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시장 '야망의 진격'
  • 이숙이·고제규 기자 ()
  • 승인 2004.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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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조용히 뒤따라가다 막판 뒤집기를 노리겠다며 ‘2등 전략’을 구사해온 이명박 서울시장의 대선 레이스가 갑작스레 빨라졌다. 수도권 이전 문제를 호기로 삼아 여당뿐 아니라 박대표에게도
지난 10월3일 일요일 오전 ‘하이서울 한강 마라톤 대회’에 참석한 이명박 시장의 얼굴은 밝았다. 참가한 시민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박계동·정두언 한나라당 의원, 유인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탤런트 박상원·이 훈 씨 등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여당 의원들이 잔뜩 벼르고 있는 국정감사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전혀 위축되지 않는 기색이었다.

마라톤 주자들이 출발한 뒤 채수삼 서울신문사 사장을 비롯해 몇몇 지인들과 담소하는 자리에서도 이사장은 당당했다. “서울시 의회가 하도 서울시장이 안 나선다고 그러기에 한마디 거들었더니 정부·여당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서울시장을 죽이려고 한다. 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지자체 단체장을 못 죽여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이시장은 최장집 교수(고려대·정치외교학)의 글을 화제로 올리며 노무현 정부를 역공했다. “가장 진보적인 학자마저 그런 얘기를 할 정도면 이 정부가 정말 문제가 있다는 것 아니냐.” 최교수는 최근 <아세아 연구>에 발표한 논문에서 ‘서구 민주주의에서는 현실 생활에 기초를 둔 사회경제적 문제가 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자리 잡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과거사 진상 규명’ 같은 이념 대립을 불러일으키는 사안과 삶의 현실적 문제와 거리가 먼 ‘행정수도 이전’ 같은 지역개발주의적 사안들이 최우선 순위에 자리 잡았다’고 현정부의 정책을 꼬집은 바 있다.

일요일 오전 한강변의 정담은 박계동 의원이 노대통령을 ‘백설공주’에 비유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요즘 술자리에서는 백설공주가 유행인데, 무슨 뜻인 줄 아세요? ‘백주에 설치는 공포의 주둥아리’라고…. 민심이 이 정도면 정말 심각한 것 아닙니까? 하하하.”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시장이 노무현 정권과 각을 세우기로 작정했음을 실감케 하기에 충분했다.

이명박 시장은 사실 그동안 2등 전략을 구사해왔다. 다음 대선까지 아직 3년이나 남아 있는 데다, 일찍 나설수록 경쟁자들의 표적이 되기 때문에 임기를 마칠 때까지는 정치적 발언을 자제한 채 박근혜 대표를 조용히 따라 가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전략이 수정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9월24일 그가 “서울시장을 제압해야지 수도 이전 반대 여론을 막을 수 있다고 (정부가) 판단한 모양인데, 잘못 건드렸다”라고 대여 투쟁을 선언하면서부터다. 그는 이후로도 “서울시민 70%가 반대하는데, 서울시장이 가만 있으란 얘기냐” “수도 이전 반대운동에 서울시 예산을 지원할 수도 있다”는 등 계속해서 강성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당초 정부와 서울시가 대립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며 말을 아껴온 그가 이처럼 공세로 전환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해석이다. 우선 답보 상태에 빠진 지지율을 끌어올릴 호기로 보고 있다는 시각이다. 지난 6월까지만 해도 이시장의 직무수행 능력에 대한 평가는 만족할 만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소장 김헌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월과 6월에 조사한 이명박 시장 지지도는 ‘잘하고 있다’가 각각 63.2%와 61.7%로, ‘잘못하고 있다’의 2배 이상이었다. 취임 이후 서울광장 조성, 청계천 복원 사업 착수, 뉴타운 계획 발표 등 의욕적으로 정책을 추진한 데 힘입은 높은 지지였다. 이시장 처지에서는 그런 추세로 서울시장 임기를 마치고 나서 ‘짠’ 하고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 경우 어렵지 않게 박대표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다.

하지만 서울시가 교통체계를 개편한 후 실시한 7월13일 조사에서 이시장 지지도는 반 토막이 났다. ‘잘하고 있다’가 30.2%, ‘잘못하고 있다’가 66.5%로 역전된 것이다. 그즈음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발언까지 알려지면서 여론은 더 악화했다.

이에 반해 박근혜 대표 지지도는 요지부동처럼 비쳤다. 약간의 출렁거림은 있지만, 대다수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한나라당 차기 주자로 굳어지는 추세가 계속되고 있다. 추석 직전 실시한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도 차기 대통령감으로 박근혜 대표는 20.3%, 이시장은 4.8%를 얻었다. 이런 식으로 격차가 벌어질 경우 막판 뒤집기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생겼을 법하다.그러던 차에 불거진 박대표의 리더십 논란은 이시장측을 도발하기에 충분했다는 분석이다. 박근혜 대표는 국가보안법과 행정수도 이전을 놓고 전례 없이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에는 “국가보안법을 지키는 데 모든 것을 걸겠다”라고 하더니, 얼마 안가 “정부 참칭 조항은 폐지할 수 있고, 국보법이라는 이름도 바꿀 수 있다”라고 유연한 모습을 보였다가, 당 안팎에서 반발이 거세지자 금세 “처음 입장에서 바뀐 게 하나도 없다”라는 식으로 오락가락한 것이다. 수도 이전 문제에 대해서도 충청권 표를 의식해 내내 당론을 정하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수도 이전 반대, 충청권에 행정특별시 건설’이라는 어정쩡한 대안을 내놓았다.

