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위기는 타협의 기회다”
  • 워싱턴·정민호 (자유 기고가) ()
  • 승인 2002.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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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전문가 피터 헤이즈 박사/“고농축 우라늄 생산 가능성 희박”
미국의 유명한 한반도 전문가인 피터 헤이즈 박사(노틸러스 연구소 소장)는 최근 북한이 핵 개발을 시인한 것과 관련해 “북한과 미국은 제네바 기본 합의문을 넘어서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재래식 무기 문제를 포괄해 처리할 새로운 형태의 합의서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주요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다.






북한이 왜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 개발 계획을 시인했다고 보는가?


만일 북한이 우라늄 농축 사실을 시인한 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이 순진해서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볼 때 북한의 의도는 두 가지다. 하나는 비무장 지대에 배치된 낙후한 재래식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고 주한미군과 한국군 병력을 제어하기 위해 전략적인 핵옵션을 보유하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북한이 앞으로 미국과 핵 협상을 진행하면서 적절한 시점에 핵을 포기하는 대신, 그에 상응한 보상을 염두에 둔 협상 카드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북한의 핵 개발 시인은 북한과 미국 모두에게 분명한 위험을 안기면서도 동시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진정한 기회를 제공했다.


왜 하필 북한이 이 시점에서 시인했다고 보는가?


바로 지금 이 순간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최고조의 압력을 받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다만 북한의 이번 태도가 종전과 다른 전략적 입장을 보인 것이라면, 이는 한편으로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계속 위협적 자세를 견지하겠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에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신호를 보낸 것일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켈리 특사가 아무런 게임 플랜도 갖지 않은 채 평양에 간 것이 문제였다. 북한측이 핵 개발 증거를 들이민 미국측에 대해 ‘그래 맞다, 어쩔 테냐’ 하는 태도로 나왔을 때 미국측은 다음 순서를 제시하는 대신 최후 통첩성 메시지를 전달한 채 귀환했다.


북한은 이번에 북·미 기본 합의문이 무효임을 선언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직은 이 문제에 관해 북한의 공식 입장이 나온 게 없다. 북한은 또 기본 합의문을 일방적으로 폐기할 권리가 없다. 이 문제와 관련한 미국측 성명을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미국 정부도 북한이 기본 합의문을 위반했다는 물질적 증거만 지적했을 뿐, 합의문을 무효화하겠다는 말은 쓰지 않았다. 그것이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그런데 북한의 핵 개발 시인 내용을 처음 언론에 흘린 미국 정부 관리는 마치 기본 합의문이 끝장난 것처럼 언론이 보도해 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현행 기본 합의문이 과연 제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난해 초 출범한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 대화를 중단하고 북한을 무시하는 정책을 폈을 때 이미 제네바 기본 합의문은 무력해졌다. 그런 측면에서 미국과 북한은 ‘부시판’ 기본 합의문이라고 해도 좋을 새로운 기본 합의문을 만들어내야 한다. 물론 현행 기본 합의문에 나와 있는 요소들은 대부분 건드리지 않은 채 협상해야 한다. 대신 새 합의문은 훨씬 더 포괄적인 의제, 이를테면 북한의 재래식 전력 문제, 미사일·테러·경제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북·미 양측이 이같은 현안을 해결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이런 방법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앞으로 기본 합의문에 대한 재협상 중에도 경수로 사업이 중단되면 안된다. 미국은 대북 중유 공급과 관련한 재정 지원을 철회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수로 사업이 중단되지는 않는다. 최악의 경우 미국이 기본 합의문에 명시된 의무 사항을 모두 포기할 경우 북한은 즉시 핵 동결을 해제하고 핵 개발에 나설 것이다. 그럴 경우 양국 모두 중대한 충돌 국면으로 가게 될 것이다.


북한이 핵 개발 계획을 시인했는데, 이미 핵을 보유했을 가능성은?


과거 북한이 추출한 플루토늄으로부터 핵무기 한두 개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미국 정보기관조차 최종적으로 확인하지 못한 상태다. 그러나 농축 우라늄을 이용해 핵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기간 등을 감안할 때 내 생각으론 북한이 아직은 우라늄을 농축해 핵무기를 만들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핵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양의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했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대신 미국은 북한이 비교적 소규모로 농축 핵 우라늄을 이용해 핵무기를 제조하려는 증거, 이를테면 핵 관련 기술 장비를 얻기 위해 북한이 벌인 행위들을 추적한 증거 같은 것들을 내밀었을 것이다.





미국은 북한이 핵 개발을 시인했는데도 강경 수단보다는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겠다고 했다. 미국이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현실적 이유가 있어서라고 본다. 만일 미국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응징한다면 북한뿐 아니라 한국·미국도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된다. 그런 식으로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1994년 한반도 위기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북한에 대해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군사적 해결책은 통하지 않는다. 대북 경제 제재도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 실효성이 없다. 해상 봉쇄를 단행해 봐야 휴전선의 군사적 긴장만 높아질 뿐이다.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으로부터 전폭적 지지를 얻지 않고는 북한에 대해 단독으로 군사 행동을 할 수도 없다. 따라서 미국이 북한에 취할 수 있는 정책 수단은 군사적 위협을 통한 대북 억지 정책과 협력적 포용을 통한 유인책을 적절히 혼합한 것이어야 한다. 북한은 이라크가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대화를 통한 외교적 해법밖에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 이를 위해 우선 미국은 북한의 핵 문제를 해결하는 대가로 어떤 형태의 포괄적 보상을 제공할 용의가 있는지 우방인 한국·일본과 긴밀한 공조책을 마련해야 한다. 현시점에서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북한 핵 문제를 특별 핵사찰 문제와 분리하기가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미국은 곧 국제원자력기구로 하여금 북한의 농축 우라늄 시설을 특별 사찰해 이런 시설이 제거되었는지 검증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현상황에서 특별 사찰이 가까운 장래에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이 특별 사찰을 허용하고 이 문제를 깨끗이 청산한다면 미국의 테러국 지정 해제나 수교에 따른 일본의 경제적 보상 등 여러 현안을 일거에 풀 기회를 맞게 될 것이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외교적 해법을 택한 것은 현시점에서 이라크와의 전쟁 계획에 전념하기 위한 것 아닌가?


사실이다. 만일 김정일이 핵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 수만 있다면 어떤 면에서 부시 행정부에 큰 호의를 베푸는 셈이 된다. 현재 이라크와의 전쟁에 모든 병력과 자원을 집중하는 판에 북한과의 군사적 충돌 상황까지 벌어진다면 부시 행정부는 병력 재배치는 물론이고 한국·일본과 대북 문제에 관한 공조 균열 가능성까지 우려해야 한다.


미국은 대화 재개라는 원칙 외에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같다.


. 미국은 지금처럼 한반도에 대해 단순한 핵 비확산 정책이나 군사 전략을 넘어선 좀더 분명한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또 그런 입장을 중국·러시아는 물론 한국과 일본에 전달해야 한다. 그런 전략 아래 북한과 협상할 때 무엇을 제공할 용의가 있는지 대책을 세운 뒤에 북한과 대화에 나서야 한다. 내가 볼 때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끝나기 전에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재개할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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