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잊은 수입차들의 고속 질주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3.12.0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비 침체에도 판매 급신장…‘소수 부유층 차별 공략’ 마케팅 주효
수입차 시장이 ‘폭주족’에 가까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11월 수입차 판매 대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4.6%나 늘었다(도표 참조). 10월까지 누적 판매 대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19.6%나 증가했다. 같은 기간 국산 자동차의 내수 판매 대수는 18.2% 줄었다. 내수 시장은 자동차뿐만 아니라 생산재와 소비재 가리지 않고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오로지 수입차 업체만 내수 침체의 늪을 거칠 것 없이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 여의도 ㅇ초등학교 교사 안 아무개씨는 “토요일 오전 11시30분이면 자녀를 태우기 위해 자가용들이 운동장에 들어서는데, 수입 고급차가 최근 들어 부쩍 늘었다. 1년 전만 해도 국산 대형차가 대부분이었다”라고 말했다.

수입차 시장 성장세는 ‘수수께끼’에 가깝다. 소비가 크게 위축되어 있는 데다 수입차는 동급 국산차에 비해 2배 이상 값이 비싼데도 날개돋친 듯이 팔리고 있다. 소득이 줄면 비싼 제품일수록 수요가 준다는 고전 경제학의 공리(公理)가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국산차의 성능과 디자인이 과거보다 눈에 띄게 개선된 것을 감안하면 수입차의 독주는 기이한 현상이 틀림없다.

수입차가 엔진 성능, 가속력, 조향성, 정숙성 면에서 국산차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폭발적 성장세를 설명하기에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도요타코리아는 10월 출시한 최고급 세단 뉴 LS430이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달리는 데 6.7초밖에 되지 않고 최고 시속은 250㎞라고 광고한다. BMW코리아도 뉴 530이 최고 시속 250㎞에다 엔진 힘이 동급 어느 차종보다 강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국내에서 시속 250㎞로 달릴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될까. 더욱이 수입차를 사는 이들은 교통 정체가 심각한 서울 강남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19세기 말 미국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렌의 통찰력에 의존해야 할 듯하다. 베블렌은 필요에 의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자랑하거나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소비하는 제품이 있다고 갈파했다. 이 제품들은 비쌀수록 잘 팔리는데, 이 같은 제품을 '베블렌재(財)'라고 부른다.

베블렌 효과·시위 효과 업고 ‘쌩쌩’

수입차 업체들도 베블렌 효과를 판매와 마케팅 전략에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다. BMW코리아는 자사 제품을 ‘성공한 사람들이 타는 차’라고, 도요타코리아는 ‘렉서스를 타는 이는 모두 VIP다’라고 광고한다. 김효준 BMW코리아 사장은 “BMW는 고객을 몇 그룹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사회 지도층에 마케팅 전략을 집중하고 있다. 성공한 사람들이 타는 차라는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이 마케팅 활동의 목표다”라고 말했다. 수입차 업체들이 고급화한 소비 행위를 통해 일반 소비자들과 차별성을 갖는 ‘럭셔리 마이너리티(luxury minority·극소수 호화 생활자)’를 마케팅 타깃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물론 베블렌재는 수입차 시장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패션과 액세서리 수입 명품 시장 또한 해마다 50%씩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4조원대까지 팽창했다. 베블렌 효과가 수입차 성장세를 설명하는 데 충분치 않다면, 하버드 대학 교수를 지낸 제임스 듀젠베리의 소비 이론을 빌려보자. 듀젠베리는 ‘시위 효과(示威效果)’라는 경제 용어로 이 난제를 풀어낸다. ‘전시 효과’라고도 불리는 이 개념은, 개인의 소비가 소득 수준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소비 성향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수입차를 사는 이들이 서울 강남에 거주하는 사회 지도층이 많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해석에는 일리가 있다. 옆집 사람이 벤츠를 타면 BMW 아니면 못해도 렉서스는 타야 한다는 소비 심리가 있다는 것이다.

