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죽고 경제 살면 뭐하나
  • 文正宇·張榮熙 기자 ()
  • 승인 1998.04.0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백만 실업 시대, 정부 대책 역부족… 실직자 돕기 못지 않게 ‘실업 예방’ 힘써야
서울 도봉구 창 4동 두승빌딩에 자리잡은 노동부 서울북부지방사무소. 전국에서 가장 많은 사업장을 관리 감독하는 이곳은 이제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의 기자가 찾아와 사진을 찍어 갈 정도로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한국 경제가 얼마나 급속히 무너지고 있는지, 그리고 한국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이 얼마나 엄혹한지 실감할 수 있다.

특히 실업 급여를 지급하고 구직을 알선하는 고용보험과와 직업안정과가 들어서 있는 9층은 하루 종일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이곳에는 실직자가 하루 평균 천명 가량 찾아와 장사진을 치고 있다. 직원들은 아침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민원인을 상대하고 밤 10시까지는 민원인들이 남기고 간 서류를 고용 정보 전산망에 입력하느라 진땀을 흘린다. 그러다 보니 자연 업무 처리가 지연되어 창구에서는 직원과 민원인 간에 마찰이 끊이지 않는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견딜 재간이 없다. 위(노동부 본부)에 대고 사람을 더 달라, 장비를 보강해 달라 입이 닳도록 말하지만 소용이 없다. 본격적인 정리 해고는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노동부 일선은 보다시피 벌써 그로기 상태이다. 위에서 사태를 너무 안이하게 본 것 같다.” 고용보험과의 한 직원이 소음을 뚫고 화난 듯 소리 지른다.

“실업자 얼마나 발생할지 예측 불가능”

그의 말이 옳다. 올 들어 실업률은 정부의 예상치와 감당 능력을 훨씬 뛰어넘으며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그동안 노동부는 실업률 예측을 세 차례나 수정했다. 노동부는 지난해 말 올해 실업자가 80만명에 달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그 뒤 예상치를 1백9만명, 1백30만명으로 계속 상향 조정했다. 이기호 노동부장관은 3월19일 김대통령에게 올해 3∼4월께 실업자가 1백50만명으로 정점에 달했다가 이후 조금씩 떨어져 98년 연간 평균 실업자는 1백30만명에 달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통계청이 공식 집계한 가장 최근 자료에 따르면, 올 1월 실업률은 4.5%, 실업자는 93만4천명이다. 이 수치를 노동부가 발표한 실업자 수에 대입하면 올해 평균 실업률은 6.2%를 약간 웃돌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지난해 10월까지만 해도 실업률은 2.1%, 실업자는 45만1천명이었다. 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올해 경제 위기가 한국에서 85만 개에 달하는 일자리를 순식간에 날려 버릴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이같이 상향 조정된 노동부의 발표조차도 여전히 미덥지 못하다. 세계적인 투자 자문 회사인 모건 스탠리는 최근 한국에서 구조 조정으로 재벌 기업과 금융기관 부도 사태가 빚어져 올해 실업자가 2백만명에 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국내 노동 전문가 중에서도 올해 한국의 실업자가 2백만명을 넘어설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김재원 교수(한양대·노동경제학)는 “우리나라의 실업률을 단순히 경제성장률만을 기준으로 계산해서는 안된다. 구조 조정이 이루어지고 있고, 고용 흡수력이 낮아지고 있으며, 민간 투자 위축에 시장 개방이 가속화하는 복합적인 상황에 놓여 있어, 한마디로 실업자가 얼마나 발생할지는 예측이 불가능한 상태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미국 자본이 들어와 무자비하게 감원을 요구할 것이 뻔하고, 대기업보다 고용자가 많은 중소기업이 연일 도산하고 있기 때문에 실업자가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의 예측이 맞아떨어진다면 한국은 두 자릿수 실업률 시대에 진입하게 된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정부의 대응 자세에서도 긴장감을 엿볼 수 있다. 3월17일 제2차 경제대책조정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내각 전체가 실업 대책 내각이라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11일 열린 제 1차 경제대책조정회의에서는 “실업 보험을 실시하고 있지만 지급하고 난 후에도 직장을 다시 구한다는 보장이 없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대책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구제를 못하면 성의라도 보여주어야 한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성의라도 보여주어야 한다는 대통령의 말에서 정부가 실업 사태에 얼마나 당혹해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지금의 실업 사태는 본격적인 지진에 앞선 예진에 불과하다. 지금까지는 일부 화이트칼라 노동자, 그리고 휴·폐업한 중소기업이나 영세 업체 노동자가 실업자의 대종을 이루었으나 3월 말부터는 대기업 구조 조정에 의한 실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3월18일부터 삼성·현대·LG·SK 등 대기업들이 명예·희망 퇴직 신청을 받는 등 대량 감원을 위한 준비 운동에 들어갔다.

