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노당에 불붙은 ‘북한 논쟁’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4.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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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 선거 뜨겁게 달아올라 북한 문제 쟁점화해 주대환·이용대 후보 ‘충돌’
“민주노동당은 북한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한다.” 진보 정당이 원내 진출에 성공한 마당에 웬 케케묵은 색깔론이냐고? 오해하지 말라. 한나라당 내지 보수 언론과는 무관하다. 이는 민주노동당 내부, 그것도 당 지도부 선거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진보 진영 발(發) 사상 논쟁이다.

요즘 민주노동당은 5월24~28일 치르는 당 지도부 및 최고위원 선거를 놓고 뜨겁게 달아올라 있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당원 직선으로 대표·사무총장·정책위의장 등 당3역을 선출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책위의장 후보로 출마한 주대환씨(민주노동당 마산합포지구당위원장)가 이른바 북한 논쟁을 촉발하고 나선 것이다.

주씨가 겨냥한 상대는 유력 후보로 손꼽히는 이용대씨(민주노동당 경기지부장).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이른바 민족민주(NL) 계열 후보인 이씨에 대해 주씨는 정책위의장 후보간 첫 공개 토론회가 벌어진 5월12일 첫 포문을 열었다. 이 날 주씨는 패널들의 질의가 끝나고 후보자간 상호 토론이 시작되자마자 작심한 듯 이후보에게 돌발 질문을 던졌다. “민주노동당이 남한 체제는 가혹하게 비판하면서 북한 체제에는 왜 관대한가라는 국민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한다고 보는가?”

기습을 당한 이용대씨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주대환 동지가 색깔 공세를 할 줄은 몰랐다”라고 이씨는 말문을 열었다. “북한은 약자다. 물론 필요하다면 비판도, 검증도 해야 되겠지만 확인되지 않은 설이나 냉전 논리에 기반을 둔 공격은 곤란하다.” 이같은 답변이 이어지는 동안 주씨는 허공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반박에 나섰다. “이동지의 답변은 매우 실망스럽다. 미국×들 표현을 그대로 써 죄송하지만, 이른바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우리 당은 그간 너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찬반 논란 이어지며 당 ‘시끌시끌’

불과 6분 남짓한 말씨름이었지만, 이 논쟁은 당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민주노동당 홈페이지 게시판은 곧 이에 대한 찬반 논쟁으로 끓어올랐다. 주씨를 비판하는 쪽은, 특히 주씨의 문제 제기 방식이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며 분개했다. 진보 정당 후보가 어떻게 동지에 대해 <월간 조선> 내지 조갑제 식으로 마녀 사냥을 할 수 있느냐(푸르미)는 것이었다.

이용대 후보측은, 주씨가 당내 선거를 앞두고 북한 문제를 제기한 배경에 정략적 의도가 숨어 있다며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지 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한 주씨가 유력 후보인 이씨를 흠집 내기 위해 이번 선거를 정파간 대결로 몰고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져 보면 민주노동당은 ‘정파 연합’이라고 불릴 만큼 창당 때부터 그 안에 다양한 정파가 공존하고 있다. 이번 선거 국면에서 이들 정파는 크게 세 계열로 헤쳐모이는 양상을 보였다. 민족주의 계열, 범좌파 계열, 기타 계열이 그것이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이 중 단일 정파로는 당내에서 최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민족주의 계열이 정책위의장 선거에서 이용대 후보를 지지하고 있는 데 반해 범좌파 계열은 지지 후보가 여러 명으로 분산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러자 주대환 후보가 범좌파 계열 표를 결집하기 위해 의도적인 ‘NL 때리기’ 내지 ‘NL 고립화 전략’에 나선 것이라고 이용대 후보측은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주후보측은 순전히 선거 전략 때문에 북한 논쟁을 걸고 나왔다는 의혹에 대해 단호히 부인한다. 주후보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당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생각해 북한 문제를 제기했다’고 주장했다(위 상자 기사 참조). 사실 당 밖으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주후보는 과거에도 이 문제를 공론화한 일이 있다. 2001~2002년 사회당과 민주노동당간 합당 문제가 불거졌을 때였다. 당시 사회당이 합당 전제 조건으로 민주노동당의 대북 관련 강령을 문제 삼자 주후보는 당내 일각의 친북 편향을 문제 삼는 글을 당 기관지 <이론과 실천> 2002년 2월호에 기고했다(‘조선노동당 문제를 넘어’).

