국이 4자 회담을 수용할 경우 경협 범위를 확대함과 동시에 쌀을 추가로 제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북한측에 전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와 관련해 당시 한국측 밀사인 무공의 홍지선 북한처장이 4월27일 귀국하기 직전에, 북한측의 반응이 긍정적임을 정부에 알려 왔다는 한 정부 관계자의 증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북 경협 확대 조처가 홍처장이 귀국하던 날 전격적으로 취해졌기 때문이다.

정부, 대우그룹 평양사무소 개설 극비 추진

정부가 이번에 경협 범위를 확대하면서 새로이 협력사업자 승인을 내준 기업들은 삼성전자·대우전자·태창 등이다(29쪽 표 참조). 이들의 사업 규모는 각각 대북 투자 상한선인 5백만달러를 넘는다. 그런데도 정부가 협력사업자 승인을 내준 것은 남북 경협을 본격화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특히 정부가 삼성전자의 나진·선봉 지대내 통신센터 건립과 북한 조선체신회사와의 전자교환기 합작 생산에 대해 협력사업자 승인을 내준 데서 읽을 수 있다.

삼성이 통일원에 협력사업자 승인을 요청한 때는 작년 1월이었다. 삼성전자 강진구 회장이 이끄는 삼성그룹 방북단이 나진·선봉 지대를 둘러보고 돌아온 직후였다. 정부는 그 뒤 1년이 넘도록 승인을 보류해 왔는데 그 표면적 이유는 남북 관계 악화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자교환기를 북한과 합작 생산할 경우 삼성전자의 전자교환기 생산 기술을 북한이 군사용으로 전용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남북 경협을 본격화하려는 정부의 행보가 빨라지자 대기업들도 다시 북한 진출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특히 대북 진출에서 제일 앞선 대우그룹의 움직임이 가장 눈길을 끈다. 그 까닭은 대우그룹이 국내 기업 중 유일하게 남북 시범 협력 사업으로 남포공단에 대한 사업 승인을 정부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현재 대우그룹은 북한 당국과의 합영 사업인 남포공단을 가동하기 위한 준비를 끝낸 상황이다.

대우그룹은 북경지사장인 박원길 전무를 4월4일 북한에 파견한 데 이어 4월 말 북한팀장인 박 춘 상무를 북한에 보내 남포공단 가동에 필요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대우그룹 북한팀 정병은 부장은 내일이라도 당장 남포공단을 가동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현재 정부의 최종 허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제 남포공단 가동 시기는 대우그룹의 손을 떠났다. 남북한 정부의 결정만 남았다”라고 덧붙였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는데도 남포공단은 당장 가동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정부가 남포공단 가동 시기를 북한의 4자 회담 수용과 연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분단 반 세기 만에 처음으로 남북한이 손잡고 합작품을 생산하는 남포공단을 될수록 잔치 분위기에서 가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같은 점에서 정부가 최근 몇 달 동안 극비리에 추진해온 대우그룹 평양사무소 개설 시기도 조정되고 있다.
대우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작년 말 남포공단 가동 준비가 대부분 끝나자 정부는 대우그룹 평양사무소 개설을 극비리에 추진해 왔다. 현재 이 문제에 대해 대우그룹과 북한 당국이 이미 합의를 끝낸 상태라고 그는 밝혔다. 다만 남포공단과 달리 평양에 한국 기업의 사무소가 설치된다는 점에서 그 상징성이 엄청나기 때문에 정부와 대우그룹은 개설 시기를 남북 관계가 좋은 때로 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LG그룹도 대북 진출 사업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LG는 국내 대기업 중 가장 건실한 재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 당국으로부터 신뢰할 경협 파트너 가운데 하나로 꼽혀 왔다. 게다가 지금까지 북한과의 위탁 가공 무역 실적도 국내 기업들 중에서 가장 높다. 그럼에도 LG는 대우그룹과 삼성그룹에 비해 북한 진출에서 훨씬 처져 있다. 아직 남북 경협 협력 사업 승인이나 협력사업자 승인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4자 회담을 수용해 만수위까지 찬 남북 경협의 둑이 터지게 되면 LG그룹이 대북 진출에서 선두 주자로 떠오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른 대기업들과 달리 LG그룹은 장기적으로 북한의 제철·정유·자동차 등 중화학 분야에 투자할 계획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북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제철소인 김책제철소와 유일한 자동차 회사인 승리자동차를 LG가 북한 당국과 공동으로 운영하기로 이미 합의를 보았다는 사실이다.