지난 3월12일 이기호 노동부장관과 30대 그룹 인사·노무 담당 임원들은 간담회에서 의견 충돌을 빚었다. 이 자리에서 이장관은 ‘대기업이 일시에 근로자를 30∼40% 해고할 경우 해고 회피 노력을 게을리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밝혔다가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30대 그룹 임원들은 간담회가 끝난 뒤 기자회견에서 ‘이장관의 발언이 오히려 고용 조정을 가로막는 위법 소지가 있는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를 곱씹어 보면, 대기업들이 일시에 30% 정도의 감원도 불사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고용 조정을 선도하고 있는 삼성·현대의 경우 각각 그룹 전체 인원의 30% 정도인 5만명 이상을 감원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고 있으나 회사측은 부인하고 있다. 현대노조총연합회(현총련)의 한 간부는 “현대자동차써비스의 경우 회사측이 전체 직원 1만4천여 명 가운데 최악의 경우 8천7백명까지 해고할 수 있다고 통보해 왔다”라면서, 지금 분위기라면 대규모 감원 태풍이 불 것이 확실해 보인다고 말한다. 대기업의 대량 해고에 이어 하청 업체들의 도미노 감원이 보태진다면 실업은 4∼5월께 말 그대로 홍수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사회안전망 구축할 재원 마련 난망

여기에다 외국 기업들의 한국 기업 인수가 본격화하면 노동 시장은 그 뿌리가 흔들릴 만큼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최근 미국상공회의소측이 한국 정부에 근로기준법상의 퇴직금 지급 조항을 철폐하라고 요구하는 등 한국 시장 상륙 작전에 돌입한 상태이다. 노동부 서울서부지방사무소의 한 관계자는 “대기업 감원에 이어 외국 기업의 적대적 기업 합병·매수 등이 꼬리를 물면 노동부의 일선 업무 처리 기능은 완전히 마비될지도 모른다”라고 우려한다.

최근 정부가 각종 실업 대책을 쏟아내고 있기는 하다. 노동부는 일단 김대통령의 말대로 어떤 의미에서는 대책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고용보험제도 보완에 들어갔다. 노동부는 현재 전체 노동자의 24%밖에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고용보험제도를 점진적으로 모든 사업장에 확대한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당장 돌아오는 어음도 막기 힘겨운 종업원 5인 이하 영세 사업장들이 노동부의 시책에 호응할지 의문이다. 실제로 노동부는 지난 1월부터 10인 이하 사업장부터 고용보험을 확대 실시하고 있으나 가입 실적은 미미하다. 또한 현재 노동부의 인력으로는 모든 사업장의 고용 보험 관리가 사실상 불가능한 형편이다. 따라서 1∼2년 사이에 저소득층 노동자가 고용보험제도에 편입되어 혜택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노동부는 또 2월 임시국회에서 추경 예산 1조 5천억원 배정을 승인받아 4월1일부터 고용 보험 가입자뿐만 아니라 실직자 전원을 대상으로 생활안정자금·창업자금·주택자금을 대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북풍 등을 둘러싼 여야의 대립으로 추경 예산안 편성이 계속 미루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노동부는 이와 함께 자금 출처 조사가 완전 면제되는 1조6천억원 규모의 고용안정채권을 3월23일부터 발행해, 4월부터 실직자를 대상으로 대출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노동부가 중점을 두고 펼치려는 사업이 ‘사회안전망’구축이다. 고용 보험 혜택을 못 누리는 76%의 실직자, 그리고 실업 급여 지급 기간이 완료될 때까지도 취업하지 못하는 실업자에게 최소한의 생계 대책이라도 마련해 주자는 계획인데, 문제는 재원이다. 노동부는 이 사업에 소요되는 10조원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와 정부투자기관 산하단체 직원 봉급의 10% 반납, 5천만원 이상 예금(총 3백조원) 이자에 1%씩의 실업세 부과 방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는 준조세라는 이유로 다른 부처가 반대하고 있어 실시가 불투명하다.

노동부는 이밖에 공공투자사업 확대, 지방자치단체나 민간 단체의 실업자 구제 사업 지원 등을 검토하고 있으나 노동부 관계자들조차 실업자들이 ‘겨우 목이나 축일 정도’의 효과밖에는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노동부 조순문 고용정책실장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하지만 노동부의 대책으로는 구조적 실업을 막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3월11일 제1차 정부 경제대책조정회의에서 유종근 대통령 경제고문은 “한국 경제는 시장 개방을 통해서만 체질이 강화된다. 경쟁 낙오자들은 사회적으로 배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유고문처럼 현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은 실업 문제보다는 외자를 도입해 경제를 살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일단 한국 경제 체질을 강화하면 실업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정부의 실업 대책은 실업 예방보다 사후 대책 쪽에 더욱 무게가 실려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구조 조정에 성공한 나라들조차도 거의 예외 없이 실업 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전후 최고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미국 노동자의 28%가 고용 불안에 시달리고 있으며, 대다수 노동자의 생활이 70년대 수준으로 후퇴했다는 보고도 있다. 구조 조정이 경제 체질을 강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에는 틀림없지만 결코 일자리를 늘려 주지는 않는다는 반증이다.

멕시코는 훌륭한 반면교사이다. 멕시코가 채무자들의 강요에 따라 구조 조정을 실시한 결과 한 때 이 나라에서는 3백만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실업 예방에 힘쓰지 않고 구조 조정에만 매달리면 한국도 같은 전철을 밟을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 조동철 연구위원은 ‘기업 도산 방지와 불법 해고 규제 등 실업 예방에 힘쓰지 않고 실업자들에게 돈을 들이붓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한다. 경제 회복 속도를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정부의 실업 대책은 예방에 더욱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가 불행해진다면 경제를 살린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