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 가스, 선진국부터 책임져라”
  • 李哲鉉 기자 ()
  • 승인 1997.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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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사회의 압력을 받아 한국이 12월 교토 회의에서 의무 감축국에 포함되고,2000년 온실 가스 배출 감축 목표가 설정된다면,한국 경제는 A급 태풍을 아무 방비 없이 맞는 처지가 되고만다.
세계 1백65개국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독일 본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실무자 회의가 한창이던 지난 8월4일, 유럽연합 대표단이 갑자기 한국 대표들과 비상 회의를 갖자고 제의했다. 얼떨결에 따라나간 한국 대표단에게 영국의 이안 패커드 대표가 추궁했다. “한국은 이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이니 선진국으로서 온실 가스 감축에 적극 나서야 하지 않는가?” 총회 의장인 에스트라다 중국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도 한국·멕시코 대표단과 별도 회의를 갖고, 온실 가스를 줄이는 데 두 나라가 적극 참여해 줄 것을 당부했다. 기후변화협약에서 선발 개발도상국인 한국·멕시코가 집중 공격을 받은 좋은 사례들이다.

이산화탄소같이 지구 기온을 상승시키는 온실 가스 배출을 억제하자는 취지로 채택된 기후변화협약은, 94년 3월 정식 발효된 뒤 실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해마다 당사국 총회를 열고 있다. 95년 독일 베를린에서 시작된 당사국 총회는 올해 12월1일 일본 교토에서 제3차 회의를 갖는다.

교토 총회가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지난 95년 제1차 총회에서 결의된 내용 때문이다. 당시 기후변화협약 회원국들은 베를린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 24개 가입국과 동유럽 11개 국가로 구성된 ‘부속서Ⅰ 국가’가 2000년 이후 감축해야 할 온실 가스 배출량을 교토 총회에서 결정하기로 했었다. 그후 96년 한국과 멕시코가 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하자, 한국과 멕시코를 의무 감축 대상국인 부속서Ⅰ국가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이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강하게 제기되었다.
한국 에너지 소비 증가율 선진국의 10배

당사국 총회의 실무 회의 격인 ‘베를린 위임 사항에 관한 특별 모임(AGBM)’은, 지금까지 일곱 차례 모임을 갖고 목표 감축량과 의무 감축 대상국의 범위에 대해 격론을 벌였으나 좀처럼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유럽연합 국가들은 교토 회의에서 온실 가스 배출량을 2000년에 90년 기준으로 15%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국과 멕시코를 의무 감축 대상국으로 가입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제기할 예정이다.

하지만 세계에서 온실 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미국의 입장은 다르다. 미국은 단일 감축 목표 연도가 아닌 중장기 감축 방안을 주장했다. 미국 국무부 기후변화국 조너선 퍼싱 부국장은 <시사저널>과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유럽이 주장하는 15% 감축은 불가능하다. 현실성 있는 대안을 중장기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미국이 2000년 이후 온실 가스 감축량을 확정하기 꺼려 하는 데는 자국 산업에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하지만 미국도 한국을 의무 감축 대상국으로 분류하자는 데는 동의한다. 자발적인 참여를 전제로 한국과 멕시코를 비롯한 선발 개발도상국에도 의무 감축량을 차등 배정하자는 것이 미국측 주장이다.

미국과 유럽연합이 한국과 멕시코를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는 데는 이유가 있다. 두 나라의 에너지 소비 증가량(오른쪽 도표 참조)이 빠르게 늘고 있는데다, 선진국들이 선발 개발도상국인 한국과 멕시코를 길들여 놓지 않으면 중국과 동남아시아처럼 에너지 소비량이 급격히 증가하는 국가들의 기세를 꺾지 못하리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또 한국이 의무 감축국으로 분류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후변화협약이 실시되면 한국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될 것이라는 피해 의식도 만만치 않다. 호주의 환경·경제 연구기관인 아바레(ABARE)가 올해 4월 한국을 의무 감축국에서 제외한 상태에서 부속서Ⅰ 국가들만 온실 가스를 감축한다고 가정하고 실시한 시뮬레이션에서, 한국산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눈에 띄게 높아져 선진국 제품의 시장 점유율을 잠식할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 사회의 압력을 받아 이번 교토 회의에서 한국이 의무 감축국에 포함되고 2000년 온실 가스 배출 감축 목표가 설정된다면, 한국 경제는 A급 태풍을 아무 방비 없이 맞는 처지가 되고 만다.

한국 경제는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중화학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지난 10년 평균 에너지 소비 증가율이 10.3%로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의 소비 증가율보다 10배나 된다. 한국이 2000년까지 90년 수준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동결하려면 현재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45%나 감축해야 한다.

