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법 영업 탁규에 익사한 세일즈맨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9.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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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사품 범람·편법 판매 극성…영업 사원 자살까지
지난 2월23일 오전 3시30분쯤 울산시 중구의 한 아파트 화단에서 이 아파트 9층에 사는 ㅅ씨(31)가 떨어져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ㅅ씨의 왼손 동맥이 끊어진 것과, ㅅ씨 부인이 ㅅ씨와 심하게 다투고 집을 나간 후 ㅅ씨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ㅅ씨 몸에서는 타살 때 나타나는 흔적이 전혀 없어, 경찰은 ㅅ씨가 부인과 다툰 후 격분해서 동맥을 끊고 뛰어내렸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판단은 유품을 정리하던 가족이 ㅅ씨가 남긴 유서를 발견함으로써 뒷받침되었다.

그런데 유서들 중 하나가 SBS 텔레비전 <그것이 알고 싶다> PD에게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ㅅ씨는 죽기 7개월 전 ㅈ제약 영업사원으로 일했었다. ‘저는 회사 생활한 지 3년 된 직장인입니다. 이때까지 제약 회사의 비리에 관해 적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지만…’으로 시작되는 유서에서 ㅅ씨는, 수금 실적을 올리려다 6천만원을 빚지게 되었다며 제약 회사 영업 비리를 없애 달라고 호소했다. 제약 회사 영업 비리를 취재하려면 ㄱ씨 등 4명을 만나보라며 이름을 적어놓았다. 도대체 제약 회사들이 어떻게 영업하기에, 이 세일즈맨은 유서에까지 원한을 담아 놓은 것일까?

의약 분업이 잘된 선진국의 경우 제약 회사는 신약 개발과 약품 생산에만 전념하고, 의약품 유통은 도매 회사들이 맡는 분업 체제를 갖추고 있다. 자연히 ㅅ씨처럼 약국을 돌며 수금하는 제약 회사 영업 사원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체제가 형성된 근본 이유는, 신약 개발이 반도체나 항공기 산업처럼 선진국 지위를 유지시키는 몇 안되는 첨단 산업이기 때문이다. 현재 신약을 개발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캐나다·일본·유럽연합뿐이다. 한국은 이제 겨우 ‘신약 1호’ 출시를 준비하는 걸음마 단계이다.

선진국은 제약 회사뿐만 아니라 도매 회사들 또한 견실하다. 일본 최대 제약 회사인 다케다(武田) 약품의 97년 매출액은 6천3백72억엔인데, 최대 도매 회사인 스즈켄은 그보다 많은 6천4백36억엔 매출을 기록했다. 그러나 의약 분업도 안된 한국(2000년 7월 실시로 연기)은, 제약 회사와 도매 회사 들이 한꺼번에 유통에 참여하는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러한 유통 구조가 제약 회사로 하여금 과도한 영업 경쟁을 촉발해 한 세일즈맨이 죽음을 선택하기에 이른 것이다.영세 제약회사, 모방 약품으로 유통망 교란

서양 의약품이 대량 보급되던 50∼60년대 한국은, 제약 회사는 생산에 전념하고 도매 회사는 유통만 하는 바람직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65년 동아제약이 드링크제 ‘박카스’를 발매하면서 이러한 구조가 깨지기 시작했다. 드링크제는 신약이 아니어서 약간의 제조력만 갖고 있으면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일본에서 드링크가 유행하는 사실에 주목한 동아제약은, 박카스를 출시하며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박카스를 ‘없어서 못팔’ 지경이 된 동아제약은 영업 조직을 만들어 열심히 공급했다. 이에 자극된 다른 제약 회사들도 비슷한 상품을 내놓고 광고를 하며 영업 조직을 가동했다. 제약 회사의 직접 판매는 도매 회사들의 입지를 좁혀, 그때까지 유통 시장을 주도하던 백광약품·천도약품·흥일약품 등 대표적인 도매 회사들이 쓰러졌다.