국내 수입차 시장을 주도하는 업체들은 ‘프리미엄 카’의 상징인 BMW, 도요타 렉서스, 메르세데스 벤츠이다. 폴크스바겐·푸조·GM·포드·다임러클라이슬러 등 ‘대중차’를 생산하는 업체의 모델은 국내 판매율이 상대적으로 낮다. 도요타도 세계 최고의 베스트 셀러인 ‘캄리’ 모델을 들여오지 않고 있다. 대중차를 수입해서는 품질과 성능에서 국산차와 차별성을 보이기 어렵고 국내 수입차 소비자의 성향과도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틈새’ 뚫은 렉서스, BMW 아성 깨뜨려

이른바 럭셔리 마이너리티가 형성되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자기 개성과 취향을 드러내는 소비 유형을 보인다. 이 추세는 젊은층뿐만 아니라 중년층과 노년층으로 확대되고 있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수입차 시장 1위를 줄곧 유지했던 BMW가 지난 10월부터 2위로 주저앉았다. 대신 도요타의 렉서스가 1위로 올라섰다(도표 참조). ‘남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진 소비자들이 이웃들이 많이 타는 BMW를 외면하는 것이다. 렉서스 강남전시장 마케팅팀 관계자는 “회사 임원이나 전문직 종사자 상당수가 팔릴 대로 팔린 BMW보다 렉서스를 선택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도요타코리아는 렉세스의 주력 모델을 5천만원대인 ES330과 1억원대인 LS430으로 내세웠다. BMW의 주력 모델인 530과 740은 각각 7천만∼9천만 원, 1억2천만∼2억 원대이다. 도요타코리아는 가격대를 달리해 BMW가 구축한 진지를 피해 가면서 ‘틈새 시장’을 파고든 것이다. 도요타는 또 렉서스가 갖고 있는 고급 이미지뿐만 아니라 정숙성·조향성·내구성·연비 등 한국인이 좋아하는 요소를 최대한 고려했다. 도요타는 LS430의 실내 소음도(31㏈)가 도서관 소음도(40㏈)보다 낮다는 것을 강조한다. 렉서스 ES330은 경쟁 차종보다 싼 데다 연비가 좋아 최근 몇년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차종이다.

수입차 업체, 내년에 신차 40여 종 줄줄이 출시

그동안 주춤해 있던 폴크스바겐·포드·GM·다임러클라이슬러 등 대중차의 국내 판매량도 최근 들어 늘고 있다. 후발 수입차 업체들은 이같은 변화를 럭셔리 마이너리티의 시위 효과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모방 심리를 자극하는 마케팅을 전개하고 있다. 수입차 시장 성장은 국내 자동차 업체들의 시장 점유율을 잠식하고 있다. 하지만 좋은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수입차가 들어오기 전까지 ABS(anti-lock brake system·브레이크 안전 장치)와 에어백 등 혁신적인 안전 장치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 최근 ABS와 에어백은 국산 경차에까지 옵션으로 채택될 만큼 변했다. 이 같은 기술 발전은 내수 시장뿐 아니라 수출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지만, 이를 앞당긴 데는 수입차의 영향이 컸다.

수입차 업체들은 내년에 신차를 40여 종 출시할 계획이다. 차종도 더 고급화한다. 메르세데스 벤츠가 ‘움직이는 궁전’인 마이바흐, 폴크스바겐이 자사 최초의 프리미엄카인 페이톤, 볼보가 뉴 S40 등 고성능 차들을 잇달아 내놓을 계획이다. 이 차들은 국산차가 흉내낼 수 없는 디자인과 엔진 성능, 그리고 고급 내장재를 갖추고 있다.

수입차 장벽이 높다는 일본 시장에서 수입차의 시장 점유율은 8%(판매 대수 기준)에 이른다. 현재 수입차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2%(판매 대수 기준)를 갓 넘겼다. 판매 가격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5% 가량이다. 지난 10년 동안 장기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던 일본 시장에서 수입차가 늘어난 추세를 감안하면, 국내 경기와 상관없이 한국의 수입차 시장은 당분간 꾸준히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