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위기에 처한 여성 10만명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8.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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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10만명 이상…차별 대우까지 받아 생계 대책 ‘캄캄’
인천에 사는 여성 가장 김 아무개씨(41)는 지난해 12월 실직했다. 그후 일자리를 얻기 위해 시청·구청·동사무소·인력 은행·노동사무소 등을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고, 거리에서 모집 광고가 눈에 띄면 빠짐없이 신청해 보았지만 아직껏 김씨를 부르는 손길은 없다. 남편과 이혼한 김씨에게는 두 아이가 있다. 그것도 장애자이다. 딸(22)은 6급, 아들(20)은 1급(뇌성마비) 장애자다. 이런 아이들과 먹고 살기 위해 김씨는 그동안 물수건·단추·액세서리 만드는 공장을 전전했다.

생활 보호 대상자(생보자)로 동사무소에서 생계 보조(20여 만원)를 받지만 이 돈으로는 시영 아파트 임대료(10만원)와 각종 공과금을 내기에도 빠듯하다. 벌써 6개월째 임대료가 밀렸다. 김씨는 ‘사람 구실을 해 보게 하겠다고’ 삼육재활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던 딸을 집으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재활 비용(월 16만원)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생보자여서 공공 근로 사업에도 참여할 수 없다.

극심한 생계 압박을 받고 있는 김씨는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은 내가 없으면 밥도 먹을 수 없고 대소변도 가리지 못한다. 자살을 떠올리다가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일자리다. 제발 일을 하게 해 달라.”

남성에 밀려 재취업도 ‘별 따기’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 실직 여성은 김씨뿐이 아니다. 여성노동자협의회 여성실업대책본부 등에 일자리를 구하러 온 여성들은 으레 울음부터 터뜨린다. 헤어진 남편에게 구박받았다거나, 혼자 되어 아비 없이 자식을 키우고 있다거나, 나이 많다고 아무 데서도 써주지 않는다거나 갖가지 하소연을 하며 여성 가장들은 제 설움에 복받쳐 말을 잇지 못한다. 여성 가장 특별 직업 훈련을 하고 있는 여성민우회의 ‘일하는 여성의 집’ 김정희 간사는, 이들의 처지가 워낙 딱해 자신들도 신청을 받을 때 울음을 터뜨린다면서, 여성 가장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 구직이라고 말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성 실업자는 사회의 눈길을 끌지 못했다. ‘남성도 일자리가 없어 내몰리는 판인데 여자들까지 구제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 사회 통념이었다. 조순경 교수(이화여대·여성학)는 “기업이나 정부의 인력·노동 정책은 남성이 생계 부양자라는 점을 전제로 하는 가족 모델에 기반을 두고 있다”라며 ‘남성=부양자, 여성=피부양자’라는 모델이 과연 현실적 타당성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실제로 남편이 실직 등으로 경제력을 잃었다면, 그 가정의 생계는 아내가 떠맡을 수밖에 없다. 이들이 IMF가 낳은 새로운 가장이라면, 남편과 사별했거나 이혼 후 생계를 짊어진 여성이나 미혼모, 독신 여성들은 IMF 이전부터 가장이었다.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경우라도 남편이 실질적으로 가장 노릇을 하지 못하면 아내가 그 자리를 메워야 한다.

한국에서 여성 가장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95년 통계청 인구·주택 총조사에 의하면 홑부모 가구는 94만2천 호이다. 이 가운데 편모 가구는 전체 가구의 5%에 해당하는 78만7천 가구나 된다. 이 중에서 그나마 모자복지법에 따라 정부로부터 자녀의 학비 보조 같은 지원을 얼마간 받는 저소득 모자 가구는 4만3천 가구에 불과하다.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진 적은 없지만, 노동부는 실직 여성 가장이 10만1천명(98년 9월 현재)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전체 여성 실업자(50만명)의 20% 수준으로, 8월(8만6천명)보다 벌써 1만5천명이 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과소 평가된 수치로 볼 수밖에 없다. 올 10월 현재 여성 실업률은 5.8%로 남성 실업률(7.9%)보다 낮지만 여성 취업자 수가 남성보다 훨씬 큰 폭으로 줄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성 우선 해고’ 현상은 여기서 여실히 드러난다. 남성보다 여성의 실업률이 낮은 것은 여성의 경우 일자리를 잃어도 곧바로 실업자로 등록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른바 일자리가 없어 구직을 포기한 ‘실망 실업자’는 비경제 활동 인구로 분류된다. 가정으로 돌아간 것으로 간주해 아예 실업률 통계에서 빼는 것이다.
통계에서 여성 실직자 제외해 사회 충격 흡수?