그러나 박카스처럼 소비량이 많은 물품은 직접 공급할 수 있어도, 조제약에 조금씩 들어가는 정제까지 제약 회사가 직판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직접 영업도 서울 등 대도시 약국에는 할 수 있어도, 인구가 적은 시골 약국에까지 팔러 다니면 채산이 맞지 않는다. 또 약국은 여러 제약 회사에서 나오는 수십 수백 가지 정제와 주사제 등을 복합적으로 주문하는 특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약국이 원하는 다품종을 소량으로 공급하는 도매 회사들이 어렵게나마 명맥을 유지해 왔다.제약 회사의 직접 판매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모두를 낳았다. 긍정적인 면은, 직접 판매로 영업 수익을 끌어올린 제약 회사들이 짧은 시간에 ‘걸음마’를 졸업하고 세계적인 제약 회사들과 경쟁해 볼 체제를 갖추었다는 점이다. 제약협회에 따르면, 그동안 착실히 성장을 거듭해온 동아제약·유한양행·동화약품·SK제약·제일제당·대웅제약은 신약 개발에 도전할 만한 기반을 닦았다고 한다.

잘 나가는 소수의 선두 주자가 있으면, 그 반대쪽에는 반칙과 탈법으로 음지에서 기생하는 세력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생겨난 곳이 2·3류 제약 회사들의 모사(模寫) 의약품 출시이다. 외국 제약 회사와 제휴한 1류 제약 회사들이 외국 제약사가 개발한 신약을 발매하면, 2·3류 제약 회사들은 잽싸게 모방 약품을 내놓았다. 모방 의약품이기는 하지만 한국 제약 산업도 발전했기 때문에 효능 면에서는 정품과 별 차이가 없는 것도 많았다. 모방 약품은 제휴료와 광고료를 내지 않기 때문에 값이 매우 싸다. 2·3류들은 약국을 돌며 이 점을 집중 홍보했다.

87년 정부는 물질 특허 제도를 도입해 모사품 출시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모사품은 돈을 노리는 ‘악덕’ 약국 덕택에 끈덕지게 명맥을 유지했다. 대한약사회는 모사품을 판매하는 약국과 이를 생산한 제약 회사를 적발하면 복지부에 고발해 영업 또는 생산 정지 명령을 받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처벌은 공무원과 업자(약사·제약 회사)가 결탁하면 얼마든지 완화될 수 있다. ‘영악한’ 2·3류 제약 회사들은 이러한 허점을 노려 모사품을 대량 생산해 일시에 출시한 후 모사품 생산 시설을 폐쇄하는 수법을 썼다.

모사품이 적발되면 복지부는 생산 중지 명령을 내리는데, 제약 회사 전체에 대한 영업 중지가 아니라 모사품 생산 라인 가동만 중지시킨다. 따라서 모사품을 대량 생산해 일시에 출고하고 라인을 세우면, 모사품 생산이 적발되더라도 손해 볼 것이 없다. 이런 실정이니 1류 제약 회사에 일찌감치 합병되었어야 할 2·3류 제약 회사들이 ‘굳세게’ 생존할 수 있었다.

부정 의약품을 판매하는 약국에 대한 단속 역시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기’였다. 적발되었을 때 약간의 ‘무마비’를 주고 단속을 피하는 것은 아주 초보적이다. 그러나 주위 눈이 있으니 적발된 약국은 ‘동업자’들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이용한다. 적발된 부정 의약품을 이웃 약국에 넘겨 계속 판매하는 것이다. 이런 약일수록 악덕 약사들은 손님이 찾아오면 ‘이 약이 싸고 좋다’고 권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평소에 동업자들에게 찍힌 ‘왕따’ 약국이 아니고는, 관계 기관에 고발되어 영업 정지를 당하는 약국이 없다.

‘덤’ ‘할인’ ‘할증’…수법도 가지가지

2·3류 제약 회사들이 생존할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의 영업 환경은 아무래도 열악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 등장한 것이 ‘덤’ ‘할인’ ‘할증’ 따위 판매 기법이다. 약국이 약품을 백 개 주문하면 제약 회사나 도매 회사들은 무조건 1백10개를 갖다 주는데, 이 10개가 덤이다. 덤은 이제는 아주 당연한 것으로 정착해 덤 없이 약품을 갖다 주는 업체는 ‘왕따’가 되기 십상이다.

