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북단원 체험기/"통일대축전 실상을 밝힌다"
  • 김창수(민화협 정책실장) ()
  • 승인 2001.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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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은 쓰고 '열매'는 달다/

돌출 행동, 민간 교류 확대 따른 시행착오


지난 10여 년 동안 해마다 8월이면 대규모 통일 행사가 열렸다. 대부분의 경우 정부와 통일 행사 참가자들 사이에 심한 충돌이 벌어졌다. 이런 충돌을 방지하고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류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리기 위해서 7대 종단과 민화협·통일연대로 구성된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2001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는 여러 가지 혼란을 예상하면서도 평양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기로 결정하였다. 정부는 7대 종단(천주교 기독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 성균관 민족종교)이 앞장서서 성숙하게 행동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방북을 승인했다.




8월15일 오전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가 1시간 만에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순간 모두들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1948년에 김 구 선생이 평양을 방문한 이후 가장 많은 3백11명이 평양에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3대헌장 기념탑 앞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가하는 문제가 큰 벽으로 다가왔다. 3대헌장 기념탑 앞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은 8월15일 오전 9시30분에 열릴 예정이었다. 남측 대표단은 8월14일 오후 늦게서야 방북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서둘렀는데도 8월15일 낮 12시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불가피하게 늦게 출발한 것이 오히려 '개막식 참여'라는 골치 아픈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평양 시민 2만여 명은 뙤약볕 아래서 6시간 넘게 남측 대표단을 기다리며 개막식을 미루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당혹스런 상황에서 북측 관계자들을 만나 협상을 시작했다.


"3대헌장 기념탑 앞 행사는 남북 공동 행사가 아니라 북측 잔치이다. 부담스러워할 것 없다. 손님으로 와서 잔치 구경도 못하냐. 통일을 하자는 행사인데 구경도 못할 거라면 관광하러 온 거냐. 3대헌장 기념탑이 부담스럽다면 평양 시내 어느 곳도 부담스럽지 않은 곳이 있겠느냐."


대표단은 이런 북측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3대헌장 기념탑 앞에서 열리는 어떤 행사에도 참가하지 않겠다고 정부와 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다. 어려움은 또 있었다. 고려호텔의 구조 때문에 모두가 모여서 충분하게 토론하거나 신속하게 연락하기 어려웠다. 휴대폰으로부터 해방감을 만끽하기도 전에 휴대폰이 없는 불편함을 아쉬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구경이라도 하는 것이 도리이고, 또 일부라도 행사장에 가는 것이 남북 양쪽의 체면을 살리는 길이라고 판단한 100여 명이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3대헌장 기념탑을 향해 출발했다.


다음날 취재 기자단을 통해 들려온 서울 소식은 많은 언론이 '출발부터 얼룩진 민족통일대축전'으로 보도한다는 것이었다. 대표단은 매우 당황했다. 서울에서 들려오는 언론의 보도 내용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평양 상황과 서울의 언론 보도 내용은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이 점에 대해서 대표단 일부가 취재 기자단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취재 기자단 탓은 아니었다. 지도부와 취재 기자단 모두 평양 현지 상황을 서울에서 확대해서 보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도부는 살얼음판을 걷듯이 더욱 신중하게 처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만경대 방명록 사건의 파문이 확산되고 있었다. '만경대 정신'이란 존재하지도 않은 개념이다. 불국사에 가면 불국사에 담긴 뜻에 자신의 소망을 연결해 방명록에 기록하는 것과 같은 가벼운 의미이다. 다만 북한 연구에 권위 있는 진보적인 학자가 쓴 글이기 때문에 가볍게 여겨지지 않았을 뿐이다.


결국 '만경대 정신'이 불러일으킨 파문은 대표단이 6박7일 동안 거둔 모든 성과를 덮어버릴 정도로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6박7일 동안의 북한 체류를 마치고 김포공항에 도착한 대표단은 도착 성명에서 '모든 파문은 대표단의 부족함에서 비롯되었다'고 사과했다. 비 온 뒤에 땅은 더 굳어지는 법. 평양 체류 기간을 '얼룩진 6박7일'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평양 체류 기간의 일부 돌출 행동은 민간 교류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진통이라고 생각한다.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류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한번쯤 겪을 일인 것이다. 각계의 다양한 사람으로 구성된 3백11명이 6박 7일 동안 이웃 동네에 여행한다고 해도 온갖 소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시행 착오에 대한 과열된 비난 열기를 식히고 성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눈을 돌릴 때가 되었다.


평양 체류 6박7일에서 거둔 가장 큰 성과는 민간 차원에서 남북 교류를 지속시킬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지난 3월 이후 남북 당국간 대화가 중단된 뒤로 민간이 앞장서서 남북 사이에 가느다란 대화의 줄을 잇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사회·문화 등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류는 남과 북 주민 사이의 마음의 벽을 허무는 데 기여할 것이다.


천주교는 사상 처음으로 남북의 성직자·수도자·신자가 함께 미사를 드렸다. 개신교도 공동 예배를 하였고, 불교는 민족 문화 유산 공동 관리라는 차원에서 북한에 있는 60여 사찰에 단청 원료를 지원하기로 했다. 작가들은 문학 작품 낭송회와 작가 교류를, 예술인과 언론인 들도 교류와 접촉을 확대해 가기로 약속했다. 여성·청년 학생·노동자·농민·어민 들도 교류와 협력의 필요성을 놓고 의견을 나누었다.


동서독 주민들은 통일된 지 10년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상대방을 향한 미움의 감정을 녹이지 못하고 있다. 제도로는 통일을 이루었지만 마음의 통일은 안된 것이다. 이번 평양 민족통일대축전에서 각계 각층 사람들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 것은 동서독과 달리 남과 북이 마음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동서독과는 다른 통일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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