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취재]“장석중, 4월 비료회담 막후 메신저 역할”
  • 李敎觀·吳民秀 기자 ()
  • 승인 1998.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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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단독 입수 ‘안기부 제출 보고서’에서 밝혀져
청와대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이 지난 1월24일 방북한 안기부 대북 에이전트 장석중씨(대호 차이나 대표)를 통해 당시 출범 예정이던 김대중 정부의 메시지를 북한 당국에 전달했던 것으로 최근 밝혀졌다. 이 메시지를 받은 조국평화통일위 안병수 부위원장은 장씨를 통해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외교안보수석으로 사실상 내정된 임수석에게 ‘구두 메시지를 신중히 검토하겠고 아마 좋은 소식이 곧 있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현재 ‘판문점 총격 요청 의혹’사건으로 구속된 장씨가 안병수에게 전달한 메시지가 누구의 것이었고 내용이 무엇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메시지가 임수석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시 장씨와 함께 방북한 김순권 교수(경북대·농학)가 안병수와 2월2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할 때, 안병수가 장씨에게 ‘임동원씨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 편지를 교환하자고 전하라’며 임수석에 보내는 메시지를 따로 전했다는 데서 확인된다.

임수석은 ‘옥수수 박사’로 유명한 김교수가 1월24일 방북하기 바로 전날 점심 식사를 함께 했는데 이 자리에 장씨도 참석했다. 따라서 당시 임수석이 안병수에게 전달된 문제의 ‘구두 메시지’를 장씨와 김교수에게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임수석이 이 날 점심 식사를 장씨와 김교수와 함께 했다는 것은 임수석과 김교수도 인정한다. 이와 관련해 한 정통한 소식통은 김교수가 방북하기 전에 김대중 당선자 진영의 최고위층 인사를 만났다고 증언했다.

안병수가 2월2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장씨와 김교수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한국 정부에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 것도 확인되었다. 안병수가 ‘비료 20만t과 식량 백만t 지원은 북남 우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서 ‘추후의 적십자사 회담, 기타 문제에 대해 기대해도 좋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그리고 안병수는 장씨를 비료 지원과 관련한 남북한 당국간 막후 대화 채널로 삼겠다면서 ‘모든 통신은 장사장을 통해서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시사저널>이 장석중씨와 김순권 교수가 지난 1월과 5월에 각각 한 차례씩 방북하고 돌아와서 청와대와 안기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확인했다. 이 보고서들과 함께 장씨가 1월 방북 직후 4월까지 베이징에 나와 있던 북한 당국자들과 직접 만나거나 또는 전화와 팩스로 접촉한 내용들을 안기부에 제출한 보고서들은 장씨가 4월11일 베이징에서 남북한 차관급 비료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남북한 당국간 막후 채널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입증한다(14쪽 사진 참조).

그러나 청와대는 장씨가 지난 4월11∼17일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한 차관급 비료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대북 비선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청와대는 비료 회담이 3월 말 베이징에서의 비공개 남북한 당국자 접촉으로 성사되었을 뿐 장씨는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청와대는 ‘장석중씨가 비료 회담을 막후에서 주선하는 등 DJ 정부의 대북 비선으로 활약했다’는 내용의 <시사저널> 제469호 기사에 대해 정정 보도를 요청해 왔다.

특히 청와대는 <시사저널> 보도 중 ‘비료 회담을 막후에서 움직인 인물은 북한에서는 아태평화위의 대남 공작 총책 강덕순이었고 한국에서는 안기부의 대북 에이전트 장석중이었다’는 보도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청와대는 ‘장석중에게서 비료가 필요하다는 북측의 메시지를 전해 들은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은, 조건을 명시하지 않은 채 비료를 지원할 수 있다는 뜻을 팩스로 강덕순에게 보냈다’는 대목이 사실과 다르다면서 정정해 달라고 요구해 왔다.

그러나 장씨가 1월24일∼2월3일 방북한 뒤 2월7일 안기부에 제출한 보고서는 청와대의 주장과 다르다. 여기에는 ‘안병수가 장씨에게 비료 지원 방법을 급히 연구 검토해 달라는 메시지를 우리 정부에 건네 달라고 부탁하면서 장씨를 남북한 당국간 메신저로 삼기로 했다’는 내용이 적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씨의 2, 3, 4월 북한 주민 접촉 보고서에는 그가 비료 지원을 둘러싼 남북한 당국간 메시지 교환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장씨, 북한 주민 접촉 보고서에도 상세 기록

실제로 장씨의 북한 주민 접촉 보고서를 보면 그가 4월11일 비료 회담이 열리고 진행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강덕순과 접촉하면서 한국 정부의 대북 비선으로서 활약했음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장씨는 2월14일 중국 단둥(丹東)에 나와 있는 강덕순과 통화를 갖고 두 사람이 비료 지원과 관련해 남북한 당국간 막후 대화를 주선하는 방법을 모색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통화에서 강덕순은 자기가 2월 말에 베이징에 나간다면서 장씨와 통신 방법을 논의했다.

비료 지원을 둘러싼 남북한 당국 간의 막후 대화는 2월 말까지 장석중과 강덕순을 매개로 팩스와 전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북한 당국은 한국 정부가 비료 지원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확인하고 3월 초 비료 지원과 관련한 방법을 강구하고 싶다는 의사를 강덕순-장석중 라인을 통해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고 한 정보 당국자는 밝혔다. 이에 청와대를 비롯한 한국 정부는 장석중에게 베이징으로 가서 북한 당국자들과 접촉하도록 지시했다고 그는 증언했다.