노동연구원의 비공개 자료에 의하면 올해 실망 실업자는 전체 실업자의 약 40%이며, 그 대부분은 여성이다. 이 자료에는 ‘실업률이 급격히 높아지면 사회 혼란이 초래되므로 충격 흡수층이 필요한데 그 충격을 여성이 막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충격적인 내용도 들어 있다. 여성 노동자를 사회 혼란의 완충 장치로밖에 보지 않는 남성 중심 사회의 편견이 담겨 있는 것이다.

노동부 추산대로 실직 여성 가장을 10만명 정도로 본다 하더라도 이들의 태반은 당장 겨울 나기가 어렵다. 적어도 7만명 가량은 전혀 수입이 없는 극빈층이다. 최근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전국 32개 회원 단체를 통해 실직 여성 가장 만명에게 쌀(60㎏)이나 석유(1드럼)를 살 수 있는 14만원 상당의 쿠폰을 나누어 주는 겨울 나기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이 혜택을 받은 사람은 전체 실직 여성 가장의 10%에 그치는 데다 지원 규모 역시 굶거나 겨우 얼어 죽지 않을 수준에 불과하다.

이처럼 실직 여성 가장들은 대부분 겨울을 두려워해야 할 만큼 비참한 처지에 몰려 있다. 자녀가 둘인 고명숙씨(51)는 7년 전 이혼한 후 가장이 되었는데 해오던 파출부 일이 지난해 말부터 완전히 끊겨 현재 수입이 전혀 없는 상태다. 몸마저 아프지만 병원 갈 엄두도 못낸다. 19년 전에 혼자된 정혜랑씨(52)는 IMF 사태가 터지자마자 ‘고령 기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니던 직장에서 우선 해고되었다. 1년 동안 아무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아들이 20세가 넘어 정부의 모자 가정 지원마저 끊겼다. 또 임대 아파트 보증금이 백만원 올랐는데, 11월 말까지 이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노숙자가 될 처지다. ‘시계 제로’ 상황을 맞고 있는 정씨는 요즘 ‘이게 절망인가’를 혼자 되뇌는 습관이 생겼다.

이밖에도 △자신은 봉제 공장의 미싱 보조로, 남편은 용접공으로 맞벌이를 하다가 최근 둘 다 실직된 데다가 남편이 위암 판정을 받은 여성(서 아무개·35) △남편이 부도를 낸 후 해외로 ‘가출해’ 세 아이와 살 길이 막막해진 여성(오 아무개·33) △남편 폭력을 피해 자녀를 데리고 쉼터 등을 전전하며 연명할 방법을 찾고 있는 여성(임 아무개·31) △교통 사고로 척추 장애자가 된 남편의 폭언 속에서 직장마저 잃고 극심한 고통을 받아 정신 장애를 얻은 여성(장 아무개· 40) 등등 극한에 내몰린 사례가 셀 수 없이 많다.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 여성실업대책본부 최순임 상담부장은 “남편이 있든 없든 육아와 생계 책임을 지고 있는 여성 가장이 일자리를 잃으면 남성 실직자보다 더 심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실직 여성 가장들의 고통이 유난히 심각한 데는 물론 이유가 있다. 우선 이들은 대부분 임시직이나 일용직 같은 저임금 부문이나 영세 자영업에 종사해 왔다. 당연히 고용보험 적용 사업장이 아니어서 실업 급여 혜택을 받는 여성 가장은 없다시피 하다. 또 일을 해도 수입이 적어, 재산을 변변하게 모을 수 없다. 여성특별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서울·부산 지역에서 실직한 6백29가구(실직자 6백96명)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자료에 따르면, 여성 실직 가장들의 평균 재산은 남성 가장(5천만원)의 30% 수준인 1천6백만원(부채를 뺀 순재산은 1천3백만원)에 불과하다. 그만큼 버틸 여력도 적은 것이다.

그런데도 일자리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초유의 실업 대란 상황이라고 해도 남성 실업자의 재취업률은 17.8%(98년 4월 기준)이지만 여성은 1.4%에 그친다. 아예 재취업이 되지 않는다고 보아도 될 정도이다.

특히 IMF 사태 이후로는 구인 수요 자체가 줄었고, 청소부나 파출부, 식당 주방 보조, 경리직처럼 그마나 기혼 여성들이 갈 수 있는 직종에서 종업원의 연소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식당이나 파출부는 35세, 사무 경리는 28세가 상한선이라는 식이다. 절반에 가까운 40대 이상 실직 여성 가장들은 마땅히 갈 곳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20대도 아이가 딸린 기혼 여성은 늦게까지 일을 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사업주들이 기피하고 있다. 한 30대 실직 여성 가장은 한나절을 돌아다니다가 해질 무렵 찾아간 직업 소개소 문에 ‘아줌마 안 구합니다’라고 써붙인 것을 보고 그냥 주저앉았다고 털어놓았다.

