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권의 거품에 갇힌 오렌지족
  • 宋 俊 기자 ()
  • 승인 1998.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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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상류층 자녀, 풍족 누리며 ‘호화로운 방황’
미국의 한국인 유학생 문제를 오랫동안 다루어 온 로스앤젤레스 <중앙일보>의 김성찬 사회부장은 유학생을 네 부류로 나눈다. 첫째는 고학생, 주경야독형이다. 다음은 면학파. 학비를 아껴 가며 공부에 매진한다. 장학생도 여기 속한다. 그 다음이 오렌지족으로, 유흥이 전공이다. 마지막으로 특권 엘리트 자녀. 경제적 여유를 만끽하면서 공부한다.

뒤의 두 경우가 상류층 자녀인 셈인데, 그 격차가 천양지차다. 엘리트 자녀는 유학을 마친 뒤 미래가 보장된 자신의 자리로 복귀하지만, 오렌지족은 다르다. 뚜렷한 목표보다는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다.

위의 네 부류 가운데서 가장 도드라지는 것이 바로 오렌지족이다. 삶의 양태도 가장 튈 뿐더러, 수적으로도 많다. 이들의 행태는 국내로 이어진다. 방학을 맞아 귀국한 ‘수입 오렌지족’이 말썽을 일으킨 기사는 매해 여름·겨울 언론의 구석구석을 장식한다.

이들이 뉴스의 주인공이 되는 연유는, 일부 부유층의 왜곡된 가치관과 환경·여건 따위가 복합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자식을 통해 부와 지위를 과시하려는 부모의 사치와 허영이 아이를 망친다. 어려서부터 외제와 돈에 길든 아이는 자라면서 가치관의 혼돈을 겪게 될 우려가 많다”라고 조연순 교수(이화여대·초등교육과)는 지적했다.

“부모의 허영이 자식을 망친다”

상류층 자녀는 유아기부터 학창 시절까지, 일단 부족함을 모른다. 원하는 것은 뭐든지 OK! 따라서 이들의 판단 기준은 자신의 호불호와 경제권자(부모)의 요구로 요약된다. 부유층 자녀의 과외 교사 ㅇ씨는 자신이 가르치는 남자 중학생의 운동화가 스물두 켤레나 되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노라고 밝혔다. 눈에 띄는 새 브랜드는 빠뜨리지 않고 사들여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특권층의 지위를 만끽하는 사례도 있다. 한 재벌 2세는 대학 시절 ‘가방 모찌’ ‘출석부 대타 요원’ 등을 거느렸다고 전해진다. 고위 관리의 아들과 친구였던 ㄴ씨는 ‘시험 대타 요원’ ‘채홍사’까지 함께 어울려 지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성장기에는 특권처럼 보였던 것들이 결국은 당사자의 목을 죄는 경우가 있다. 바로 성적이다. ‘힘을 써서’ 부정 입학을 할 수는 있지만, 공부 자체의 성취를 이루지는 못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유학이 유력한 피난처 구실을 한다.

조기 유학은 한국의 ‘입시 지옥’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절묘한 타협이다. 대학을 마친 뒤의 도피성 유학도 마찬가지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미유학원’의 이삼랑 원장은 “조기 유학자나 취업 못한 핑계로 유학 온 사람이 의외로 많다”라고 말한다. 문제는 이들이 애당초 공부에 뜻이 없다는 데 있다. 뜻이 없으니 재미가 있을 리 없다. 나중에는 아예 공부를 포기하게 된다. “2∼3년 학교에 안가 학적이 끊긴 경우가 적지 않다. 개중에는 뒤늦게 각성하고 학적을 되살릴 방안을 상담하러 오는 유학생도 간혹 있다”라고 이원장은 덧붙였다.

공부를 안하는 유학 생활은 ‘시간 죽이기’나 다름없다. 자기들끼리 어울리다 보니 영어 실력조차 최소한에 그치고 만다. 이같은 생활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자기 콤플렉스 따위를 동반하기 십상이다. 이를 잊기 위해 시간 죽이기는 더욱 향락적 형태를 띠게 된다. 심한 경우는 마약과 도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국내 오렌지족의 양상도 별반 다르지 않다. 벌써 10대까지 이 대열에 참여하는 실정이다. 지난 3월에는 부유층 중·고생 전용 나이트클럽 4개가 단속에 걸렸다. 고급 양주를 포함해 하룻밤 술값이 평균 30만원을 웃돈다.

85년부터 압구정동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한때 오렌지족과 어울렸던 이석영씨가 펴낸 르포집 <대한민국 상류 사회>는 상류층 자녀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호텔 골든벨을 울린 고교 3년생, 한달 룸살롱 출입비 2천여 만원, 58만원짜리 브래지어와 30만원짜리 팬티…. “그때의 호사스런 삶이 지금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들의 삶에서 진지함이나 따스함을 느꼈던 기억이 별로 없다”라고 이씨는 당시를 회상했다.

이들이 훗날 어떤 삶을 사는지는 그다지 밝혀지지 않았다. 20대 초반부터 개인 사업체를 차리는 경향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주로 호화 스포츠센터·카페·수입 레저용품점 등을 경영한다. 소비 박사로서 소비자 심리에 능통한 강점을 살린 전향이다.

IMF 파고가 한층 높아지는 가운데, 다운타운의 네온사인은 좀체 꺼질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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