한국산업연구원 유상희·최충규 박사 연구에 의하면 이산화탄소를 줄이기 위해 탄소세를 부과하고, 에너지 효율 향상 방안을 시행했을 때 국민총생산(GNP)은 1.6% 가량 줄어든다. 포스코경영연구소 김승래·김정인 박사가 실시한 비슷한 연구에 의하면 한국은 국민총생산 2.8% 하락을 감수해야 한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90년 수준으로 동결했을 때가 이 정도라면 유럽연합 주장대로 90년 기준 15%를 줄인다면 한국 경제가 막대한 타격을 입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교토 회의, 의무 감축국 가입 논의 자리 아니다”

따라서 한국과 멕시코는 교토 회의에서 의무 감축국으로 분류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베를린 위임 사항에 관한 특별 그룹의 한국측 수석대표 박원화 외무부 과학·환경심의관은 “우리나라 산업 구조상 온실 가스 의무 감축국에 가입할 수 없다는 처지를 납득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 대표단이 주장하는 논리는 두 가지이다. 우선 제1차 당사국 총회에서 한국은 분명히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었고, 교토 회의에서 부속서Ⅰ국가의 2000년 온실 가스 감축량을 정하자고 결의했기 때문에, 교토 회의는 한국의 의무 감축국 가입을 논의할 자리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하나는 누적책임론이다. 지난 2백년 동안 온실 가스를 배출한 것은 선진국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은 선진국이 우선적으로 져야 한다는 주장한다.

다행히 유럽연합과 미국이 실무자 회의에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어, 이번 교토 회의에서 협약이 타결되기가 쉽지 않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10월21일 열리는 베를린 위임 사항에 관한 특별 모임의 8차 회의에 참석하는 한국 수석대표 박원화 심의관도 “타결 여부는 반반이다. 설사 타결된다고 해도 한국이 의무 감축 대상국으로 분류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라고 말했다.

현대환경경제연구소 하성훈 연구원은 다른 관점에서 한국이 의무 감축국으로 분류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 “온실 가스 감축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클수록 협상에 유리하다. 한국이 의무 감축국에 포함되었을 때 한국 경제가 겪는 어려움이 클수록 우리가 의무 감축국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유럽연합이나 미국 대표에게 납득시키기 쉽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측 입장 변화이다. 미국 행정부가 크게 양보해 유럽연합과 감축 목표량에 합의하면 또 다른 핵심 현안인 의무 감축 대상국의 확대 문제에 논의의 초점이 맞춰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 행정부가 협상 타결을 위해 올해 말 양보안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미 국무부 기후변화국 조너선 퍼싱 부국장은 “클린턴 대통령은 수주 내로 감축 목표량을 타결하기 위해 미국측 입장을 밝힐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기후변화협약이 개발도상국에게 줄 수 있는 혜택을 들어 낙관론을 펴는 전문가들도 많다. 기후변화협약에는 온실 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설비를 갖출 때 선진국이 재정·기술 지원을 해야 하는 의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에너지 절약형 산업 구조를 만들어 가야 하는 처지인 개발도상국에게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환경 선진국의 재정 지원과 기술 지원을 받아가면서 환경 친화적으로 산업 구조를 조성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
“기후변화협약 조항 잘 이용하면 기회 될 수도”

한국산업연구원 유상희 박사는 “기후환경협약에 포함된 조항을 제대로 이용하면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도 환경 관련 전략형 설비와 기술을 가지고 있어 개발도상국에 직접 투자 형태로 참가해 에너지 절약형 시설을 지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견해들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주장이 많다. 우선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하면서 선진국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재정·기술 지원을 받기는커녕 다른 개발도상국을 지원해야 할 처지라는 것이다. 박원화 심의관은 “한국은 더이상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지 않아 선진국의 재정·기술 지원을 얻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독일 본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실무자 회의로 돌아가자. 영국 대표의 추궁에 한국 대표단은 “한국은 제1차 당사국 회의에서 정한 의무 감축 대상국이 아닌데다, 지금 대기권을 떠도는 온실 가스는 대부분 선진국이 배출한 것이므로 우리는 책임질 수 없다”라고 말하며 회의실을 나왔다. 선진국 주장을 수그러뜨렸지만 회의장을 나오는 한국 대표단의 마음은 개운치 않았다. 올해 12월에 열리는 교토 총회를 무사히 넘기더라도 내년에는 더 강한 압력에 직면할 것이 뻔하다. 제1차 당사국 총회에서 98년에 의무 감축 대상국을 재조정하기로 결정한 바 있어 한국이 의무 감축국이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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