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 노동부 장관 "특단의 비상 계획 수립"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8.04.0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기호 노동부장관 인터뷰/“공격적 실업 대책 강구”
보살펴야 할 새로운 고객이 기하 급수로 늘고 있기 때문일까. 김대중 정부에서 ‘정리 해고’되지 않은 유일한 국무위원인 이기호 노동부장관은 눈이 충혈되고 목소리가 갈라지는 등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3월19일 대통령 업무 보고를 끝낸 이장관을 집무실에서 만나 한국 사회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대량 실업 사태를 어떻게 풀어 갈 요량인지 들어 보았다. 장관실 면적을 50평에서 17.5평으로 대폭 줄인 사람답게 이장관은 실업 해일을 정부가 솔선 수범하고 국민 모두가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누면서 헤쳐 가자고 호소했다.

노동부의 올해 실업자 수 예측이 지난해 12월 80만명에서 3월 초에는 1백30만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정부가 상황을 너무 쉽게 보았던 것 아닌가?

실업 전망은 경제가 얼마나 성장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난해 말 국제통화기금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성장률이 3% 가량 될 것으로 예측해 실업자 수가 80만명이 될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산업 생산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등 갈수록 경제가 나빠지고 있다. 올해 수출이 아주 잘된다고 하더라도 경제 성장률이 1%에 그칠 것이라고 판단해 실업자 수를 1백30만명으로 수정한 것이다. 계절적으로 노동 시장에 신규 공급이 많아지는 3∼4월에는 1백50만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국내외 연구기관과 노동 전문가들의 예측은 더 비관적이다. 올해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전망되는 데다가 대규모 사업장에서의 인력 조정은 이제 막 시작된 것 아닌가?

성장률에 관해 논란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모건 스탠리 같은 외국 투자기관은 올해 실업자가 2백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본다. 앞으로 쓰러지는 기업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질 것이고, 고용 조정 법제화로 4월 말쯤에는 거리로 내몰리는 노동자가 양산될 것이다. 기업 합병·매수가 시작되면 여기서도 실업자가 생기는 것이 불가피하다. 2백만명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경청하고 있다.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특단의 비상 계획을 짜고 있다.

비상 계획의 내용이 무엇인가?

남북 관계의 ‘충무 계획’같은 것이다. 정부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다는 차원이고,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한 예방 목적이 더 크다. 그러나 이 계획을 공개하는 것은, 사회 불안을 가중시키는 등 심리적 악영향이 클 것이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구조 조정을 해 경쟁력을 되살려야 하므로 어느 정도의 실업은 감수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수준이면 곤란하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어느 정도까지인가?

미국·유럽 국가들과 같은 고실업 상태를 견디려면 실업 증가 속도가 가파르지 않고, 실업의 충격을 사회가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두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실업률 9∼10% 수준은 우리가 감당할 능력을 넘어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노동 시장에서 일자리가 생길 틈은 거의 봉쇄되어 있는데, 어떻게 일자리를 만들 작정인가?

인력 공급과 수요가 극심한 불균형을 보이고 있다. 기업 도산만 해도 지난해 이맘 때는 1천1백 개였는데 올해는 3천3백 개로 세 배나 늘었다. 반면 민간 투자는 꽁꽁 얼어붙었다. 민간이 일자리를 만들지 못하면 정부가 해야 하는데, 정부도 국제통화기금 체제의 재정 긴축 상황에서는 운신할 폭이 매우 좁다. 추경 예산에서 2∼3개월간 5만명 고용 효과가 있는 공공 근로 사업을 벌일 예정이고, 올해 상반기 예산 배정 비율을 51%에서 61%(42조원)로 높였지만 쏟아지는 실업자를 소화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더 공격적인 일자리 창출 대책이 절실하다. 그래서 한전·도로공사 같은 공공 기관들이 국내외에서 채권을 발행해 이것을 재원으로 하여 일자리를 창출하는 공공 투자 사업 방안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1조원 투자하면 일자리를 2만 개 만들 수 있다.
오늘(3월19일) 대통령 업무 보고에서 일자리 창출 방안과 함께 사회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재원 마련 등에 다른 부처의 반대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실업 대책의 근간은 고용 보험 제도이다. 이것이나마 없었으면 어떠했을지, 아찔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고용 보험의 역사가 워낙 짧아서 수혜자가 매우 적다. 현재 전직 실업자의 28%(총실업자의 24%)만이 이 제도의 보호망 속에 있다. 수혜자들도 평균 3∼4개월밖에 실업 급여를 받지 못한다. 실업 급여가 끊긴 사람들과 아예 보호를 받지 못하는 실업자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다. 그래서 사회 안전망 구축이 필요하다고 제기한 것이고, 그러려면 10조원 정도 재원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부가 주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실업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대목이다. 기로에 서 있다.

