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 폭로는 YS · 이회창 '합작품'
  • 崔 進 기자 ()
  • 승인 1997.10.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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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비 회동 후 2차 폭로 결행, ‘합작’ 가능성…DJ 끄떡없고 여론 나빠 ‘실패작’
한번 패하면 영영 패하고 마는 전쟁. 어차피 어느 한쪽이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는 위험한 전쟁이 대선을 겨우 두 달 앞두고 벌어지고 있다. 좁게는 이회창과 김대중 총재, 넓게는 김영삼 대통령을 포함해 정치권 전반이 직·간접으로 얽혀 죽느냐 사느냐를 가리는 게임이다.

이회창 진영은 회심의 1,2탄이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부작용만 가져왔는데도 제3, 제4탄을 날려서 DJ를 기어코 침몰시키고 말겠다고 벼른다. 끝까지 가겠다는 것이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김대중 총재는 10월13일 기자 회견을 갖고 김대통령에게 여야 영수회담을 제안했다. 마침내 김대통령에게 공이 넘어간 셈이다. 이번 비자금 전쟁은 이회창 진영이 이기면 대역전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고, 김대중 진영이 살아 남으면 대권 문턱에 성큼 다가설 수 있는, 전무 아니면 전부를 건 싸움이라는 점에서 양측은 사활을 걸고 있다.

이회창 진영은 왜 이토록 위험한 싸움을 먼저 걸고 나왔을까. 그것은 10월7일 강삼재 총장이 6백70억 비자금설을 터뜨릴 때 이회창 총재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를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당시 이총재의 처지는 최악이었다. 지지율은 3위를 맴돌았다. 10·30 대구 전당대회 이후 조금 올라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김대중·이인제에 이어 3위권을 헤매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DJP 단일화는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였다. DJ로 단일화할 경우 대세는 굳어진다.

이총재, 폭로 전날 정보기관 고위 책임자 만나

집안 사정은 어떤가. 무엇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것이 없었다. 이수성·박찬종 고문은 계속 비협조적이고, 서석재·서청원·김운환 등 민주계 중진들은 당장 뛰쳐나갈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민주계 좌장 격인 서석재 의원은 10월10일을 D데이로 잡아놓은 터였다. 당 주변에서는‘이제 신한국당은 끝났다’는 패배주의가 팽배했다. 벼랑 끝까지 몰린 상황, 바로 이 시점에서 DJ 비자금설을 터뜨린 것이다. 그것은 멀찌감치 앞서서 달리고 있는 DJ의 발을 걸어 현재의 구도를 일거에 흐트러뜨리려는 극약 처방이었다. 다급한 상태에서 던진 마지막 승부수였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은 이총재의 단독 거사인가, 김대통령과의 합작품인가. 이번 사태의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인 이 대목은 비자금 전쟁의 배후와 배경을 짚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 정가에는 두 가지 설이 나돌고 있다. 하나는 이회창 단독 거사설로, 이총재가 청와대와 협의하지 않고 혼자 결심하고 혼자 결행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강삼재 총장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른바‘김대중 파일’을 입수해 이총재의 재가를 받고 터뜨렸다는 시나리오다.

다른 하나는 YS와 이총재의 합작설.‘무슨 일이 있어도 DJ에게 정권을 넘겨주지 않겠다’고 작심한 김대통령이 이총재를 지원하기 위해 미리 확보해 놓았던 DJ 파일을 제공했다는 주장이다. 여권의 여러 경로를 확인해 보면, 이번 비자금 전쟁의 배후에 김대통령이 직·간접으로 개입했다고 보인다. 그 증거가 여기저기서 포착되고 있다.

비자금 사건이 터지기 하루 전날인 10월6일 밤, 이회창 총재는 강남의 비밀 장소에서 정보기관의 고위 책임자를 극비리에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고위 책임자의 위치로 볼때 김대통령의 허락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강총장은 10월7일, 6백70억설을 터뜨리기 몇 시간 전 이 고위 책임자를 다시 만났다고 여권의 고위 소식통은 전했다.

