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의 ‘정상회담’ 딜레마
  • 김종민 기자 ()
  • 승인 2000.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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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에 대응할 실용적 보수 노선 정립이 과제
지난 6월9일 이회창 총재는 부산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한나라당의 입장’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여기서 이총재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우선 협의해야 할 항목 다섯 가지를 제시했는데, 그 다섯 번째 항목이 핵과 미사일 등 대량 살상 무기 개발 중지 및 폐기 문제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총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문제를 이번 정상회담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는 점이다(<시사저널> 제552호 인터뷰 참조). 순서가 좀 밀린 셈인데, 이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군사 문제를 자꾸 강조하는 것이 정상회담에 대한 소극적 입장으로 비칠까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해서 우리 당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항간의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성명서 발표를 건의했다”라고 말해, 고민의 일단을 내비쳤다.

지난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이총재가 정상회담에 대한 초당적 협력을 합의했지만 그 이후 한나라당과 이총재는 협력보다 견제와 우려 쪽에 무게를 실어온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한나라당의 정체성 때문이다. 한나라당 기획위원장 맹형규 의원은 “우리 당의 주된 지지 기반이 되고 있는 보수층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남북 관계에서 좀더 신중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회담 결과를 비관하는 것도 한나라당이 비판적 입장을 고수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한나라당은 김대중 정부가 북한에 일방적으로 경제 지원만 하고 실질적인 변화는 이끌어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본다. 이러한 일방적 경제 지원은 조만간에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게 될 것이며, 최근 불거진 현대그룹 위기가 그 단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현대그룹이 위기에 처하게 된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퍼주기에 바쁜’ 대북 사업이었다는 것이고, 앞으로 이러한 문제가 계속 나타나리라는 것이 한나라당의 인식이다.

한나라당은 오는 11월에 치러질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에도 주목하고 있다. 만일 지금의 추세가 이어져 공화당이 집권하게 되면 미국은 페리 보고서 이후 추진해 온 일련의 대북 유화책을 거두어들이고 강경한 입장을 취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게 되면 남북 관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된다면 한나라당의 보수 노선이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이총재의 보수적인 발걸음이 마냥 가벼운 것은 아니다. 우선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국민적 사안에 흔쾌하게 협력하지 않는 모습은 자칫 비생산적으로 비쳐 수권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적지 않은 장애가 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정상회담 이후 의미 있는 단계적 진전이 이루어진다면 결과를 다소 비관적으로 보아 온 한나라당 처지에서는 부담이 더 커지게 된다.

“비실용적 보수파가 너무 많다”

당내에서 너무 보수적인 목소리가 높은 것도 문제이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남북 문제와 관련해서 상황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비실용적 보수파’가 당내에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이다”라고 지적하면서, 이총재도 이 점을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나라당 남북문제특별위원회의 구성을 보면 이세기 위원장을 비롯해 정형근·김용갑·박세환 의원 등 보수적 인사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초선으로 위원회에 참가하고 있는 오세훈 의원은 정당 대표단에 한나라당도 참여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가 집중 포화를 맞기도 했다. 이총재는 최근 이러한 문제점을 의식한 듯 당내의 다양한 목소리를 수렴할 수 있도록 남북특위를 확대 개편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물론 남북 정상회담 이후에도 보수적인 입장에서 남북 관계의 변화 과정을 비판적으로 검증한다는 한나라당의 정책 기조에는 변함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반도 상황이 크게 변화하고 있고 국민들의 의식과 분위기도 변할 가능성이 높다. 보수층을 대변하는 것이 한나라당의 역할이라고 하지만, 그 보수층까지도 변화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게끔 ‘실용적 보수 노선’을 찾아 가는 것이 한나라당의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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