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리더 시리즈 ①/김부겸 의원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4.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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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정치’ 길 여는 운동권 야전사령관
17대 총선을 계기로 정치권의 중추 세력도 이제 3040(30~40대) 세대로 옮아가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시사저널>은 17대 국회를 이끌 여야의 3040 리더를 선정해 그들의 철학, 포부, 살아온 길 등을 소개한다. 차세대 정치 리더들에 대한 독자의 안목을 넓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열린우리당 당선자가 모두 모인 4월26일 워크숍에서 김부겸 의원은 ‘군기반장’을 맡았다. 말깨나 한다는 운동권 출신 당선자들에서부터 김원기·정동영·김근태 등 지도부에 이르기까지, 김의원이 진두 지휘하는 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그가 한나라당 소속 의원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열린우리당 선후배들이 그에게 보내는 신뢰는 두터워 보였다.

김의원은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온 경상도 토박이다.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었다. ‘출신 성분’으로만 따지면 그가 박정희 정권에 목숨 걸고 저항할 이유는 그다지 뚜렷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고3 시절, 이미 동아일보 백지 광고를 사기 위해 친구들과 돈을 모을 만큼 일찌감치 ‘의식화’했고, 서울대 정치학과에 다니던 1978년에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제적당하면서까지 유신정권과 각을 세웠다. 고등학교 시절 학적부에 적힌 부모 희망은 3년 내내 법조인, 본인 희망은 내리 언론인인 것만 보아도 그가 ‘고딩’ 시절부터 사회 문제에 상당히 예민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제적 후 인천에서 1년쯤 노동운동을 하다가 대구로 내려가 기독교 모임을 이끌던 그는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아 복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운동권 인맥의 폭을 넓혔다.

당시 서울대 학생회장은 심재철(현 한나라당 의원), 대의원회 의장은 유시민(현 열린우리당 의원)이었고, 제정구 유인태 이 철 이해찬 유홍준 이신범 등은 복학생협의회를 구성해 이들의 정신적 지주 노릇을 했다. 김부겸 의원은 그런 복학생협의회의 막내이자 간사를 맡아 재학생과 복학생 사이를 잇는 사슬 구실을 했고, 수시로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연사로 나가 학생들에게 ‘투쟁 지침’을 내렸다.

그때만 해도 운동권 조직이 치밀하게 짜이지 않아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는 매일 백가쟁명이 난무했는데, 그가 일단 ‘동을 떴다’ 하면 순식간에 좌중을 휘어잡아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곤 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는 당시 그의 모습을 ‘사자후를 토하던 야전사령관’이라고 표현했고, 한나라당 김영선 의원은 당시 그가 ‘서울대 대통령’이라고 불렸다고 전했다.

하지만 봄날도 반짝, 5·17 사태가 터지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에게는 또다시 기나긴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전단을 썼다며 계엄령 위반으로 ‘별’ 하나를 더 단 그는 대구에 내려가 잠행하던 1983년 대구 미국문화원 폭파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아 모진 고문을 당했다. 단지 색깔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1주일 또는 보름씩 대구 보안사에 감금되기를 여러 번, 더 견디기 어려웠던 그는 결혼한 지 1년된 아내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인 재야 활동에 돌입했다. 1984년 김근태 의원 등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한 것이다. 그와 김의원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른바 ‘잘 나가는’ 386 운동권 리더들과 인연을 맺은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생계를 위해 신촌 연세대 앞에 ‘오늘의 책’, 서울대 앞에 ‘백두서적’이라는 사회과학 서점을 냈다. 그런데 운동권 후배들이 걸핏하면 책을 공짜로 집어가고, 학생들이 불온서적 소지 혐의로 경찰서에 잡혀가면 무조건 그의 책방에서 구했다고 둘러대는 통에 돈벌이는커녕 이래저래 시달리기만 했다. 그러나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웬만한 운동권 후배들과 두루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들은 이번 17대 총선을 통해 대거 국회에 입성했다.