노동부가 내놓은 실업 대책이 미약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이런 대책으로 어떻게 하반기에 실업자를 백만명 수준으로 줄일 수 있는가?

할 수 있다기보다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정책 의지를 밝힌 것으로 이해해 달라. 다각도로 예방적·공격적인 실업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현재 실업이 발생하는 가장 큰 원인은 기업의 휴·폐업과 도산에 있다. 실업의 60% 이상이 여기서 나온다. 일시적 자금 사정으로 경쟁력 있는 기업이 쓰러지는 흑자 도산만은 모든 경제 부처가 노력해 막아야 한다. 또 앞으로 예상되는 대기업의 대량 해고 상황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진의가 왜곡되어 다소 물의를 일으켰지만, 3월12일 경총 간담회에서 단번에 30∼40%씩 인력을 감원하는 것은 해고 회피 노력을 게을리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도 가능하면 실업을 줄여 보겠다는 예방 차원에서 한 말이다. 해고 회피 노력을 기울이는 기업에게는 정부가 고용유지지원금 등을 지원하고 있으니 적극 활용해 달라. 소요 자금의 3분의 1, 2분의 1 정도여서 충분하지는 않지만 이런 지원책을 활용하면 30% 감원할 것을 20%, 10%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직업 안전망 체계도 전면 재검토해, 구직과 구인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아 생기는 마찰적 실업은 될수록 줄일 생각이다.

눈앞에 닥친 실업자 2백만 시대를 감당하기에는 노동부의 역량이 크게 달린다는 시각도 있다.

고용 시스템이 불완전하고 실업자가 너무 빨리 늘다 보니 행정 능력도 턱없이 달려 실업자에게 제대로 된 서비스를 해주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인력 등을 확충해 실업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종합 관리하는 체제로 옮아 가려고 애쓰고 있다. 실업 대책 재원 5조∼6조 원을 마련하는 일도 쉽지는 않다. 관계 부처와 협의할 내용도 많다. 그러나 대통령이 현재 내각을 ‘실업 대책 내각’이라고 강조한 덕분인지 실업의 심각성에 대한 다른 부처의 감수성이 빠른 속도로 높아지고 있다. 실업 대책은 모든 부처가 합심해 짜내야 하는 종합 대책이다. 또 어차피 실업에 대한 충격은 올 한 해에 그치지 않는다. 3∼4년 간은 고실업이 가져 올 온갖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정부도 중·장기 실업 대책을 세워 비전을 제시하겠다. 효율적인 정책 수립과 집행을 위해 노동부에 별동팀을 두는 것은 물론 4월 말에 청와대나 총리실 직속으로 많은 부처가 참여하는 실업대책추진본부를 구성할 계획이다.

노사 갈등이 심해지고 있는데….

4∼5월은 임금 교섭과 단체 협상이 이루어지는 시기다. 이때가 올해 노사 관계를 좌우하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상급 노동단체 등에서 실업자동맹 같은 조직을 만들 움직임도 있는 것으로 안다. 사용자측도 강도 높은 구조 조정을 계획하고 있어 이 과정에서 노사가 갈등을 빚는 일도 많을 것이다. 노동부는 물론 4월 초에 확대 발족하는 노사정위원회에서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깊이 논의하겠다. 노사정 대타협 정신이 앞으로도 이어져야 한다.

이미 해고된 사람들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아직 해고되지 않은 사람들의 근로 조건도 급속히 악화하고 있다. 노동부가 부당 노동 행위 단속을 게을리하고 있다는 노동계의 비난이 만만치 않다.

그렇지 않다. 1∼2월에 6백건 가까이 단속했으며, 6월 말까지 2단계 점검 작업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기업이 적법하게 고용 조정을 하고 있다. 흑백 논리로 접근하면 대외 신인도에 금이 갈 수 있다.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야 외환 위기를 벗어날 수 있고 경제를 회복시켜 일자리도 창출할 수 있지 않은가. 정부는 이 문제의 내면에 깔려 있는 양면성을 두루 살펴 절충 지점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복수 노조를 허용하지 말라는 등 최근 주한 미국상공회의소의 주장은 지나친 것 아닌가?

미국 등 선진국에 우리 노동 시장의 문화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 눈으로 보면 분명 한국 노동 시장이 경직되어 있는 것으로 비치겠지만, 양질의 노동력과 직장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장점도 홍보할 계획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