이 글에서 그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정면 대결 하기 싫어하는 문제가 있다’며, 민주노동당으로서는 그것이 조선노동당 문제 또는 조선노동당과의 관계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아무리 얼버무리고 덮어두려고 해도 남한 내에 조선노동당 지지자들, 이른바 주사파가 다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이들이 십수 년간 시대착오적 인식과 실천을 고집하는 바람에 진보 운동에 엄청난 해악이 있었다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물론 민족주의 계열이라고 모두 주사파인 것은 아니다. 주체사상을 놓고 반(反) 주사, 비 주사, 맹렬 주사 따위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이중 좌파가 주로 문제 삼는 것이 주체사상 추종자들, 일명 종북(從北)주의자들이다.

1980년대부터 범사회주의(PD) 계열 이론가로 이름을 떨쳐온 민주노동당 간부 ㄱ씨는 이번 북한 논쟁이 터진 뒤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사자후를 토했다. “이제는 주체주의자들이 솔직해질 때가 됐다.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과거 엄혹했던 시기에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모진 시련을 겪은 바 있다. 주체주의자들도 자신들의 신념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이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는 또 이번 선거에 출마한 한 후보를 겨냥해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술자리에서는 ‘장군님 만세’를 부르다가 공식 석상에서 시치미를 뚝 떼는 모순적인 행동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또 다른 활동가 ㄴ씨는 이런 주장을 폈다. “자위적 수단에서건 아니건 어떻게 진보주의자라는 사람이 핵 개발을 옹호할 수 있는가. 어떻게 북한은 사상 강국, 군사 강국이므로 이제 경제 강국만 달성하면 된다는 말을 공공연히 내뱉을 수 있나. 그런 진보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장에 대해 민족주의 계열은 펄쩍 뛴다. 마타도어만 횡행할 뿐 “실제로 주변에서 조선노동당을 추종한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만나본 일이 없다”라고 이용대씨는 잘라말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당 게시판에 글을 올린 한 당원(인파이터)은 ‘주사파에 대한 공격은 곳곳에서 이루어지는데 반론하는 주사파는 한 명도 없는 희한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며 ‘민주노동당판 박홍 소동’을 비웃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주사파는 무조건 안돼’라는 식의 맹목적인 비난은 운동권 내부의 뿌리 깊은 ‘NL 혐오증’을 반영할 뿐이다.

이런 감정 섞인 비난이 오가면서 민주노동당은 쑥대밭이 되었다. 개중에는 이러고도 함께 갈 수 있겠느냐며 선거 후유증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이번 북한 논쟁을 민주노동당 내 당권 투쟁 과정에서 불거진 촌극 정도로 보면, 문제는 간단하다. 선거가 끝나면 계파간 갈등은 봉합될 것이다. 창당 이래 늘 그래 왔듯이. 섣부르게는 분당 가능성까지 거론되지만, 소수의 한계를 절감하며 통합 노력을 쌓아온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출에 막 성공한 이 시점에 개체 분열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당 일각에서는 선거에 구애됨 없이 민주노동당이 북한 논쟁을 더 격렬하게, 본격적으로 개시해야 한다는 주장도 대두하고 있다. 앞서의 당 간부 ㄱ씨는 “1990년대 등장했던 민중당을 상기하라. 간첩 이선실 사건 한 방에 날아가 버리지 않았나”라며, 민주노동당이 진정 수권 정당을 목표로 한다면 북한과 관련된 의혹들을 하루빨리 털고 가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창당 과정에 간여한 강태운 전 고문이 간첩 사건에 연루되면서 지난해 민주노동당은 한 차례 홍역을 치렀다. 간첩이라기에는 강씨의 활동 내역이 미약해서 그나마 다행이지, 앞으로 좀더 고약한 사건에 휘말리면 당 존립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당원들은 공유하고 있다.

북한 논쟁은 나아가 민주노동당의 정체성·노선·향후 진로 등을 판가름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그간 당 운영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온 민족주의 계열은 민주노동당이 통일·자주외교 문제를 소홀히 다루어왔다고 비판한다. 이에 반해 범좌파 계열은 민주노동당이 계급성을 강화하는 데 앞으로 더 주력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민주노동당은 이제 이 모든 문제를 햇볕 아래 드러내고 제대로된 논쟁을 펼칠 때가 되었다. 이것이 민주노동당에 정당 지지율 13.1%를 몰아준 유권자들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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