LG그룹이 극비리에 북한 당국과 김책제철소를 합영하기로 합의한 시점은 약 2년 전이다. 북한 당국이 LG에 김책제철소 합영을 제안한 까닭은, 당시 철광석을 녹이는 원료인 코크스가 부족해 가동률이 급속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합영키로 했을 때 30%이던 김책제철소의 가동률은 지난 3월 마지막 용광로까지 가동이 중단되었다. 현재 LG의 김책제철소와 승리자동차 합영건은 승인이 나지 않고 있다. 정부가 북한의 사회간접자본시설에 대한 투자를 허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그룹도 북한 진출 노력을 재개할 것으로 보인다. 한때 가장 빨리 진출할 것처럼 보였던 현대그룹이 5대 그룹 중에서 가장 처지게 된 까닭은 정주영 회장의 대선 출마 때문이었다. 89년 재벌 총수로는 처음 북한을 방문한 정회장은 김일성 주석과의 면담에서 금강산 관광단지 개발과 원산 수리조선소 사업에 대해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다가 정회장이 대선에 출마하는 바람에 현대그룹의 대북 진출이 완전 중단된 것이다.

정치에서 손을 뗀 정주영 명예 회장은 지난해 말 다시 방북해 북한 투자를 재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방북은 당시 남북 관계가 악화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물론 북한 당국이 아직도 정회장에 대해 신뢰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현대에 약속한 금강산 개발과 원산 수리조선소 사업이 현실화할 가능성은 높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여전히 김일성의 유훈을 받드는 유훈 통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우·삼성·LG·현대를 비롯한 대기업의 북한 진출 행보는 이와 같이 북한이 4자 회담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카드로서 정부가 남북 경협을 확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면서 점점 빨라지고 있다. 이는 머지 않아 대기업 총수들의 방북 러시와 함께 절정에 다다를 전망이다. 이미 (주)태창은 정부로부터 금강산 샘물 개발에 대한 협력사업자 승인을 받자마자 5월1일부터 10일간 이주영 사장이 북한을 방문해 대북 투자를 본격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기업들의 북한 진출이 그렇게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정부가 북한의 사회간접자본시설에 대한 투자 허용을 포함한 본격적인 남북 경협을 북한의 4자 회담 수용 여부와 연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북한이 4자 회담을 거부하면 남북 경협의 본격적 확대는 다시 물 건너갈 공산이 크다. 이 때문에 정부가 과연 남북 경협을 둘도 없이 유용한 대북 카드로 인식해 이를 남북 관계와 연계시키고 있는 것이 현실적으로 유익한가 하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경협, 2년내 실현 못하면 기회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북 경협은 대북 카드로서 별로 가치가 없다는 것이 북한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와 관련해 무공 홍지선 북한처장은“외견상 북한은 한국 기업들의 북한 진출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한국이 북한보다 못 산다고 주민들을 세뇌시켜 온 북한 당국으로서는 한국 기업들이 막대한 자본과 기술을 들여가면 북한 체제가 무너질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북한이 겉으로 남북 경협을 원하는 배경에 대해 홍처장은 이렇게 말한다.“언젠가 북한의 고위 당국자는 내게 한국 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하려는 것이 구미 기업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라고 털어놓았다. 구미 기업들이 한국 기업들이 진출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불안해서 투자를 주저하기 때문에 한국과 경협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결국 북한은 외국 기업들의 투자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 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정부의 유일한 대북 창구로서 최근 싱가포르에서 북한 밀사와 접촉한 홍처장의 말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럼에도 통일원 당국자들은 자신들이 남북 경협을 확대하면 북한 당국이 감지덕지할 것으로 오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오판에 근거해서 정부가 북한으로 하여금 4자 회담을 수용하게끔 남북 경협 카드를 사용하는 것은 현실성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2년 정도 지나면 구미 기업들은 북한 투자를 주저하지 않게 된다. 그 전에 북한이 미·일과 수교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체제 위기를 걱정하면서까지 남북 경협을 원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북한이 외국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그나마 한국 기업들의 투자를 절실하게 생각하는 지금 정부가 경협을 본격화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경협을 통해 남북 관계가 점진적으로 개선될 기회가 있는 것이다.

결국 본격적인 남북 경협을 4자 회담과 연계하는 한 국내 대기업들의 대북 진출이 성공적일 전망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정부가 남북 간의 정치적인 문제와 남북 경협을 분리시켜야 남북 경협이 남북의 관계 개선을 앞당길 수 있는 유용한 대북 카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홍처장의 지적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북한이 4자 회담을 비롯한 남북 대화에 나서야만 경협을 확대하겠다는 냉전적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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