그리고 비자금 사건이 터진 지 3일째인 10월9일 저녁. 이총재는 측근도 모르게 김대통령과 극비 회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 김대통령은 DJ 비자금 6백70억설을 둘러싼 국민 여론이 그리 좋지 않음을 걱정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표정이나 분위기는 상당히 어두웠다고 한다. 바로 다음날인 10월10일, 이총재의 정무특보인 김무성 의원이 청와대에서 조홍래 정무수석을 만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김대통령과 이총재는 매우 긴밀한 협조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정가에서는 YS와 강총장의 특수 관계에 비추어 볼 때 김대통령이 단순한 협조자 수준이 아니라 막후 연출자라는 시각마저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YS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총재의 지지도를 끌어올리는 수준까지만 공격하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DJ를 완전히 죽이려고 작심했던 것일까. 정가에서는 ‘DJ 죽이기’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특히 이총재 진영은 3탄, 4탄으로 DJ를 끝까지 몰아붙여 사법 처리를 하거나 후보를 사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DJ의 반격을 자초하게 되므로 애당초 공격을 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이제 와서 물러선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지금은 공격만이 살 길이다. 계속 공격하면 천하장사라도 당하지 않을 수 없다.” 이총재 참모는 강경론을 폈다.

사실 김대통령으로서는 대선을 겨우 두 달 남짓 앞두고 후보를 교체할 경우 엄청난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시일도 촉박할 뿐더러 대안도 없이 당만 산산조각날 가능성이 크다. 미우나 고우나 이총재를 지원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YS에게 DJ는 물러설 수 없는 적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DJ에게만은 정권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YS 특유의 오기와 판단이 작용했을 수 있다. DJ를 이길 수만 있다면 대선 자금 폭로라는 부담을 감수하고 이총재가 자기를 밟고서라도 가라고 할 정도라는 것이다. 제2의 6·29설은 여기서 나왔다.
DJ, YS의 개입 알고도 모른 체

그러나 각도가 다른 분석도 있다. 김대통령은 DJ를 완전히 궤멸시키기보다는 흠집 내기 정도에 머무르려고 했다는 분석이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 ‘YS는 여야를 불문하고 특정 주자가 독주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극심한 레임 덕 현상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DJ가 너무 앞서갔다. YS는 여기에 어느 정도 제동을 걸 필요가 있었다.’이 분석은 DJ가 정권을 잡아도 무방하다는 위험한 전제를 달고 있다. 즉, DJ가 정권을 잡더라도 여소야대 국면에서 YS를 공격할 수 없을 뿐더러, 공격하는 순간부터 정치 보복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따라서 이총재가 정권을 잡는 것보다 DJ의 집권이 오히려 부담을 덜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YS는 레임 덕 방지와 퇴임 이후 안전을 위해 특정 주자의 압승과 그에 따른 권력 독점을 원하지 않을 뿐, 이총재를 무리하게 지원하지는 않으리라는 분석이다. 이런 분석을 종합하면, YS는 이총재를 돕되 무리수를 두지는 않으리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DJ는 YS가 개입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까. 당연히 알고 있다. 그는 10월13일 기자회견에서 “심증은 있으나 공개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라고 슬쩍 비켜갔다. 배후에 YS가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DJ가 애써 모른 체하면서 이총재를 주공격 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른바 3김 청산 작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다. DJ가 이번 대선에서 맞붙을 상대는 이총재다. 그런데 YS와 치고받고 싸워 국민들 사이에서 3김 정치에 대한 거부감이 증폭되면 이총재가 한 발짝 비켜나 반사 이익을 챙길 수 있기 때문에 YS와의 싸움을 한사코 피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양김씨가 치열하게 싸울 경우 해묵은 지역 감정이 되살아날 수도 있다. YS가 위기에 몰려 영남에서 동정론이 일어날 경우 싸움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여권 핵심부가 이번 대선의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로 지역 감정을 상정하고 있는 데에는 그런 고단수 전략이 깔려 있다.

따라서 국민회의는 앞으로도 계속 YS와의 충돌은 피하고 이총재를 공격 목표로 삼을 것이 분명하다. 김총재가 10월13일 기자회견에서 YS를 건드리지 않고 주로 이총재를 겨냥해 ‘공작 정치의 주모자 ’내지‘ 경제를 망친 장본인’으로 몰고가면서 YS에게는 영수회담을 제의한 것도 그런 전략적 고려에서였다.

그렇다면 이총재는 지금까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신한국당이 DJ를 공격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4대 효과는 지지율 회복과 여권 내부 단속, 여당 고정표 결집, 양당 대결 구도 형성이었다. 이 가운데 지지율 회복만 빼놓으면 나머지 부분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고 이총재 진영은 자평한다. “이총재 지지도가 떨어진 가장 큰 이유는 30%에 달하는 전통적인 여당표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 표를 잡는 것이 우리의 1차 목표라는 점에서 이번 비자금 폭로는 불가피했다.” 이총재의 참모는 이와 함께 이회창 대 김대중 양자 대결 구도가 형성된 점도 성과라고 덧붙였다. 지지율의 경우 당장은 효과가 없지만 계속 후속타를 터뜨리면 머지 않아 이총재 지지도가 반등하리라고 본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도 “어느 정도 부작용은 예상했다. 이제 어쩔 도리가 없다”라고 말해 계속 강공으로 나갈 수밖에 없음을 내비쳤다.

