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의 ‘실사구시’는 정계 개편 암호?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0.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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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민련 공조 복원…합당·여권 통합설도
박태준 전 총리가 낙마한 직후부터 정치권에 수상한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한동 자민련 총재가 후임 총리로 지명되고, 정몽준 의원의 민주당 입당설이 불거졌다. 호남 무소속 4명도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 모두가 하루 만에 동시 다발로 터져 나왔다. 나아가 민주당과 자민련의 합당설도 공공연하게 유포되고 있다. 민국당과 한국신당 등 군소 야당들의 움직임도 주목 대상으로 떠올랐다.

지금껏 안개 속에 가려 있던 JP의 의중이 공조 복원으로 드러난 이상 민주당과 자민련의 교감 속도는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양당 공조의 우선 목표는 원내 과반수 확보로 모아진다. 현재 민주당 1백19석과 자민련 17석을 합하면 1백36석. 한나라당보다 4석 많아지지만, 과반수에는 1석이 부족하다. 과반수 확보를 위해서는 민국당과 한국신당의 협조가 필수이다. 따라서 여권은 한나라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과의 연대를 추진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5월1일 김대통령과 민국당 김윤환 대표권한대행 사이에서 거론되었던 ‘일본식 연정’ 구상이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회창 총재 등 한나라당이 양당의 공조 복원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런 정국 구도 변화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권철현 대변인은 “‘비한나라당-반이회창’ 세력을 총결집해 압박 구도를 만들어 보겠다는 책략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라면서 격렬하게 반발했다. 한나라당은 여권이 이미 한나라당 포위 작전을 시작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우선은 ‘자민련의 무소속 구락부’ 형성 가능성 높아

정계 개편 가능성은 DJ가 총선 이후 야당 대표들과 연쇄 회동하면서부터 점쳐지기 시작했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의 ‘영수회담’에서 DJ는 “대화와 협력의 큰 정치를 펼치겠다”라고 약속했다. 발표문에는 ‘상생의 정치’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그러나 며칠 뒤 이한동 자민련 총재와 만난 자리에서는 ‘정치 균형과 안정을 위해서는 자민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발표문이 등장했다. 이어 DJ는 4월29일 김용환 한국신당 대표, 5월1일 김윤환 민국당 대표권한대행과 연쇄 회동했는데, 이 때 나온 공동발표문에는 ‘소수 의견이 존중되는 정치를 실현하겠다’라는 문장이 공통으로 들어 있었다.

김대통령은 특히 민국당 김윤환 대행과 만난 자리에서 일본의 정당 정치와 연립 정부 구성 문제에 집중해 물어본 것으로 전해진다. 회동을 마치고 나서 김대행은 ‘과거 3당 합당과 같은 정계 개편이 불가능한 상황인 만큼 자민련·민국당·한국신당 등 소수 정파와의 연립은 적극 검토해볼 만하다’는 요지의 대화를 나누었다고 밝혔다. 이후부터 DJ가 여소야대의 양당 체제를 1여 다야를 기본 축으로 한 비한나라당 연대 체제로 바꾸려고 한다는 분석이 정가에 나돌기 시작했다. 다만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모처럼 여야 간의 해빙 기류가 조성되었고, 자민련이 공조로 돌아오기까지는 명분 축적이라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점 때문에 이같은 정계 개편 흐름이 빨리 진행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정치권 안팎의 대체적인 분석이었다.

하지만 박총리의 사퇴로 ‘돌발변수’가 생겨 버렸다. DJ로서는 집권 후반기 정국 구상을 앞당겨 행동에 옮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이한동 총리 지명이 이어졌고, 정계 개편의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JP가 제주에서 닷새 동안 칩거에 들어간 이유도 갑자기 닥쳐온 정계 개편 물결에 대처할 구상을 다듬고, 또 DJ의 진짜 의중을 해석하기 위해서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JP는 닷새 동안 제주에서 골프만 치다가 5월2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날 JP는 “정국의 책임은 논설이나 시민연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에게 있다”라는 말을 했다. JP는 자신의 의중을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한마디 말로 요약했다. 실사구시는 DJ가 전매 특허처럼 사용하던 휘호 문구이기도 하다. JP가 DJ의 의중을 충분히 읽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JP가 공조 복원의 대가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느냐이다. 우선 들 수 있는 것이 자민련의 독자적인 교섭단체 구성, 원 구성 때 국회부의장 및 상임위원장 할당, 개각 때 각료 배분 등이 있다. JP가 내각제 합의를 조건으로 내걸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민주당의 한 고위 관계자는 “실사구시라는 말에는 내각제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라고 해석했다.

