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이후 한반도 ‘미국발 위기’ 오나
  • 남문희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2.04.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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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때리기’ 재개 가능성…남북, 대비책 마련중


전문가들의 올해 남북 관계 전망은 장밋빛에 가까웠다. 지난해의 소강 상태를 벗어나 활황 국면을 맞으리라는 것이었다. 김일성 주석 90회 생일을 정점으로 6월까지 북한에서 아리랑 축제가 열리고, 이 기간에 남한은 월드컵을 치른다. 남한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나 대통령 선거도 겹쳐 있어 서로 잘 지내야 할 이유들로 가득 차 있는 한 해인 셈이다. 그래서 늦어도 2월 말에는 당국간 회담이 열려 서로 대화 일정을 잡고, 3월에는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분위기를 조성하리라고 예상했다.


FX 사업과 남북 대화 연계


특사로 평양에 갔던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특보가 4월6일 돌아와 밝힌 남북 대화 일정과 비교해 보면 한 달 정도의 오차가 있다. 2월 말로 예상했던 당국간 대화가 특사 방북으로 대체되었고, 3월로 예상했던 이산가족 상봉이 4월18일로 밀렸다. 5월에 경협추진위원회 2차 회의(5월7~10일)와 경제시찰단 방문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은 대체로 들어맞았다.


왜 이런 오차가 발생했을까. 그리고 앞으로의 정세에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첫째 원인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발언 못지 않게 한·미 간에는 FX 사업이라는 현안이 또 하나 있었다. 국방부가 차세대 전투기로 보잉의 F15를 사느냐 다소의 라팔을 사느냐 하는 것이, 단순한 무기 구입 문제를 떠나 남북 대화에까지 영향을 미쳐 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미 지난해 초 이 문제가 공론화할 때부터 미국이 FX 사업과 남북 대화를 연계하고 있다는 보도가 줄을 이었다.


정부 사정에 밝은 소식통에 따르면, 정부가 FX 기종으로 보잉의 F15를 내정할 수 없었던 데에는 단순히 이 기종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 때문만은 아니라고 한다. 이 기종을 사더라도 과연 미국이 남북 대화를 어느 정도까지 보장해 줄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3월 말이라는 시점까지 밀릴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이것이 F15 내정과 대북 특사 파견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게 된 배경이다.


그러나 현재 국면은 여전히 정부가 가지고 있던 의구심이 남아 있는, 즉 ‘불안정한 평화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일정 기간 남북 관계에 대해 유예해 주었지만 그 이후 언제든지 `‘마이 웨이’를 선언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악의 축’ 발언의 연장선에 있는 `‘북한 체제 흔들기’가 언제든 재개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일부 관측통에 따르면, 2월의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이미 서로의 갈 길이 다르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 뒤 미국 정부나 언론의 ‘북한 때리기’가 계속되어 왔다.

북·미 갈등이 고조되면 결국 한반도 정세가 불안정해지고, 이는 경제 회복을 위해 월드컵·대통령 선거 등을 성공적으로 치르려는 우리 처지에서는 곤혹스런 일이다.


그렇다면 임특사 방북을 계기로 찾아온 평화는 언제까지 유지될 것인가. 대체로 지금부터 6월 말까지로 보는 것이 다수설이다. 즉 남쪽의 월드컵과 북쪽의 아리랑 축제 기간까지이다. 남북 양측이 전세계를 대상으로 축제를 하는 기간이므로 남의 잔치에 고춧가루 뿌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6월 이후 남북 대화 일정 없어


이번에 임동원 특사가 북측과 합의한 일정은 시사적이다. 4월28일 이산가족 상봉, 5월에 남북 경협추진위원회 2차 회의와 실무추진위원회 회의, 그리고 북한 경제시찰단의 남한 방문, 6월에 금강산 관광 활성화를 위한 제2차 당국자회담 등이다. 그 밖에 7차 장관급 회담과 남북 군사당국자 회담은 아직 일정이 안 잡혀 있다. 다시 말해 6월 이후 일정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얘기다.


임특사가 이번에 북측과 합의한 대화 의제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 4월6일 기자회견에서도 밝혔지만, 새로운 의제를 보태기보다는 그동안 중단되었던 현안들을 재개해 실천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이 대북 포용 정책의 핵심 5대 과제에 포함된 내용들이다. 즉 △경의선 철도 연결 △개성공단 착공 △금강산 육로 연결 △이산가족 문제 해결 △군사적 신뢰 구축이다. 동해선 철도와 도로 연결이 추가된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남쪽에서는 가볍게 생각할 수 있지만, 북쪽 처지에서 보면 사실 하나하나가 체제의 존립을 좌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경의선 연결만 해도 북쪽 내부에서는 ‘경의선이 연결되는 순간이 통일되는 순간’이라고 볼 정도로 만만치 않은 문제이다. 다시 말해 지금 이런 과제들을 가지고 다시 대화를 한다고 해서 당장 경의선이 뚫리고 개성공단이 가동되고 금강산 육로 관광이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결국 김대중 정부는 북쪽과 합의했던 내용들을 정리해 차기 정부에 넘겨주는 역할 정도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6월까지는 그렇다 치고 6월 이후가 문제다. 북·미 관계와 관련한 각종 위기설은 6월 이후를 주목하게 한다. 이와 관련해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는 “얼마 전부터 워싱턴 정계에서 9∼10월 위기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라고 말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대북 핵사찰을 둘러싼 마찰이 점차 증폭되어 가다가 그때 쯤 위기 국면을 맞게 되리라는 분석이다. 임특사가 방북하기 전 정세현 통일부장관은 국제원자력기구 사찰과 관련해 8월 위기설을 얘기하기도 했다.


6월 이후 국면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있는 선행 지표는 바로 앞으로 시작될 북·미 대화이다. 임특사의 전언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조언을 받아들여 북·미 대화에 적극 나서겠다고 하면서 △뉴욕에서의 접촉 재개 및 잭 프리처드 특사 방북 수용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와의 협상 △그레그 전 주한 대사 방북을 계기로 한 민간 교류 등 북·미간 채널을 3개 제시했다고 한다. 이 세 가지 대화 채널 중 그레그 전 대사의 방북이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그가 미국 정계에 미치는 막강한 영향력을 살펴볼 때 과거 클린턴 행정부 시절 페리 조정관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북 정상회담은 위기 관리용 카드?


대화가 잘 되면 좋지만 안될 경우 어떻게 될까. 이 점과 관련해 이번에 임특사가 분명히 언급하지 않은 몇 가지 대목이 있다. 첫째가 월드컵과 아리랑 축제를 연계하는 상호 협력 프로그램이다. 그동안 국내 언론은 월드컵 기간에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방한할 가능성 등에 높은 관심을 보여왔으나 임특사는 기자회견에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는 일단 전개되는 상황을 보아 가면서 추후 협의할 여지를 두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 한 가지 예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김정일 위원장의 전면 등장과 남북 정상회담이다. 임특사는 김위원장의 적극적인 의사는 확인했으나 합의를 보지는 못했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대북 소식통은 “그 두 가지 프로그램은 위기 관리용으로 남겨 둔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대북 강경 정책이 어느 시점에 어느 정도 수준까지 치고 들어올지 모르므로 그에 대비한 ‘극약 처방’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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