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주 교수 방북기 "북한은 YS와 대화 않는다.
  • 이창주 모스크바 대학 초빙 교수, <시사저널> 편집자 ()
  • 승인 1996.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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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 이창주 교수가 본 북한 입장… 식량난 해소 돌파구 찾은 듯
모스크바 대학 초빙 교수이자 <시사저널> 편집자문위원인 이창주 박사는, 지난 7월6일부터 1주일 동안 북한의 대남 전위 기구로서 김정일에게 직접 지시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초청을 받아 북한을 방문했다. 김일성 사망 2주기 추모식에 맞춰 북한을 방문한 이박사는 권영호 조평통 위원장과 손국진 부위원장을 비롯해 고위 관계자들과 일부 군장성과도 만나 대미 관계와 4자 회담 문제, 대남 관계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현지에서 이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중심으로 그의 특별 기고를 싣는다.<편집자>

나는 지난 6일부터 1주일간 조평통 고위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작금의 미·북한 관계를 둘러싼 북한 지도부의 판단과 관련해 몇 가지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미국은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북한을 상대로 군사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평통 관계자들은 미군이 겨우 14명 희생되자 국내 여론에 굴복하여 병력을 철수시킨 소말리아 사태를 예로 들면서, 주한 미군이 엄청나게 죽거나 다칠 수 있는 자신들과의 군사 충돌을 미국이 택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둘째, 북한과 미국은 이미 대표부 설치를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했으나 북한이 필요한 환경 조성을 위해 지연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기본적으로 미·북한 관계가 과거의 경험으로 볼 때 한국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일정한 프로그램을 갖고 있으며, 또 상당한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조평통 관계자들은 지금과 같이 남북관계가 악화한 근본 원인을 김일성 사망 때 보여준 한국 정부의 조문 거부라고 지적하고 이를 ‘비인도적 처사’로 규정하며 흥분했다. 이들은 한국의 대북정책이 한마디로 북한에 대한 고립 정책이라고 간주하며 민족 화합이나 민족 교류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현 정권과는 어떠한 협상이나 대화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 지도부는 남북간 대화와 통일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지만 지금의 한국 정권과는 현실적으로 협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조평통의 한 고위 관계자는 “설령 우리가 (한국과의 대화를 위해) 가능한 방법을 찾고자 해도 군부나 인민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조평통 관계자들에 따르면, 최근 여러 경로를 통해 청와대로부터 밀사 접촉 제의를 받고 있지만 검토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조평통의 또 다른 고위 관계자는 “우리는 거의 모든 한국의 신문·라디오·텔레비전·잡지 등을 접하고 있는데, 한국 정부가 너무도 우리의 상황 및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한심하기 그지없다”라며 불평했다. 실례로 현장에서 본 북한의 상황은, 그동안 한국의 북한 전문가나 관리 들이 북한 체제 붕괴나 김정일 권력 장악에 대한 의혹설, 김정일 건강 이상, 북한의 경제적 파산 등에 대해 논의해온 것이 실제와 달리 다소 거리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민 세력 형성이 불가능한 북한에서 불만 계층이나 절대 빈곤 계층이 체제 도전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의 경협 약속 믿을 수 없다

 
이번 김일성 2주기 추모 행사에서 나타난 대로 노동당·군부·노동계급·청년동맹으로부터 절대적 충성을 받고 있는 김정일의 권력 장악은 확고 부동하며 절대적이다. 현재 단순히 사업 문제로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외국 인사 방문이나 북한 고위 인사의 해외 출장은 모두 김정일의 직접 결재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모든 분야에서 김정일의 직할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내가 김정일의 주석직 취임이 늦어지고 있는 데 대해 묻자 조평통의 한 고위 인사는“수차에 걸쳐 당·군·정부와 인민들이 취임을 건의하였지만 김정일 비서는 김주석에 대한 애도와 효성, 그리고 우리식 사회주의의 참모습을 보여야 된다며, 일정 기간을 유예하는 것이라고 답했다”라고 말했다.

북한 관계자들은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고려민주연방제가 한반도 통일에 최선의 선택이라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한 실무자는, 한국이 자기네 통일 방안만을 주장하고 북한측 연방제 통일 방안에 대해 허구성 운운하는 것은 통일 논의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최종 통일 방안은 남북이 서로 상대방을 존중하여 협상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김일성은 사망하기 하루 전인 7월7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하는 최종안을 결재하였다고 한다. 그 내용 가운데는 남북철도 및 도로 연결과 복원, 개통, 이산가족 상호 왕래, 판문점 개방, 역사 공동 발굴, 경제 물자 교류, 서울과 평양에 대표부 설치 등 획기적인 사항들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북한은 현재 절박한 식량 사정과 관련해 어떤 돌파구를 열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나는 이번에 조평통 관계자들로부터 중국이 적극 개입해 약 29만t의 쌀을 비공개로 제공하기 시작해 이미 3만t 규모가 군용 부두를 통하여 하역되었다는 정보를 들었다. 이들은 또 미국·일본·유엔으로부터 추가 쌀 지원이 가을 추수 전에 한 차례 더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금년도 농사 작황이 좋아 큰 문제가 없다고 설명하였다.

한국이 대북 관계 개선 카드로 경제 협력을 내미는 것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조평통에서 대남 정치를 담당한다는 한 실무 국장은“솔직히 말해 한때는 우리도 남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기대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라고 털어놓았다. 그에 따르면, 그동안 한국의 상당수 기업인이 북한을 방문해서 경제 개발 약속을 하였지만 한국 정부의 통제로 성사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현대그룹 정주영씨와 합의한 금강산 개발은 김일성이 제반 준비까지 지시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했다면서, 한국 기업들에 대해 별다른 기대나 신뢰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4자 회담은 ‘성공’ 못 미더워 거부

최근 현안으로 떠오른 4자 회담 제의와 관련해, 북한은 이 제안이 전적으로 한국의 대북 전략의 일환으로 제기된 것으로 최종 판단하고 있음을 직감하였다. 북한은 현재 4자 회담에 대한 미국의 입장과 의향을 모두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조평통 관계자들은 맨 처음 거부 방향으로 가던 4자 회담 문제가 요즘 상당이 깊이 있게 논의되고 있음을 암시하였다.

내가 4자 회담에 관한 북한의 진정한 입장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자, 조평통의 한 고위 관계자는“4자 회담에 참가하여 어떠한 성공적 결과가 없으면 분단 이래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나빠지게 되며, 국제적으로도 지지를 못받게 된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또 회담 의제가 불투명하다는 점도 지적했다. 가장 큰 부담은, 한국이 주도적으로 참가하는 회담에서 확실한 결과가 없을 때 북한 내부의 강경 세력들로부터 제기될 반발과 비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속사정을 내비쳤다.

북한이 만일 4자 회담을 수용할 경우 평화협정 체결 협의는 미·북한 간의 별도 회담 사항으로 구분하고, 한국과는 나진·선봉 지대를 중심으로 해 주로 경협 분야에서 일정한 보장을 받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또 현재의 동북아시아 정치 환경이 북한에게 불리하지 않다는 판단 아래 러시아와 일본을 참가시키는 4+2 방식의 수정 제의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평화협정 체결 문제에 한국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경우 북한은 일정 기간 유예하는 형태로 주한 미군 철수를 유보하는 데 동의할 수 있다는 의향을 보였다.

이번 방문을 끝내면서 나는 북한 지도부의 대미·대남 정세 판단에 입각해 우리 정부가 더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대북 전략을 하루빨리 세우는 것이 급선무라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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