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이 뽑은 올해의 책
  • 魯順同 기자 ()
  • 승인 1999.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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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세느강은 좌우를 가르고 한강은 남북을 나눈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임지현 지음·소나무 펴냄

추천인
문부식(<당대비평> 주간)
조형준(문화 비평가)
유시민(자유 기고가)
현택수(고려대 교수·사회학)
임지현(한양대 교수·사학)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격렬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실제 그랬다. 올해 내내 강연이나 학술대회 때마다 쟁점이 되었고, 학생들은 질문을 퍼부어댔다.” 임지현 교수는 이 책 덕분에 논쟁과 토론으로 정신없이 지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혈통적 민족주의를 벗어나자는 그의 주장이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듯하다. 얼마전 장준하선생기념사업회가 마련한 학술대회도 달라진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는‘혈통과 언어에 기반을 둔 확고한 운명 공동체보다는 자율적 주체로서 시민 사회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두가 그의 제안에 선뜻 동의한 것은 아니다. 특히‘시민적 민족주의의 실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덕분에 그는 책을 펴낸 이후에도 부지런히 논문과 에세이를 내놓아야 했다.

“내가 말하는 민족주의가 프랑스 혁명과 같은 부르주아적 민족주의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타자로 배제해온 사람들을 민족 공동체의 범주에 넣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는 지금까지 민족주의 논의가 실제로는‘중산층 이상 남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여성·외국인과 열악한 지위의 자국 노동자들은‘우리 민족’의 ‘우리’에 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세느강은 좌우를 가르고 한강은 남북을 나눈다>
홍세화 지음·한겨레신문사 펴냄

반성을 모르는 지식인과
극우파를 향해 양심과 상식으로
벼린 칼날을 겨누었다.


파리의 택시 운전사는 한국 사회의 ‘등에’로 정식 초대되었다. 그는 ‘20년 동안 바깥에 있었던 덕에 나무는 못볼지언정 숲의 모양은 명확하게 볼 수 있다’며 초청에 응했다. 속내 이야기가 많았던 전작에 비해 <세느강은 좌우를 가르고… >는 목소리가 한결 높아졌다.

추천인 가운데 한 사람은, 올해의 책을 한 권만 꼽으라면 이 책을 꼽겠다고 말했다. 엄밀성을 갖춘 학술 서적보다 홍씨의 에세이를 더 높이 치는 이유는 지금 우리에게는 상식의 힘을 복원하는 것이 더 시급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무식보다 비양심이 더 문제라는 메시지가 선명하게 읽힌다.

타자에 대한 관용을 뜻하는 ‘톨레랑스’라는 말을 유행시켰던 홍세화씨는 이번에는 그 반대말인 ‘앵톨레랑스’를 부르짖는다. 내친 김에 반성을 모르는 지식인과 극우파를 향해 칼을 겨눈다. 기자라기보다는 동향 보고자에 가까운 언론, 엉터리 수사로 사실을 호도하는 칼럼니스트, 왜곡을 일삼는 특파원의 행태를 낯 뜨거울 정도로 까발려 놓았다. 그는 ‘정치 부재와 지역주의를 개탄하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그런 동향 보고자들이다. 자신이 싼 똥을 자신이 더럽다고 하는 꼴이다’라는 식의 독설도 서슴지 않는다. 양비론이란 결국 양시론에다가 체면 치레로 비판을 덧붙인 것일 뿐이라는 지적도 서늘하다. ‘양비론은 토론을 죽이는 일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누가 문제다’라고 하지 않고, ‘나는 고발한다’는 어법을 택한다.

왜 이렇게 독해졌을까. 책 속에 답이 있다. ‘광신주의자들의 열성이 수치스러운 것이라면 지혜를 가진 사람이 열성을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 신중해야 하지만 소극적이어서는 안된다.’(볼테르) 올해 사회과학계의 화두는 ‘제3의 길’과 ‘신자유주의’로 요약된다. 지난해 말부터 회자되기 시작한 제3의 길에 대한 논의는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생각의나무)을 비롯해 <제3의 길은 없다>(에릭 홉스봄 지음·당대 펴냄), <제3의 길은 가능한가>(안토니오 보비오·새물결)로 이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제3의 길>이 사회과학 서적인데도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랐다는 점이다. 하지만 한 소장학자는 ‘사회학의 논제에도 거품이 만연해 있음을 일러주는 사례’라며 씁쓸해 했다.

올해도 출판계는 신자유주의에 관한 궁금증에 답하느라 숨이 가빴다. ‘신자유주의, 파국의 드라마’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어두운 승리>(월든 벨로 지음·삼인)는 IMF 이후 제3세계 경제에 관한 보고서로 불릴 만하다. 필리핀의 사회학자 월든 벨로는 구조 조정 프로그램이 아프리카와 중남미로 하여금 ‘상실의 10년’을 겪게 했음을 밝혀냈다. 금융 위기가 닥치기 전, 이미 그는 ‘지금은 동아시아가 구조 조정의 칼날을 피해 갔지만 머지 않아 탈규제·자유화·민영화의 압력이 몰려올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국내 학자로는 고려대 강수돌 교수가 이와같은 관점을 이어갔다.

언어학자로 회자되던 촘스키가 사회비평가로 부각된 것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고발 때문이다. 시발점은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한울). 꼼꼼하면서도 거시적인 ‘내부 고발’은, 실천적인 지성으로서 촘스키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평전 <촘스키, 끝없는 도전>(그린비)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졌다. 이 책은‘학문적 전기’의 모범 사례로 상찬되었다.

좌파의 이념적 좌표를 찾는 작업도 활발했다. <폭력의 세기>(한나 아렌트 지음)와 <신좌파의 상상력>(조지 카치아피카스 지음)이 그것이다. ‘세계적 차원에서본 1968년’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신좌파의 상상력>은 프랑스의 68년 5월 혁명을 비롯해 70년대 미국의 학생운동을 한 묶음으로 고찰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18년 동안 망명자로 살아야 했던 독일 태생 한나 아렌트의 <폭력의 세기>는 뒤늦게 당도한 감이 있다. 하지만 온몸으로 ‘폭력의 세기’를 견뎌야 했던 지은이가 폭력의 본성을 집요하게 탐색한 이 책은, 지각에도 불구하고 환대를 받았다. <폭력의 세기>에 따르면, 폭력의 대립물은 비폭력이 아닌 권력이다. 그는‘권력이 폭력을 사용할 때 권력은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권력을 폭력을 써서 필사적으로 만회하려는 불가능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라고 지적한다. 두 책의 결론은 ‘행동 능력 복원.’ 도서출판 이후는,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이들의 사상이 폭넓게 수용되는 까닭을 여기서 찾았다.

김종철씨의 <간디의 물레>와 리영희씨의 <반세기의 신화>도 짚어 보아야 할 책으로 꼽혔다. <간디의 물레>는 <녹색평론> 창간 이후 그가 쓰고 말한 것을 한데 모았다. ‘걷자, 자동차를 타지 말자’고 말할 때 대책 없는 이상주의자로 손가락질을 받는다는 그는, 생각의 밑둥을 살피라고 요구한다. 생태적 세계관이란 지배와 피지배, 경쟁과 대결이라는 권력 지향적 생존 양식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이밖에 다양한 번역서가 독자를 즐겁게 했다.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텔레비전에 대하여>(동문선)는 지식인과 대중 매체의 관계를 일러준다는 점에서, 마크 포스터의 <제2 미디어 시대>(민음사)는 미디어 시대의 문화 변동 양상을 꼼꼼히 일러주는 책으로 관심을 끌었다.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푸른숲)에 대한 반색도 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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