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경협, 머뭇거릴 시간 없다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5.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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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연말에 획기적 방안 내놓을 듯… 김우중·정주영 대북특사 ‘물망’
북한에 대한 쌀 제공을 계기로 해빙기를 맞는가 싶던 남북 경협이 다시금 경색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지난 9월 말 3차 남북 차관급 쌀회담에서 북한측이 우성호 귀환과 같은 현안들을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아 회담이 결렬된 데 있다. 그 이후 통일원은 기업인들의 방북을 전면 불허하였다. 게다가 북한 투자와 관련한 기업들의 계획이 언론에 보도되면 통일원은 직접 해당 기업에게 경고하는 등 과민 반응을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LG그룹이 북한 광명성총공사와 합작하여 대동강천연색TV공장에서 내년까지 컬러TV를 8천대 조립 생산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자 통일원의 반응은 극도로 예민했다. 통일원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고 있는데 왜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느냐’며 LG그룹에 강력한 경고성 메시지를 전달했던 것이다. 통일원의 이러한 반응 때문에 LG를 비롯한 대기업들은 현재 북한 투자와 관련해 조심스런 태도를 보이고 있다.

북한 당국의 분명한 태도 변화가 있기 전까지 남북 경협을 확대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매우 확고한 것 같다. 나웅배 통일원장관 겸 부총리는 지난 11일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 지역에서 통신 시설이 확보돼 신변 안전 장치가 마련되지 않는 한 우리 기술자를 추가로 보내는 등 경협을 확대하기 어렵다. 경협도 현재 기업당 5백만달러 상한인 시범 사업 범위를 넘어서서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쌀회담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한 김영삼 정부가 기업들의 북한 투자를 축으로 한 남북경협을 계속하여 경색 국면으로 끌고 갈 것인가. 물론 남북 당국자 간의 대화를 거부하는 북한의 입장을 한국 정부가 결코 쉽게 수용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북한의 열악한 경제 사정을 감안하면 경협을 중심으로 하여 남북한 관계가 개선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한국 정부가 마냥 뒷짐만 지고 있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한 정부 당국자는 “쌀회담을 통해 무려 15만t에 달하는 쌀을 무상으로 주었는데도 북한이 우성호를 돌려보내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정부가 분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정부는 연말께 남북 관계를 화해 국면으로 유도하기 위한 중대한 조처를 취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이와 관련해 청와대가 현재 남북 경협 부문의 물꼬를 틀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그는 청와대가 어떠한 조처들을 강구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조처들은 김영삼 대통령이 지난 8월15일 발표하려다 취소한 대북 제의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그는 말했다. 김대통령이 발표하려던 대북 제의 중에는 기업들의 북한 투자를 상한선인 5백만달러 이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조처가 들어 있었다. 당시 삼성갟G겢肉?같은 대기업들이 북한 투자 계획을 수정하느라 법석을 떤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발표 시기가 연말쯤으로 잡혀 있다는 대북 조처를 청와대가 강구하고 있는 까닭은, 물론 경색된 남북 관계를 경협이라는 틀 안에서 풀어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청와대의 또 다른 의중은 국내 정치적인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무엇보다 집권 여당은, 남북 관계 진전에 따라 김대통령과 김정일 간에 정상회담이 개최되면 그것만큼 내년 총선과 그 이듬해 대선에 도움이 되는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청와대가 취할 대북 조처가 기업들의 북한 투자 상한선을 높이는 정도로 끝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비록 북한이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지만 남북 관계가 북겧?및 북겴?관계 진전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미·일과의 관계 개선에 가장 비중을 두고 있는 북한이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매력을 느낄 조처들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와대가 이미 알려진 것 이상으로 획기적인 제의를 하리라고 기대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극비리에 김대통령을 독대한 것이 비상한 관심을 끄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대그룹 총수들 중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북한 투자 진출에 많은 관심과 정열을 쏟아온 그가 김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만난 시점은, 지난 8월8일 이건희 회장이 김대통령을 독대하고 나서 몇 시간 뒤였다. 이 자리에서 김대통령은 김회장에게 남북 경협을 중심 축으로 한 남북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어 달라고 은밀히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통령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요청을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가 다시금 김회장을 특사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는가라고 보는 시각은 분명히 있다. 그 까닭은, 그가 국내 다른 기업인들과 달리 북한 당국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다는 데 있다. 지난해 6월 그가 극비리에 방북한 이유도 그가 당시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한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한 특사 임무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북한 투자, 정치논리에 묶이지 말아야

청와대의 대북 제의와 관련해 흥미로운 것은, 김대통령이 8월 말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을 만나 그에게 빠른 시일 내에 방북하여 북한 당국에게 2000년 월드컵을 남북한 공동으로 개최하자고 제의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점이다. 얼마 뒤 정씨는 현대그룹의 고위 관계자 12명으로 방북단을 구성하여 방북 신청을 했다. 그러나 통일원은 이를 불허했다. 당시 표면적인 거부 이유는 방북 인원이 너무 많기 때문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통일원이 정씨 일행의 방북을 불허한 진짜 이유는, 당시 쌀회담이 난항을 거듭하는 등 남북 관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때문에 한 정부 당국자는 정씨가 다시금 방북 신청을 해오면 승인이 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현대그룹은 금강산 개발 사업과 원산 수리조선소 사업을 포함한 북한 투자를 재개하기 위한 방북단 구성을 이미 마치고 곧 방북 신청을 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명예회장이 지난달 방북 신청을 했을 때 대표단에는 그의 6남이자 축구협회장인 정몽준 의원이 빠져 있었다. 월드컵 공동 개최를 제의하려면 정의원이 포함되는 것이 당연한데도 제외된 까닭은, 정씨가 김대통령의 요청에 대해 보안을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만약 그가 방북단에 들어 있을 경우 정씨의 방북 목적 가운데 하나가 월드컵 남북한 공동 개최 제의에 있을 것으로 밝혀질까 우려했던 것이다.

어쨌든 쌀회담마저 파국을 맞은 지금 청와대가 남북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카드는 남북 경협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 점에서 김대통령이 김회장과 정명예회장을 통해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무엇인가를 꾀하려는 것은 불가피한지도 모른다.

정부가 남북 경협을 확대할 수밖에 없는 요인은 또 있다. 바로 외국 기업들의 북한 진출이 눈에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세계적인 통신 업체들인 스웨덴의 에릭슨과 프랑스의 알카텔이 최근 북한 진출을 확정했다. 물론 외국 기업들이 한국 기업들보다 먼저 북한에 진출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기업들의 발목을 계속 잡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는 통일 이후를 내다볼 때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가 집권 여당의 정치적 이해를 위해서든 외국 기업들의 북한 진출에 대응하기 위해서든 남북 경협을 연내에 확대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은 많다. 하지만 정부가 남북 관계는 경협을 축으로 풀 수밖에 없음을 안다면 일관성 있는 대북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쌀회담이 안된다고 해서 이미 예정된 기업인들의 방북을 불허하고 북한 투자 분위기를 경색시키는 것은 정부에 대북 전략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정부의 대북 전략 부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의 북한 무역관 설립 문제이다. 비록 평양은 아니지만 나진시에 무역관을 설립하기로 남북한 당국 실무자들이 이미 합의했는데도 아직 발표가 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책임은 한국 정부에 더 많이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우성호 귀환 같은 정치적인 문제는 따로 협상을 통해서 풀고, 무역관 설립은 미·북한관계 개선을 고려해 서둘러야 하는데도 그러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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