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한 성장 환경이 낳은 위험한 지도자
  • 워싱턴·卞昌燮 편집위원 ()
  • 승인 1998.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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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 불우한 출생·성장 환경이 ‘비극 잉태’…‘위험한 짓’에 쾌감·자제력 박약·거짓말 ‘자기 파괴’ 초래
성추문 사건으로 최대의 정치적 곤욕을 치르고 있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52). 그는 요즘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은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를 무던히도 원망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금세기 들어 대통령을 지낸 그의 ‘바람둥이’ 선배들 중에 누구도 그처럼 역경을 당한 사람이 없다. 특히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했을 리 없는 케네디 선배를 생각하면 그는 더욱 분통을 터뜨릴 법하다.

워런 하딩(1921∼1923), 프랭클린 시어도 루스벨트(FDR:1933∼1945),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953∼1961), 존 F. 케네디(1961∼1963), 린든 존슨(1963∼1969)은 모두가 클린턴과 마찬가지로 대통령 재임 중 또는 퇴임 후 혼외 정사를 즐겼다. 하딩은 자기 부인의 친구와 15년 동안 불륜 관계를 지속했고, 오십 줄에 들어선 뒤에도 21세 아가씨와 6년이나 성관계를 유지했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칭송받는 루스벨트도 20대 개인 비서인 루지 머서와 밀회를 즐기다 부인 엘리너 여사에게 발각되어 이혼 직전까지 몰린 적이 있다. 또 2차 세계대전 영웅 아이젠하워는 케이 서머스비라는 아일랜드계 아가씨와 관계를 맺었으며, 민권 향상에 이바지한 존슨도 사교계의 앨리스 글래스라는 여성과 무려 30년 동안 관계를 계속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역시 클린턴을 압도하고도 남을 사람은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에서부터 마피아 두목 샘 지안카나의 정부인 주디스 엑스너에 이르기까지 숱한 여성과 염문을 뿌린 케네디이다.

유년 시절부터 ‘불리하면 부인하는 요령’ 터득

클린턴이 이들 선배 대통령을 부러워했다면 아마도 이들의 불륜 관계가 자기처럼 속속들이 공개된 적이 없다는 점이 하나일 것이고, 이들이 특별검사라는 ‘강적’을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또 다른 하나일 것이다.

유복자의 아들로 태어나 불우한 가정 환경을 극복하고 최고 자리에 오른 클린턴은 링컨이나 루스벨트처럼 위대한 대통령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다. 실제로 92년에 이어 96년에 재선된 그는 복지와 교육 문제는 물론이고 소수 민족 인권 보호에 이르기까지 산적한 현안을 해결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때마침 사상 최대 경제 호황까지 겹쳐 잘만 하면 그 소원을 이룰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꿈이 다 허망해지고 말았다. 92년 대통령 취임 벽두부터 제니퍼 플라워스라는 여성과의 불륜이 폭로되어 그를 괴롭히더니, 이번에는 가장 위대한 대통령은커녕 ‘가장 혐오하는 대통령’ 반열에 끼기에 충분한 르윈스키 사건이 터져 버렸다.

모든 권력과 명예의 상징인 대통령이 자기 딸 또래인 잡급직 여성과 백악관 집무실·서재·욕실·복도를 오가며 섹스를 즐겼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그처럼 똑똑하고 상황 판단이 빠른 사람이 어떻게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를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그것도 이번뿐만이 아니라 25년 전 아칸소 주에서 정치 생활을 시작하던 때부터 말이다.

도대체 클린턴은 왜 정치 생명을 끝장낼 수도 있는 이런 위험한 짓을 반복해 온 것일까?

공인으로서 클린턴의 겉모습은 부인 힐러리가 표현한 대로 ‘자랑스러움’ 그 자체다. 미국인들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응징할 듯한 그의 발언에서 미국의 힘을 느꼈으며, 사회보장제도와 교육 문제에 대해 탁월한 해법을 제시할 때는 그만한 대통령감이 없다고 보았다.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주석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논의하고,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을 만나 경제 지원을 다짐하는 그를 보고는 외교에 관심 없는 국민조차 찬사를 보냈다. 한마디로 대중의 눈에 비친 클린턴의 국정 수행 모습은 조금도 흠 잡을 데가 없다. 직무 수행 지지율 60%를 유지하고 있는 대통령은 금세기 들어 그가 유일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어떤가. 가끔 부인 힐러리와 딸 첼시아의 손을 다정히 손잡고 백악관 뜰을 거니는 모습 정도가 그나마 클린턴의 ‘가정적인 모습’이다. 그의 사생활을 거론하면 사람들은 으레 그의 불륜을 연상한다. 스타 보고서에는 그가 자신의 과거 여성 관계에 대해 르윈스키에게 털어놓았다는 구절이 있다. 75년 힐러리와 결혼한 뒤에도 ‘수백 명과 관계를 가졌지만 나이 마흔이 들어서는 자제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그의 자제 노력은 번번이 실패했다. 왜 그랬을까.