할증은 약국이 약품 백 개를 주문했을 때 1백10개를 갖다 주며 30∼40개 더 얹어 주는 것을 말한다. 약국 처지에서는 덤을 포함해 40∼50개를 더 받게 되므로 ‘약값은 절반을 후려쳐야 제 값이다’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한 예로 ‘낙센’이라는 상품명으로 유명해진 ‘나프록센’은 진통제인데, 무려 스물세 가지가 유통되고 있다. 이 스물세 가지 진통제는 거의 비슷한 효능을 내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정품과 모사품을 포함해 효능이 유사한 약품이 부지기수이므로 할증은 영업력을 결정하는 변수가 된다.

할인은 수금과 관련된 용어이다. 영업 사원이 거래 약국으로부터 받아야 할 돈이 천만원이라고 하자. 영업 사원은 회사로부터 할당받은 수금 목표액이 있으므로 5백만원을 달라고 한다. 그러나 약국은 다음에 보자며 ‘백만원만 받아가라’고 해서 옥신각신 협상이 벌어진다. 이때 영업 사원이 ‘5백만원을 주시면 잔금 5백만원을 4백만원으로 깎아 주겠다’고 타협안을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할인이다.

할인은 현금이 필요한 제약사 처지 때문에 생긴 제도다. 한때 제약 회사들은 매출액 축소를 비롯한 갖가지 탈세 기법을 발휘할 수 있어서 할인해 주고도 이익을 남겼다. 그러나 국세청의 매출액 추적 기술이 발전하고, 제약 회사의 약점을 꿰뚫어보는 ‘빠끔이’ 약국들이 늘어나고, 또 제약 회사 간의 경쟁이 첨예화하면서 할인은 제약 회사의 재정을 오히려 압박하는 악습이 되었다. 그래서 자금줄이 당겨진 제약 회사들이 ‘파리 목숨’인 영업 사원의 목줄을 움켜잡는 악순환이 생겨난 것이다.영업 사원들은 수금 목표액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돈이나 은행·친지로부터 돈을 빌려 회사에 먼저 입금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던 차에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라는 경제 위기가 닥치자, 약국들은 그 핑계를 대고 입금을 미루었다. 이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데 약국에서는 수금이 되지 않는다. 경쟁이 치열한 판이니 ‘수금 불량’ 약국이라고 해서 거래를 중단할 수도 없다. 회사는 이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매일같이 수금 목표액을 채우라고 독려하니, ㅅ씨처럼 빚쟁이가 된 소심한 세일즈맨은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룡’ 외국 제약·도매 업체 진출 방비책 시급

덤·할증·할인 따위 편법은 의료보험제도가 시행된 후 의료보험연합회가 제조 약품 약값을 일률적으로 정하면서부터 이미 제약 회사들에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약국이 가격을 정하는 ‘판매자 가격 표시제’가 제자리를 잡고, 엄격한 특허권·상표권 제도가 정착된다면 모사품을 만드는 2·3류 제약 회사들은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을 것이다.

현재 시판되는 약 중에는 ‘표준 소매가’를 붙인 것이 많다. 일반 상품의 권장 소비자가와 유사한 표준 소매가는, 제약 회사가 산정해 제약협회의 심사를 받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약값은 절반 가까이 후려쳐야 제값이라고 믿는 국민이 많을 정도로 표준 소매가는 부풀려져 있다.

표준 소매가가 높게 책정되었기 때문에 보건복지부는 지난 1월20일부터 약국에서 가격을 결정해 가격표를 붙이는 ‘판매자 가격 표시제’를 시작했다. 복지부는 이 제도가 자리를 잡으면 약국 사이에 경쟁이 일어나, 약값 거품이 걷히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이후 제약 시장이 빠르게 열리고 있다. 외국 제약사들과, 스위스의 주릭 사를 필두로 한 외국 도매 회사들이 외환 위기 이후 더욱 만만해진 한국 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다. 이에 대한 방비를 서두르지 않는다면 한국 제약업체는 ㅅ씨처럼 한을 품고 자살하는 영업 사원을 양산하다가 자멸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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