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 무대에 몰리는 ‘화려한 조연’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2.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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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 주위에 연예인들이 바글거린다. 후보 진영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영입되거나 자발적으로 뛰어든 이들은 예전과 달리 매우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국회의원들도 다 떠나가는 판인데 개그맨인들 남아나겠나?” DJ 흉내로 인기를 모았던 호남 출신 개그맨 심현섭씨가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고 나선 것에 대해 의견을 묻자 민주당 당직자가 시큰둥하게 내뱉은 말이다.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연예인들의 정치 참여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그 물줄기는 대부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쏠려 있다.


지난 11월6일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에는 분냄새가 진동했다. 당사 10층에서 열린 ‘직능특위 예술인 홍보단’ 발대식에 연예인과 문화예술인 8백여명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복도까지 꽉꽉 메운 모습이 마치 방송국을 통째로 한나라당 당사 안으로 옮겨 놓은 듯 보였다.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은 식전 연설을 통해 “정권이 바뀌니 방송에서 사투리도 바뀌었다”라며 연예인들을 부추겼고, 서청원 대표는 축사를 통해 “이 정권 때문에 연예인 출연에도 형평성을 잃어 피해를 본 연예인이 있다”라며 연예인들의 피해 의식을 자극했다.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씨는 “이후보 뒤에는 우리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부디 이후보가 건강을 지켜 이번 선거에서 승리하기를 바란다”라고 축사를 전했다.


구씨 외에도 이번 행사에는 코미디언 배삼룡씨, 탤런트 사미자·양택조 씨, 가수 현 미· 한명숙 씨 등 원로 연예인과 임채무 전원주 배일집 배연정 현 철 이상룡 김수희 설운도 이용식 등 중견 연예인이 다수 참석했다. 또 탈북자 출신 탤런트 김혜영씨를 비롯해 너훈아 조영필 같은 밤무대 모방 가수, 젊은 모델들까지 각 분야 연예인들이 행사에 참석했다.





한나라당, 5년 전 국민회의와 비슷한 ‘호황’


참가자들은 행사가 끝날 때까지 대부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한나라당이 이들을 줄 세운 것이 아니라 이들 스스로 한나라에 줄을 섰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1997년 국민회의 상황과 유사하다. 당시 정한용 전 의원이 주축이 되어 김대중 후보 연예인 지원단이 꾸려졌다. 한나라당 직능국 관계자는 “전국연예예술인노동조합 석 현 위원장과 탤런트 이균식씨, 가수 설운도씨 등이 주축이 되어 홍보단을 꾸렸다”라고 말했다.


11월6일 행사가 한나라당이 양적인 면에서 연예계를 장악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11월10일 한사랑자원봉사단 발대식은 질적인 면에서도 연예계를 장악했음을 시위하는 행사였다. 이날 이회창 후보는 개그콘서트 팀의 난타 연주에 맞추어 입장해서 베이비복스 멤버들과 함께 퇴장했다.


이 날 발대식에는 가수 변진섭·박정운·베이비복스, 탤런트 박 철·김나운, 개그맨 심현섭씨 등이 참석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심현섭씨와 함께 개그콘서트 팀이 대거 참여한 것이다. 강성범·박성호· 황승환·이병진·김 숙 등 최고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개그맨들이 함께 정치에 참여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개그콘서트팀이 한사랑자원봉사단에 대거 참여하게 된 것은 심현섭씨의 리더십 때문이었다. 아웅산 테러로 순직한 전 민정당 총재비서실장 심상우 의원의 아들인 심씨는 이번 선거를 계기로 본격적인 정치 활동에 나섰다. 그는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며 ,이후보가 당선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이런 한나라당의 들뜬 분위기와 달리 민주당 분위기는 차분한 편이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은 ‘연예인 지원단’ 활동을 통해 톡톡히 재미를 보았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아예 조직을 꾸리지도 않았다.


민주당 쪽에 연예인 참여가 적은 것은 당선가능성을 낮게 본 탓도 있지만 노무현 후보가 연예인들의 정치 활동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중 집회에서도 이벤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노후보는 연예인들을 전면에 내세우기를 꺼리는 편이다. 연예인이라 하더라도 정치적 지향점이 일치해야 함께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후보를 위해 뛰는 연예인들은 대부분 ‘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노문모)에 속해 있다. 배우 문성근 명계남 권해효 박광정 방은진 오지혜 공형진 씨가 그들인데, 이밖에도 이창동 임순례 이현승 이민용 여균동 류승완 감독이 속해 있다. 특히 문성근씨와 명계남씨는 연예 활동을 거의 접고 노무현 후보 지원 활동을 하고 있는데, 명씨는 ‘노후보가 대통령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지 않겠다’며 술까지 끊었다.