대다수 클린턴 연구가들은 클린턴의 반복적인 습관이나 행동이 그의 불우한 성장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특히 성인이 된 지금도 자기에게 좋지 않은 일이나 불쾌한 일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부정하려 하는 습관은 유년 시절부터 몸에 밴 것이라고 분석한다.

유복자로 태어난 클린턴은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주정뱅이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밖에 나가서는 집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런 조숙한 행동 때문에 친구들은 그의 가정 환경을 몰랐다.

클린턴이 자라난 마을도 그의 성격에 영향을 준 것 같다. 그가 태어난 아칸소 주의 핫스프링스는 침례 교회가 10여 개나 있었는데도 술과 도박이 판을 치던 유흥지였다. 따라서 돈푼 깨나 있는 남자들은 으레 첩을 끼고 다니는 것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들은 가정은 가정대로 유지하면서, 아내 몰래 불륜을 일삼았다. 이런 모습이 어린 클린턴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짐작할 만하다.

클린턴 연구가로 이름난 데이비드 매러니스는 <항상 일등생>이라는 클린턴 자서전에서 ‘그는 무엇보다 유년 시절부터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부인하는 힘을 길렀다’고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클린턴은 일이 잘못되어도 상대가 100% 증거를 들이대지 않는 한 절대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는다.

바람둥이 신조 ‘들키지 않는 한 관계 지속’

그와 관련해 유명한 일화가 있다. 87년 여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섰던 게리 하트가 성 추문으로 도중 하차하자 클린턴은 은근히 겁을 냈다. 자기가 하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는 여성 관계를 대라는 측근들의 성화에 부인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한 참모가 그와 관계한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들의 명단을 내밀자 그때서야 마지못해 인정했다고 한다.

이처럼 클린턴은 막판에 들통이 날 때까지 불륜 관계를 속이려 했고, 또 그런 행동은 거의 별 탈 없이 넘어갔다. 정치학자이자 대통령 연구가인 찰스 존스에 따르면, 클린턴이 그토록 숱하게 불륜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무사 통과’ 심리가 주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람둥이 대통령인 린든 존슨에 관한 전기를 쓴 역사가 로버트 달렉의 견해도 비슷하다. 바람 난 대통령의 심리는 하나같이 ‘들키지 않는 한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그것이 사실인데도, 정작 당사자는 결정적인 증거를 들이대지 않는 한 모르쇠로 일관한다는 것이다.

물론 역대 어느 바람둥이 대통령에 비교해도 클린턴의 여성 편력은 유별나다. 섹스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이다. 그는 29세이던 75년에 힐러리와 결혼한 뒤부터 많은 여성과 혼외 정사를 했다. 그중에는 폴라 존스처럼 그가 찾아 나선 여자도 있지만, 스스로 클린턴에게 몸을 허락한 여성 파트너가 많았다.
80년대 중반 클린턴이 아칸소 주 지사일 때 마약 치료를 받던 배 다른 동생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한 가지에 중독되기 마련인데, 마약에 중독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권력이나 음식에 중독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섹스에 중독되기도 한다.” 아마도 그는 이 말을 하면서 알콜 중독자인 의붓아버지와 모르핀 중독자였던 할머니를 떠올렸을 성싶고, 속으로는 자신을 ‘섹스에 중독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법하다.

미국심리학회는 섹스 중독을 병으로 보지 않는다. 병이라고 진단하기에는 아직 충분한 임상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령 클린턴이 섹스에 중독되었음을 시인한다 해도 그를 병자로 취급할 수 없다.

“클린턴, 한 달만 치료하면 정상인 된다”

이와 관련해 섹스 중독증을 20년째 전문적으로 치료해 온 제롬 레빈 박사는 최근 <클린턴 신드롬>이라는 저서에서 ‘클린턴도 한 달만 치료받으면 정상인이 되어 백악관에 복귀할 수 있다’고 말해 관심을 끈다. 그에 따르면, 섹스에 탐닉한 클린턴의 정신 상태는,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어도 끊임없이 고독감을 느끼는 과정에서 성적인 모험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일종의 ‘석세스 신드롬’이지, 정신병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지타운 대학 정신과 브라이언 도일 교수가 지적했듯이, 섹스 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섹스에 지나치게 집착해 정상적인 판단 능력을 잃어버릴 때가 많다는 것. 특히 클린턴처럼 주기적이고 반복적인 성적 강박증에 빠진 사람은 일상 생활에서도 극과 극을 달리는 행동을 곧잘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욕실에서 자기 손은 수십 번씩 닦으면서도 막상 부엌은 엉망진창인 채로 놔두는 행위가 그것이다. 클린턴의 경우가 그렇다. 어떤 일에는 극도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때로는 르윈스키와의 불륜에서 보듯 상식 이하로 부주의하다.