내각제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한 자민련의 요구를 민주당 쪽이 못 들어줄 이유는 없다. 민주당의 한 고위 관계자는 “각료와 상임위원장 배분에서도 양당 공조는 적용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만 자민련의 독자적인 교섭단체 구성 문제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민주당의 분위기이다. 운영위 구성 비율로 볼 때 한나라당 협조가 없는 한 상임위 통과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민련 내에서는 의장 직권으로 본회의에 상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지만 이 또한 만만치 않다. 국회의장을 여권이 맡는다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맡더라도 의장의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커지기 때문에 성사 가능성은 낮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섭단체 문제는 자민련이 기타 소수 정당들과 무소속 구락부를 구성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힐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해 민국당 김윤환 대행의 한 측근은 “곧 무소속 구락부를 꾸리는 문제가 공론화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될 경우 DJ와 허주가 일찍이 교감을 나누었듯이 정국은 민주당과 자민련-민국당-한국신당 연대를 한 축으로 하고 한나라당을 다른 축으로 한 1여 다야 구도로 짜이게 된다.

여권은 일단 이쯤만 된다면 1차적인 성과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김대중 대통령은 여당이 국회에서 절대적인 힘의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국회를 무리하게 운영하지 않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라고 전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도 “합당을 통한 무리수를 두기보다는 소3당이 연립해서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방안이 더 낫다”라고 말했다. 이한동 총리 지명을 계기로 자민련과의 관계가 복원된 만큼 무리수를 두지 않으면서도 과반(過半) 효과만 거두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나라당 포위 전략을 구사하더라도 16개 상임위 전체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적인 계산이 깔려 있다. 일부에서 ‘3김 연대’ 가능성도 거론

그러나 소극적인 정계 개편만으로 그림 그리기가 끝나지는 않으리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미 민주당과 자민련의 합당론이 양당 내에서 불거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민련의 한 관계자는 “17석으로 버텨봐야 별 수 없다는 현실을 절감하고 있는 JP가 생존을 위한 순서를 곧 밟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라면서 JP의 의중에는 합당까지도 고려되고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JP도 이 문제에 관한 한 당내의 기류를 좀더 지켜보다가 결론을 내리려는 심산인 것 같다. 김종호 대행 체제를 당분간 유지하겠다는 JP 말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감지된다.

그럴 경우 1여 다야라는 소극적 정계 개편을 벗어나 비한나라당-비이회창 단일 전선이라는 큰 그림이 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민국당 김윤환 대행이 최근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허주는 차기 정권 창출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그의 한 측근은 전했다. 그는 또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면 민주당과 자민련의 합당뿐만 아니라 한나라당 내부의 일부 세력과 결합하는 방안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허주 진영이 3김이 연대할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 있다는 말이다. 여권 내부에서도 ‘큰 그림’에 대한 가능성은 열어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론 통합을 통해 모처럼 열린 남북 대화의 분위기를 강력히 뒷받침하고 국정 후반기의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서도 범여권이 힘을 하나로 모을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민주당 관계자들 주변에서 자주 흘러나오고 있다. 그 이면에는 ‘이대로는 차기 정권 창출이 어렵다’는 우려 또한 깔려 있다.

물론 ‘합당론’이나 ‘큰 그림론’은 이인제 상임고문을 비롯한 민주당내 차기 주자군의 격렬한 반발에 부닥칠 공산이 크다. 또한 JP에 대한 의존도가 약해진 자민련 의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리라는 보장도 없다. 따라서 이런 움직임이 당장 수면 위로 떠오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국이 바야흐로 정계 개편의 태풍권 안에 진입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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