그가 ‘형수’라고 부르는 강금실 법무부장관과의 인연도 책방에서 비롯되었다. ‘오늘의 책’ 동업자인 김태경씨가 강장관의 전 남편이기 때문이다. 김의원은 총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에서 한창 강장관 영입설이 나돌던 무렵 강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형수, 오지 마라. 대선자금 수사 주무 장관이 오면 우리 당이 무슨 의심을 받겠나!” 하며 만류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그의 정치 인생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인물은 1999년 고인이 된 제정구 전 의원이다. 서울대 복학생협의회에서 처음 만난 이래 제씨는 김의원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도 아깝지 않은 인생의 규범이 되었다. 제씨는 올곧은 재야운동가이자 남들의 손길이 미처 닿기 전부터 빈민운동을 시작한 빈민운동계의 대부로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

김의원이 현실 정치에 처음 발을 디딘 것도 1988년 제씨가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하면서다. YS·DJ 단일화가 실패해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죽 쒀서 개 줬다’고 분개한 제씨 등 재야 인사들이 더 이상 양김을 믿을 수 없다며 직접 당을 만들자, 그도 제씨를 따라 정당인이 된 것이다.

그 이후로도 그는 정치적 고비 때마다 제씨와 운명을 같이했다. 1995년 DJ가 정계에 복귀하면서 통합민주당을 깨고 국민회의를 창당할 때다. 그는 “솔직히 DJ를 따라 갈 생각이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호남 조직표 보장되지, 돈 대주지, 현실 정치인으로서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야 출신들이 모여 진로를 고민하는 자리에서 제씨가 “대가리에 새똥도 안 벗겨진 새끼들이 무슨 현실 계산이냐”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바람에, 그는 결국 민주당에 남았다. 당시 그 모임에 참석했던 김민석 전 의원 등은 DJ를 따라갔다. 그렇게 해서 남은 사람끼리 만든 모임이 김원기 노무현 제정구 유인태 원혜영 이 철이 주축이 된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다.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통추 회원들은 우수수 낙선했다. 그 역시 과천·의왕에 출마했다가 안상수 의원(한나라당)에게 졌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통추’가 이회창·김대중 두 후보 진영으로 분열할 때 그가 이회창 쪽을 택한 것도 순전히 제정구씨 때문이다. 당시 김원기 노무현 김정길 등은 그래도 ‘정권 교체’가 우선이라며 김대중 지지를 선언했지만, 제씨는 ‘3김 청산’ ‘세대 교체’가 더 중요하다며 이회창 후보를 선택한 것이다.

2000년 4월 그는 마침내 총선에서 금배지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 사이 그는 두 가지 소중한 것을 잃었다. 하나는 제 전의원이 폐암으로 세상을 뜬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나라당 안에서 끊임없이 정체성 혼란을 겪은 일이다. 특히 대정부 질문 때 ‘김대중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를 긴급 폭로하라’는 지도부의 ‘오더’(주문 사항)를 거부한 일, 2002년 대선 직전 여당 의원 빼내오기를 강력하게 비판한 일 등이 쌓여 그는 당 안에서 완전히 ‘왕따’가 되었다.

“상처 주는 정치는 끝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거대 여당의 원내 부대표를 맡고 있는 지금 상황을 말 그대로 ‘사즉생’이었다고 표현한다. 국회의원 한번 거르면 어떠랴는 심정으로 2003년 7월 한나라당을 탈당한 것이 오히려 1년도 안되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는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얘기다.

당내 40대 주자 가운데 좌장 격인 그는 운동권 출신답지 않게 앞으로 ‘봉합의 리더십’을 펼쳐 보이겠다며 기염을 토한다. 운동권에 발이 너르다는 장점을 살려 1970년대 재야운동권 세대와 1980년대 조직화한 학생운동권 세대를 잇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한편, 야당 개혁파와의 창구 역할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는 “상처 주는 정치, 극단적인 대결은 사회 통합을 위해 절대 금물이다. 그 바람에 주변에서조차 맹물이라고 비난하는데, 그래도 내 소신은 변함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가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이 만든 <대통령은 아무나 하나>라는 로고송을 유세단이 쓰지 못하게 한 것도 상대방(노무현 후보)에게 상처를 주면 안된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요즘 언론 개혁 지지자들로부터 맹공격을 당하고 있다. 그가 당선자 워크숍에서 ‘언론과의 지나친 긴장 관계는 효과적이지 않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언론개혁 반대파는 나가라’ ‘한나라당 출신이어서 수구 보수 아니냐’는 비아냥까지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개혁파의 총공세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답은 한결같다. “아무리 적이라도 상대를 인정해야 한다. 무조건 제거하겠다고만 하면 당장 ‘쌈빡’하기는 하지만 나중에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겠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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