그러나 신한국당이 DJ 죽이기를 계속 밀어붙이기에는 상황이 너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부작용을 예상했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각하다. 10월13일자 <중앙일보>를 보면, 이총재 지지율이 정지 상태는 고사하고 무려 6.2% 포인트나 뚝 떨어졌다. 반대로 DJ 지지율은 오히려 올라가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시사저널> 특별 취재반이 조사한 전국 민심을 보더라도 DJ 비자금설을 믿거나 그의 부도덕성을 비난하는 사람보다 여당의 공작 정치를 비난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런가 하면 용감무쌍하게 비자금 전쟁의 총대를 멨던 강삼재 총장에 대한 인책론이 당내에서 제기되고 있다. 멋지게 던진 부메랑이 되돌아와 강총장의 이마를 때린 꼴이다.

그렇다고 신한국당은 지금 와서 발을 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약 발을 뺐다가는 꼼짝 없이 정치 공작설에 휘말릴 판이고, 끝까지 밀어붙이기에는 여론이 너무 험악하다. 진퇴양난에 빠진 형국이다. 특히 당내 중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후보 교체 대란’ 발생하는가

10월12일 저녁 여의도 6·3빌딩. 이한동·김윤환·박찬종·김덕룡 등 내로라 하는 당내 중진 8명이 긴급 심야 회동을 갖고 이번 비자금 전쟁의 무모함을 정면으로 제기했다. 장장 3시간이나 진행된 이 날 모임에서 참석자들은 이총재 지지율이 비자금 정국 이후에도 각종 여론 조사에서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거나 오히려 떨어졌다는 사실을 크게 우려했다. 비자금 의혹을 제기한 절차와 방법에 대해서도 불만이 터져나왔고, 특히 대기업 비자금 제공설을 터뜨린 것이 악수라는 데 대체로 의견이 일치했다. 이 날 중진 8인 모임은 이총재에게 반기를 들었다기보다는 일단 전략 수정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총재가 계속 강공책을 쓰고 그런데도 별로 효과가 없을 경우, 이들이 후보 교체론을 들고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선 이총재의 최대 후원자인 김윤환 고문이 끝까지 이총재를 도울지 의문이다. 김고문 측근들 사이에서는 “10월 말까지 기다려도 (2위) 가망이 없으면 다른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라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김고문 진영에서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이총재를 주저앉히고 이인제·조 순을 모두 끌어들이는 반DJ 연합전선론을 들먹이는 사람도 있다.

이한동 대표도 잠재적인 후보 교체론자이다. 그는 이회창 카드로 도저히 안되겠다는 판단이 서고 후보 교체론이 고개를 들 경우 자신이 대안으로 나설 가능성이 있다. 그의 참모들은 지금도 이대표가 후보로 나서고 김종필·박태준·이수성을 끌어들여 보수 대연합을 실현하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대표는 강총장의 비자금 공세가 득보다 실이 더 많다는 이유로 못마땅하게 여겨 왔다.

YS의 태도 역시 관건이다. 지금까지 청와대 관계자들은 대선을 두 달 남겨놓은 시점이어서 이회창 카드로 밀어붙일 수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말하지만, 한 비서관은 “대통령은 이총재를 도와줄 만큼 도와주고 있다. 그런데도 도저히 승산이 없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뻔히 지는 게임을 할 수는 없지 않는가”라고 말한다. 어쨌든 10월 말까지 이회창 카드로 도저히 DJ를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설 경우 여권 내부에서 후보 교체론이 치밀어 올라올 것이 분명하다.

비자금 전쟁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이와 관련해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의미 심장한 말을 던졌다. “어차피 DJ는 죽지 않는다. 얼마나 흠집을 내느냐가 관건이다.” 이 말을 유추 해석해 보면, DJ 죽이기는 애당초 불가능하며 얼마나 타격을 입히느냐가 목표라는 말로 풀이된다. 결국 여권 핵심부는 DJ를 향해 후속타를 몇 차례 날리겠지만, 그래도 효과가 없으면 이총재는 YS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후보 교체론에 직면할 것이다. 10월 대란설이 점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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