도일 교수가 지적한 대로 클린턴의 ‘정상적인 판단 능력’을 의심케 하는 실제 장면이 스타 보고서에 나온다. 그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르윈스키가 자신에게 오럴 섹스를 하는 동안 태연스럽게 민주당 의원과 전화로 국사를 논의했다. 또 집무실 주변 곳곳에 개인 비서와 경호원 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섰는데도, 그는 혹시나 들킬까 봐 문을 살짝 열어놓은 채, 신음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르윈스키의 입을 막고 그의 유방과 성기를 애무했다. 성행위 장소가 대통령 집무실인 점도 문제지만, 정상적인 판단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행위인 것이다.

클린턴 특유의 행동은 또 있다. 분명 진실인데도 이를 끝까지 부인하면서 현란하게 말을 바꾸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폴라 존스측 변호사 앞에서 르윈스키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스타 보고서에 나타났듯이 그는 르윈스키와 열 차례나 오럴 섹스를 즐겼다. 그런데도 클린턴은 성관계라는 말의 뜻이 오럴 섹스가 아닌 ‘성교’인 줄 알았으며, 그 경우 자신의 증언이 맞다고 우겼다. 또 지난 8월17일 연방 대배심 증언에서도 그는 ‘르윈스키와 성교하지 않았으므로 자신은 결코 위증하지 않았다’고 강변했다. 한마디로 고도의 말장난인 것이다.

또 하나의 고전적인 예를 들어 보자. 92년 클린턴이 대통령 선거 유세 때 제니퍼 플라워스가 ‘클린턴과 12년간 성관계를 맺었다’라고 폭로했을 때다. 물론 클린턴의 첫 반응은 ‘그 주장이 진실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기자들이 구체적인 증거를 들이밀자, 그제서야 그는 “내 말은 그와의 관계가 12년간 계속되지 않았다는 뜻이지 섹스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변명했다. 또 성적인 관계를 함축한 표현인 ‘동침’이라는 말을 써서 ‘제니퍼와 동침한 적이 없다’고 한 자신의 주장을 기자들이 믿으려 하지 않자, 이내 ‘내 말은 문자 그대로 (섹스는 했을지 몰라도) 그와 함께 잔 적은 없다는 뜻’이라고 둘러댔다.

아무튼 4백 쪽이 훨씬 넘는 스타 보고서에는 클린턴이 이같은 현란한 어휘를 써서 촘촘한 법망을 요리조리 피하려 한 흔적이 곳곳에 널려 있다. 그러나 스타 검사는 그의 말장난을 일축하고 위증과 공무방해 혐의 등 무려 열한 가지 탄핵 사유를 적시했다.

물론 클린턴의 성격 중에서 강한 성적 욕망이나 정상적 기준의 자제력 부족, 실패 가능성에 대한 부인, 공직에 대한 탐닉은 권력지향적이고 야심 많은 사람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유전적 특징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런 요인이 잘 통제하면 성공의 원천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클린턴처럼 자기 파괴적인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정신과 의사인 제임스 리버먼은 최근 <워싱턴 포스트>와 가진 회견에서 재미있는 비유를 했다. 즉 최고 권력을 가진데다가 섹시하기까지 한 클린턴은 마치 금세기 초의 거대한 타이타닉호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클린턴도 처음에는 타이타닉호처럼 자기가 절대 침몰하지 않으리라고 착각했지만, 결국은 빙산과도 같은 르윈스키와 충돌해 하루아침에 침몰하고 있다는 것이다.

클린턴의 천운 다했는가

물론 클린턴호가 완전히 침몰할지는 두고볼 일이다. 현재 국민 여론은 그의 행위가 괘씸하지만 나머지 2년 임기는 끝내라는 주문이다. 그렇다고 앞으로의 상황 전개가 클린턴에게 반드시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 스타 보고서가 인터넷에 공개된 데 이어 21일에는 연방 대심원 증언 녹화 장면마저 공개되었다.

돌이켜보면, 클린턴은 성 추문으로 중대한 고비를 맞을 때마다 때로는 아내 힐러리의 정치적 수완 덕에, 또 때로는 자신의 도덕적 결함보다는 국정 수행 능력에 점수를 후하게 준 국민의 지지 덕에 살아 남았다. 위기 극복에는 운도 따랐다. 무엇보다 미국 경제가 호황이었던 것이 그에게 천운이라면 천운이었다. 만일 경제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과 같은 사건이 터졌다면 여론은 탄핵을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30세에 아칸소 주 검찰총장에 임명된 데 이어 32세에 아칸소 주 지사에 당선되고, 마침내 46세에 대통령 자리에 오른 클린턴. 성공 가도를 달리면서 좌절과 패배를 모르고 산 그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지난 1월17일과 8월17일 두 번이나 위기에서 벗어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두 번 모두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기보다는 자신의 행위를 부인하고 변명하려 했다. 유년 시절 은연중 고착된 ‘현실 부정’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만일 클린턴이 탄핵의 심판대에 오른다면, 다른 누구를 탓하기 앞서 자기 파괴적인 이같은 습관부터 탓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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