이 정보 당국자의 증언은 장석중의 3월 북한 주민 접촉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이 보고서에는 장석중이 3월11일 베이징 21세기호텔에서 강덕순과 만나 그 전까지 두 사람이 비료 지원 문제에 대한 남북한 당국의 의사를 담아 교환했던 팩스들의 내용을 검토한 것으로 적혀 있다. 그리고 이틀 뒤 장석중과 강덕순은 베이징 유양호텔에서 만나 비료 공급 방안들을 논의했는데, 여기서 강덕순은 장석중에게 한국 정부의 방침에 따른다는 북한 당국의 의사를 전달했다.

강덕순은 베이징에서 3월18일 장석중과 통화를 갖고 마지막으로 한국 정부의 비료 지원이 가능한지를 물은 뒤 북한 당국이 한국 당국과 협의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당시 장씨가 ‘비료 지원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다시금 전달하자 3월27일 강덕순은 장씨를 통해 3월 말에 비공개 남북한 당국자 접촉을 갖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남북 적십자사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베이징에 있던 통일원 국장을 현지에 대기하라고 한 뒤 청와대와 안기부의 국장 2명에게 다음 날 일찍 베이징으로 떠나게 했다.

당초 비공개 남북한 당국자 접촉 장소는 평양이었다. 이는 당시 정부가 청와대와 안기부 국장 2명의 중국 입국 비자를‘비정상적인’절차를 통해 발급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중국 방문 목적을 북한 방문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는 데서 확인된다. 그러나 다음날 베이징에 도착한 이들은 평양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대북 비료 지원을 위한 비공개 남북한 당국자 접촉은 이들 국장 3명과 베이징에 있던 북한 아태평화위 강덕순 국장 등 북한 당국자들 간에 이루어졌다.
베이징 비공개 남북한 당국자 접촉은 이처럼 장석중-강덕순 라인을 통해 성사되었다. 이는 베이징에서 강덕순이 4월8일 장석중과 통화해 ‘베이징 회담의 성사에 대해 감사히 생각한다’고 말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게다가 강덕순이 4월1일 베이징에서 장씨에게 전화를 걸어 ‘합의서 문제로 많이 시끄러웠다. 베이징 회담에 대해 필요 사항 연락 바란다’고 말했다는 사실도 장씨가 비공개 남북한 당국자 접촉의 막후 주역이었음을 뒷받침한다.

김순권 교수도 장석중씨가 비료 회담을 위한 대북 비선이었음을 인정했다. 김교수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나와 장사장은 방북하고 돌아와서 북한 당국의 비료 지원 요청 의사를 청와대 등 우리 정부 당국에 전달한 뒤 우리 정부와 북한 당국이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게끔 도왔다”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김교수는 “장사장이 필요했던 것은 그가 강덕순과 채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내가 장사장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라고 주장했다.

김순권 교수, 장씨의 대북 비선 활동 인정

김교수는 또한 “장석중씨가 나와 함께 비료 지원 문제와 관련해 남북한 당국간 막후 채널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임수석도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김교수의 이같은 증언은 장석중씨가 대북 비선으로 활동한 사실이 전혀 없다는 청와대의 주장이 틀렸음을 뒷받침한다. 현재 청와대와 통일부는, 김교수가 비료 회담 성사를 위해 막후에서 남북한 당국간 메시지 교환을 도운 사실은 인정하지만, 장석중씨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임수석은 1월22일 김교수와 함께 점심 식사를 했을 때 이외에는 장석중씨를 만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 소식통은 임수석이 지난 4월11∼17일 베이징 비료 회담 과정에서 장씨와 전화 통화를 하기도 하고 만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임수석이 장씨를 만난 배경은 한국 정부가 비료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이산 가족 상봉을 요구해 회담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장씨를 통해 북한 당국과 조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이 소식통은 밝혔다.

이 소식통의 증언은 장석중씨의 지난 4월 북한 주민 접촉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장씨는 베이징 비료 회담이 교착 상태에 빠졌던 지난 4월13일 베이징에 있던 강덕순과 전화 통화를 했다. 이 때 강은 ‘메시지 관계로 급히 평양에 간다. 최(희찬) 선생과 통신 연계를 가져라’라고 말했다. 이같은 사실은 앞서의 소식통이 증언한 대로 임수석이 장씨에게 비료 회담 교착 상태를 푸는 방안을 모색하라고 주문하자 장씨가 강과 전화 통화를 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장석중과 강덕순이 지난 4월13일 전화 통화 중 강덕순이 ‘메시지 관계로 평양에 간다’고 말한 것은 비료 회담 결렬 배경과 관련해 중요한 대목이다. 당초 임수석이 장석중씨를 통해 강덕순에게 전한 팩스에는 지원 조건이 적시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비료 회담이 열리자 통일부 정세현 차관 등 한국 대표단이 비료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이산 가족 상봉을 요구했다. 강이 4월13일 급히 평양에 들어간 것은 이산 가족 상봉 조건을 받아들일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남북한 당국이 3월28일 비공개 접촉에서 비료 지원 문제와 이산 가족 상봉 문제를 연계한다는 합의가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당시 합의가 있었다면 북한측은 이산 가족 상봉 조건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갖고 비료 회담에 참여했을 테고, 따라서 강덕순이 회담 도중 평양에 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평통이 4월21일 ‘남측은 회담에서 비료 제공 문제는 미루어 놓고 정치 문제들을 전제 조건으로 들고 나와 회담이 결렬되었다’고 비난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장석중씨는 이처럼 김대중 정부의 대북 비선으로 활약했다. 그런 장씨가 지난 9월 ‘총풍(銃風)’사건으로 구속되자 일각에서는 한국 정부로서는 그가 비료 회담 등 남북 관계의 이면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게다가 북한 당국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인천-해주 직항로 등 중요한 남북 경협 사업에 관여해 온 그가 지난 8월부터 북한 당국으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징후가 보였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16∼17쪽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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