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 정주영 3년 갈등 '완전 해갈'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5.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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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통령·정주영씨 단독 회동으로 ‘단비’…정부의 ‘재계 끌어안기’ 전략 본격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8월21일 서울 계동의 그룹 사옥 12층 명예회장실로 출근했다. 그가 심적 부담 없이 자신의 방에 들어서기는 근 3년 만일지 모른다. 정회장은 `‘8·11 대사면’ 조처가 이루어진 지 8일 만인 19일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났다. 정적이던 두 사람은 `‘화해’했고 3년 갈등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로써 볼모로 잡혀 있던 현대그룹은 풀려났다.

재계는 두 사람의 만남을 현 정권과 현대그룹의 불화가 공식으로 끝나는 절차로 해석했다. 현대그룹은 정회장의 청와대 독대 직후 `‘현대는 통합의 새 정치를 펴고자 하는 정부와 화합의 만남을 크게 환영한다. 이런 뜻에 적극 부응하고 그룹 분위기를 일신하여 국가 경제 발전과 세계화에 한층 매진하겠다’는 요지의 입장서를 냈다. 현대그룹의 한 관계자는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라며 담담하게 말했으나 오랜 `‘근신’에서 벗어나 그룹이 정상 궤도를 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내비쳤다.

대통령이 지난 8월7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필두로 경제인을 만난 것은 현 정권의 `‘재계 끌어안기’로 보인다. 재계와의 불편한 관계는 여권의 지지 기반인 중산층 및 보수 계층의 불안 심리를 유발해 정권을 재창출하는 데 이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현대그룹에 대한 해금은 정치적인 택일만 남았을 뿐 예고된 것이었다. 올해 초부터 부쩍 해빙 조짐이 나타났던 것이다. △전남 율촌공단 건설 허가 △현대중공업 등 계열 3사의 장외 등록 허용 △현대전자의 미국 AT&T그룹 GIS사 비메모리 부문 인수 인가 등은 현대의 ‘봄’을 예견하게 했다. 4수 끝에 5월 현대자동차의 9천만달러 해외주식예탁증서(DR) 발행이 이루어진 것과, 최근 산업은행의 시설자금 대출 재개는 금융 제재가 걷히는 본격 신호탄이었다. 8월14일에는 3천1백만평짜리 서산간척지 매립 준공 인가까지 났다. 현 정권과도 오랜 신경전을 벌인 서산간척지는 정회장이 79년부터 장장 16년 동안 추진한 필생의 사업이었다.

미움은 풀렸지만 나쁜 선례 남겨

독대 직후인 8월19일 낮 12시 서울 63빌딩에서 손녀 은희씨의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 정회장은 기자들과 만나 “금강산 개발과 원산 수리 조선소 같은 대북 경협사업 추진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일관 제철소 건립이나 러시아 자원 개발 같은 대규모 투자 사업에도 적극 개입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회장은 10여 년 전에 막역한 동향 친구 박용학 대농그룹 회장을 통해 당시 김영삼 의원을 소개 받은 후 더러 만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지난 대선 중반까지도 호의적이었다. 92년 초 국민당을 창당해 정치인으로 변신한 후에도 정회장은 “YS는 정직하고 경우 바른 사람이다”라고 말했고, YS도 경제인으로서의 그의 능력과 성취를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지난 대선 종반 김후보의 당락에 정후보가 직접적인 변수로 작용하면서였다. 정회장의 거친 인신공격성 유세도 두 사람의 관계를 악화일로로 만들어 놓았다. 당시 김후보는 “돈으로 권력을 사겠다는 사고와 버르장머리를 반드시 고쳐놓겠다”며 응징 의사를 비쳤다.

정회장이 참패한 대가는 가혹했다. 현대그룹에 대한 세무 조사와 금융 제재라는 `‘현대 목조르기’가 시작된 것이다. 92년 5월 말 이후 현대그룹 계열사의 산업은행 시설자금 지원 요청은 접수조차 되지 않았다.

자연인 정회장도 철퇴를 맞았다. 94년 7월 법원은 대통령선거법 위반, 업무상횡령죄 등 네 가지 혐의로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정회장이 93년 2월 정계 은퇴, 94년 5월 경영 일선 은퇴 등을 결정해 보기 딱할 정도로 몸을 낮추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대통령과 정회장의 구원이 끼친 파장은 적지 않다. 재벌 그룹 총수가 정치를 하는 것은 비판할 일이 아니지만, 정회장은 기업의 조직과 자금을 자신의 사적 이익에 철저히 활용했다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 그의 시련은 인과응보인 셈이다. 그러나 현 정권도 오점을 남겼다. 특정인에 대한 사감을 기업과 떼어놓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은 한 외국 투자가의 말을 인용해 `‘한국의 정치와 기업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비꼬았다. 이 신문은 ‘김대통령이 두 개의 정부를 다스리고 있는데, 하나는 갓태어난 민주 정부이고, 다른 하나는 기업들이 발언하려면 엄청난 대가를 각오해야 하는 독재 정부’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정치와 경제는 분리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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