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실직 여성 가장들의 절반 이상은 하루도 더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생계 곤란을 겪고 있다(51쪽 표 참조). 극빈층의 여성 가장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하기 때문에 직업 훈련을 받는 것조차 호사스럽다.
자녀 양육 문제 등 겹쳐 극심한 스트레스

앞서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의하면 실직 여성 가장의 자녀 가운데 12.3%가 진학을 포기했다. 여성 가장들은 가족 건강과 자녀 양육 문제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정서가 매우 불안하다. 정도가 심한 것은 아니지만, 실직한 여성 가장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폭력, 학교 결석, 음주 및 흡연 같은 비행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또 이들 가운데는, 이혼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아비 없는 자식을 키운다는 등의 피해 의식에 찌들어 공격적 성향을 보이는 등 스스로의 인생도 헝클어진 사람이 적지 않다.

물론 경제적 궁핍과 심리적 피폐로 절박한 처지인 실직 여성 가장에 대해 정부가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9월부터 정부는 실업 대책의 사각 지대였던 실직 여성 가장에 대한 대책을 많이 내놓고 있다. 9월 말부터 ‘일하는 여성의 집’ 같은 여성 단체의 66개 훈련기관에서 실직 여성 가장 3천2백명에게 특별 직업 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다. 훈련비가 무료인 것은 물론이고 훈련 수당 25만∼40만 원도 지급한다. 이 사업의 올해 예산은 46억원인데 내년 예산에도 백억원이 책정되어 있다. 여성단체연합 정강자 고용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참가한 실업 여성들이 스스로 놀랄 정도로 표정이 밝아지고 연대감을 느끼고 있다며 “이 프로그램은 정신적 충격을 흡수하는 효과도 내고 있다”라고 말한다. 물론 훈련을 마친 뒤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고 훈련생들도 조바심을 내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선 이들이 절망을 떨치고 힘을 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공공 근로 사업에 실직 여성 가장을 우선 배정하고 이들을 고용한 기업주에게 임금의 절반(대기업은 33.3%)을 6개월간 지급하는 채용 장려금 제도를 10월부터 시행하고 있는 것도 얼마나 많은 사업주가 호응할까가 관건이지만, 이들을 배려한 조처로 볼 수 있다. 9월부터 보건복지부가 50억원을 투입해 벌이는 사회 복지 도우미 사업(2천2백명)에서 여성 가장을 우선 배정한 것이나, 3천 가구의 저소득 실직 여성 가장을 한시적인 생활 보호 대상자로 선정한 것도 사지로 몰린 실직 여성 가장들을 다독거릴 조처가 될 수 있다. 내년에는 3백억원을 배정해 실직 여성 가장이 소규모 자영업을 하려고 할 경우 가게를 얻어 주는 자영업 지원(최고 5천만원) 사업도 추진된다.
“내년 공공 근로 사업에 우선 배정하라”

그러나 이런 대책들이 참혹한 지경에 이른 실직 여성 가장들을 다소 어루만져 주는 수준에 그치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정인수 연구위원은 우선 실직 여성 가장들로 하여금 지방자치단체에 등록하도록 유도해 실태를 파악한 후 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고, 민원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또 정연구위원은 여성 실업자 비율이 전체 실업자의 3분의 1인 만큼 직업 훈련에 적어도 20%는 할당해야 하며, 99년에도 공공 근로 사업(예산 2조원)에 실직 여성 가장을 우선 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 안전망을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남인순 사무처장은 “일정 소득 이하인 실직자 가정에 생계비는 물론 주거비·교육비·의료비 등을 보조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이 시급하다”라고 주장한다. 여성계는 이 법을 국회에 청원해 놓은 상태인데 아직 입법되기까지에는 험난한 여정이 남아 있다.

80년대 구미의 장기 불황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인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 구조 조정을 강요했다. 이미 세계를 휩쓸고 있는 거대 금융 자본의 약탈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자본 축적은 여성에게 한층 열악한 고용 조건을 만들고 있으며, 가정내 폭력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방식의 자본 축적이 남성 편향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국의 여성학자 다이앤 엘슨은 〈구조 조정에서의 남성 편향〉이라는 논문에서 ‘IMF와 세계은행 프로그램의 심각한 결함의 하나는 사회적 성(gender)을 무시하는 데 있다. 이들의 프로그램은 구조 조정의 부담을 여성과 남성 간에 불공정하게 분배하고 있다’고 질타하고 있다.

보건사회연구원 김승권 연구위원은 “범세계적으로 보편화해 있는 ‘빈곤의 여성화’흐름은 한국과 같이 가부장제가 강고해 성차별이 많은 나라에서 더욱 심각하다”라고 지적한다.

실직 여성 가장. 이들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최대 희생자이다. 우선 배려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운 사회적 약자인 것도 틀림없다. 실직 여성 가장들은 우리 사회의 화약고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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