‘노문모’, 선전대 아닌 오피니언 리더 자임


선거를 앞두고 만들어진 한나라당의 연예인 홍보단과 달리 노문모는 지난해 말에 만들어졌다. 386세대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노문모는 지난해 12월17일 발대식을 갖고 회원 1백2명의 이름으로 노무현 지지 선언을 했다. 노문모에는 영화인회의·민족문학작가회의·우리만화발전을위한연대모임 등 소장파가 다수 참여했다.


노문모를 활용하는 민주당의 전략은 한나라당과 다소 차이가 있다. 이들을 선전대가 아니라 오피니언 리더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미 각 단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들을 통해 조직표를 흡수한다는 전략이다. 노문모 김종선 총무는 “한나라당은 연예인들의 얼굴을 쓰지만 우리는 연예인들의 머리를 쓴다. 이들이 문화예술산업 종사자들의 표를 움직여줄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초기에 단순한 지지 성명 발표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지만 대선 정국에서 노문모는 꾸준히 성과를 내고 있다. 명계남씨는 민주당 국민참여운동본부의 부본부장으로서 ‘100만 서포터스 운동’을 이끌며 조직표를 다지고 있고, 뛰어난 연설가인 문성근씨는 연설과 강연을 통해 젊은 유권자들을 설득하고 있다. 얼마 전 이창동 감독은 텔레비전 토론에서 노후보를 지지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출마하면서 노문모 소속 문화예술인 중에서도 이탈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노무현 지지 선언에까지 참여했던 가수 정태춘씨는 얼마 전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42쪽 위 상자 기사 참조).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에 출연했던 배우 문소리씨도 권후보를 지지하고 있으며, 변영주 감독도 민주노동당 홍보위원을 맡았다.


조직이 열세인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는 조직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인 친분을 통해 연예인을 끌어들이고 있다. 원로 탤런트 강부자씨와 연극 배우 윤석화씨, 영화 배우 장미희씨, 가수 김흥국·김상희·노영심·이은하·김현정 씨, 탤런트 최진실·박상원·손지창·백일섭 씨가 정후보를 위해 뛰고 있다.


정몽준, 개인 친분에 의존


그러나 정후보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초기에 정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혔던 연예인 중에 상당수가 이회창 후보 쪽으로 돌아서고 있다. 국민통합21 관계자들이 정후보 지지 연예인으로 꼽았던 많은 연예인들이 11월6일과 10일 한나라당 연예인 행사에 얼굴을 내비쳤다. 국회의원만 아니라 연예인도 정치 철새가 있었다.


정후보 진영에서 가장 열심히 뛰고 있는 연예인은 가수 김흥국씨이다. 문화특보를 맡아 하루종일 정후보를 밀착 보좌하고 있는 그는, 정후보에게 부족한 서민적인 이미지를 보완하고 즉석 공연을 통해 흥을 돋우는 등 맹활약하고 있다. 선거운동을 위해 10년 동안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도 그만둔 그는 “해병대·축구·불교계 등에서 그동안 내가 쌓은 모든 역량을 정후보에게 바친다. 12월19일까지는 오직 정몽준을 위한 김흥국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선거가 임박하면서 각 후보 진영은 연예인 영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동안 소홀했던 노후보 진영도 월드컵 이후 국민 가수로 떠오른 윤도현씨에게 주야로 러브콜을 보내는 등 적극 적인 구애에 나섰다. 노후보는 지난 11월9일 윤씨의 콘서트장까지 찾아가 어렵게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고 선거에 나선 후보처럼 연예인들도 ‘목숨을 걸고’ 선거에 뛰어들고 있어서 우려를 낳고 있다. 이번에 처음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는 심현섭씨는 “선거판에 뛰어든 이상 모 아니면 도다. 개나 걸은 없다. 칭찬을 듣든 욕을 먹든 개의치 않고 최선을 다해 선거운동을 하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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