이처럼 박대표가 혼선을 빚자 한나라당 안에서조차 ‘박대표로 되겠나?’ 하는 때이른 회의론이 나오는 실정이다. 이 틈을 타 한나라당 지지층 사이에 차기 주자로서의 이미지를 또렷하게 새겨보자는 것이 이시장측의 노림수인 셈이다. 실제로 이시장 주변에서는 ‘지금 치고 나가면 손해볼 게 하나도 없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 이유에선지 이시장은 여당뿐 아니라 박대표에 대한 불만도 서슴지 않고 표출하고 있다. 이시장은 “큰일을 할 때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 각론을 여러 개 내놓을 경우 각론을 놓고 서로 다투다 결국 원래의 목적을 놓치고 만다”라는 논리를 앞세운다. 수도 이전에 대해 반대면 반대만 분명히 하고, 충청도 개발 계획과 같은 각론은 집어치우라는, 박대표에 대한 노골적인 항명인 셈이다.

그렇다면 대권을 노린다는 이시장이 아예 충청도 표는 포기하겠다는 것일까. 이시장은 “나라 전체가 흔들릴 지경인데, 지금 어느 지역 표를 따지게 생겼느냐”라고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수도 이전을 막을 수 있다면, 자기 표는 희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측근들 발언을 종합해보면 이미 각본이 마련되어 있다는 인상이다. 한 측근은 “지금 박대표가 내놓은 대안은 충청권도 달가워하지 않는 방안이다. 서울시장에서 물러난 뒤에 충청 표심을 잡을 대안을 내놓아도 늦지 않다”라고 말했다.

박대표보다 손학규 지사 더 의식

이시장 진영은 박대표보다 오히려 손학규 경기도지사 쪽을 더 의식하는 분위기다. 이시장의 사조직 격인 동아시아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지난번 전당대회 때의 사례 하나를 들었다. 한나라당 소속 단체장을 소개하는데, 이시장이 소개될 때보다 손지사가 소개될 때 대의원들 사이에서 훨씬 더 많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와 이시장이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이때부터 이시장 쪽에서도 당 쪽에 신경을 쓰고 있는데, 손지사처럼 ‘잘’ 챙기지는 못한다고 밝혔다.

이시장 진영이 손지사를 더 경계하는 이유는, 최후 경쟁자는 결국 손지사라고 판단해서다. 이시장의 한 참모는 “다음 대선에서 박근혜 카드는 시기상조다. 박대표가 흔들리면 당연히 MB(이명박의 머리 글자)와 손학규 지사가 붙을 수밖에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아직은 여성 대통령을 받아들일 분위기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이시장측은 대신 박대표를 러닝메이트로 점찍고 있다. ‘MB는 외치, 박대표는 내치 구도가 환상적인 궁합’이라는 것이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본격화할 4년 중임, 정·부통령제 개헌론을 염두에 둔 포석이다.

이시장측은 수도 이전 반대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 경우 손학규 지사와의 경쟁에서도 일정 부분 우위를 점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선명 투쟁’을 통해 수도권 의원들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하고, 당내 영남권 의원들까지도 포섭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시장측은 이런 작전의 성공 여부가 결국 이번 국정감사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이 때문에 이시장은 10월6일 행정자치위원회 감사와 10월18일 건설교통위원회 감사를 앞두고 대선 후보 토론회를 준비하듯 대책을 마련 중이다.

기자가 서울시를 찾은 10월1일만 해도 오전 9시에 국정감사 대책회의가 열린 데 이어, 오후 2시에 또다시 ‘수도이전 관련 핵심쟁점 보고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시장을 비롯해 관련 실·국장이 대거 참석했는데, 오후 5시를 훌쩍 넘겨서야 끝이 났다. 한 참석자는 “이시장이 정면 돌파, 진검 승부의 진면모를 보일 것이다”라고 귀띔했다. 이시장측은 10월4일 열린 보수 단체의 대규모 집회와 10월28일로 예정되어 있는 ‘서울의 날’ 행사가 이시장의 투쟁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리라고 기대했다. 특히 ‘서울의 날’ 행사 때는 수도 이전에 반대하는 100만 인파를 모은다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국정감사, 진검 승부로 돌파”

이번 국면을 넘기고 나면, 이시장은 다시 ‘문화’ ‘환경’ 지도자의 이미지를 살리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측근들은 입을 모은다. 서울시의 한 언론담당관은 이시장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불도저’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시장의 리더십을 ‘불도저 리더십’이라고 하는데, 정작 당사자는 이것이 개발 독재 시대의 밀어붙이기식 리더십을 연상시킨다며 피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대신 이시장은 환경을 생각하고, 문화를 향유하는 ‘웰빙형 리더십’을 추구한다. 이시장이 유독 환경 관련 행사에 적극적인 것이나, 패션쇼와 텔레비전 시트콤에 출연하는 식의 파격을 선보이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이시장측이 마련해놓은 시간표대로라면, 이시장은 취임 1주년-청계천 복원 사업과 강북 뉴타운 건설 착수, 2주년-서울시 교통체계 개편, 3주년-청계천 복원 완성, 4주년-용산 시민공원 착공 순서로 업적을 세운 후, ‘성공한 시장’으로서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게 되어 있다. 이 대선 일정의 순항 여부를 가늠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인지, 올 가을 이명박 시장의 정면 돌파 행보, 다시 말해 그의 ‘야망의 계절’을 지켜보는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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